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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29.11 : 광주학생 독립운동

by 당대 제일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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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 독립운동"은 1919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적 항일 운동"으로 꼽힌다. (31운동 10년 후) 1953.10, "국회 본회의"에서 "윤택중 의원 (한국민주당)"의 제안으로, "만장일치" "학생의 날"이 가결되었고, 2006, 11.03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 광주학생 독립운동광주학생 항일운동

1929.11.03, "광주 시내"에서 일어난 "일본 학생""한국 여학생 희롱"으로 일어난 "조선 학생본 학생" 간 충돌로 시작되었다1929.11.12, "광주지역학생 대시위 운동"을 거쳐, "호남지역" 일대로 확산되고, 다른 한편으로 "서울" 거쳐, 1929.11월 말에서 1930.03월이나 05월까지 "전국"로 확산된 "학생독립항일운동"을 말한다.

1929.12월에는 "국내(경성평양함경도 등)국외(만주벌에 위치한 간도 등)"으로 확산되었고, 1930.05월까지, 전국적인 동맹휴학학생 항일시위로 변모발전했다.

일 시 : 1929.11.03~ 1930.05월       장 소 : 전국간도중국일본미국

원 인 : 610만세운동(1926)한일학생 차별교육"박기옥" 희롱 사건동양척식주식회사의 탄압

결 과 : 신간회 해소학생운동 탄압체포/ 자수 : 신간회 간부(30여 명)학생 수는 부지기수

구호 내용 : 약소민족해방만세제국주의타도 만세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무산계급혁명 만세  (당시 "러시아혁명" 이후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주요 인물 : 박준채 (당시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장재성허정숙 (허헌의 딸독립운동가조선 정치인법관)변호사 (허헌김병로)조병옥안창호홍명희한용운김철수권동진 (31운동 시 33인중 1)송진우 (동아일보사장)안재홍 (조선일보 부사장)

참가자 : 학교(350여 개)해외 학교독립 단체 : 일제총독부 기록(194)2006년 광주교육청 조사(320)학생 독립운동 기초자료 발굴 팀(350여개의 조선인관련 학교가 참여)

시위: 신간회성진회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청년총동맹조선학생전위동맹학생전위동맹조선청년총연합회조선노동총동맹근우회소녀회광주중학교광주고등보통학교ㆍ화여자전문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고등학교경신학교실천여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협성실업학교전남사범학교동덕여고보배화여고진명여고근화여고정신여고

12.09일에는 "경신학교(300여 명)보성고보(400여 명)중앙고등보통학교(700여 명)휘문고등보통학교(400여 명)협성실업학교(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12.09일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2.13일까지, "서울지역"에서만 1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ㆍ동맹휴학에 참여하였고, 그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그중 "서울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신간회""광주학생 시위운동"을 전국적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10"권동진(31운동 시 33인중 1)허헌송진우(동아일보사장)안재홍(조선일보 부사장)조병옥홍명희한용운주요한" 등이 대책회의를 갖고, 12.13"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갖고,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갖고,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일경"이 이를 탐지하고, 12.13일 아침 6"신간회 주요간부 30여 명"을 예비 검속하여, "서울""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지방지회"에 보내는 지시문은 이미 전달되어,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1930.03월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시위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이 학생독립운동은 "만주지역"의 한인 거주지역까지 확대되었다.

2. 배 경

"일제""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 제한직업교육/일본어/일본사 교육 실시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비판/자치활동 금지조선인 학생에 대한 무시조선 학생들을 억압"하였다결국 "조선인 학생들""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무시우민화정책을 당하면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광주"소재 각 고등보통학교(중고통합과정)에는 "성진회독서회" 등의 비밀학생 조직이 생성되어 있었다또한 "일본인 학생들"에 의한 조선인 학생들의 차별무시 역시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

1926.04, "순종 사망"으로 "610만세운동"이 전개된다1926년 연말이 다가오자, "민족운동사회주의운동" 내에서는 "일본"에 의한 "자치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된다이러한 흐름은 "홍명희송진우" 등의 여러 지도자들에게도 반영되었고, "민흥회" 등에 반영된다"사회주의 그룹"에서도 "정우회 선언" 등을 통해, "분열적 종파주의"로부터 "좌우합작"으로 나아갈 것이 결의된다.

그 결과, 1927.02, "이상재(조선일보 사장)" 회장으로 "송진우(동아일보)"를 비롯해, "허헌병로한용운" 등 국내 "좌익-우익"의 지도자들의 합작에 의해, 민족단일당인 "신간회"가 조직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터지는 1929년의 연초에, "신간회"의 지회가 144, 회원은 39,000여 명에 달해 각 지역의 "청년노동농민운동"을 지도해 갔다"광주지역"에서도 1927.10"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1927.11"전남청년연맹"에서 "광주청년동맹"이 분리되어 결성되었다. "신간회 광주지회광주청년동맹"의 주요 임원들은 "성진회독서회" 등의 "비밀 학생조직"의 배후 인물이었다.

장재성

 장재성 (張載性1908~ 1950421950 625 때 총살): 1929"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

1926.11(광주고보 5학년),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사회주의를 연구하며, 훗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원동력을 만들었다 1929.10.30,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양국 학생 간 싸움이 일어나자, 한국인 학생에게 "식민지 교육 철폐"등을 요구하도록 움직였다 이 때문에 양국 학생 간 싸움은 일제 항거로 발전될 수 있었다 11.13, 일경에 붙잡히고,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량인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지냈다1948"남한의 단독선거"가 진행되면서, 단독정권을 반대했던 좌익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건너가, "43문제"를 성토하고,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해주(海州)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를 진행하는데, 이때 이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9.07월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했으나, "남북 분단에 반대해 3차례 북을 오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7년형의 선고를 받고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50"625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후퇴하면서 형무소 내의 좌익사범들을 처형했다이때 장재성도 처형당하면서 삶을 마감했다.

3. 진 행

1929.10.30  :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

정치ㆍ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ㆍ멸시를 일삼는 식민지의 삶은 고스란히 학생들의 생활 속에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넓은 평야가 있는 "나주"의 경우에도 경제적 부를 독점하는 것은 "일본인 대지주들"이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부유를 누리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은 차별ㆍ멸시 속에서, 항일 의식을 키우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1929.10.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ㆍ암성금자ㆍ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 난투극은 "일본인 학생 50명"과 "한국인 학생 30명"이 싸웠는데, "한국인 학생 30"명이 사기 면에서는 더 유리하였다.

이를 본 "일경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다. 이에 "일본인 기업인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탈하는 것에 대해, 쌓여오던 분노가 겹쳐서, 폭발하게 된다. 이를 접한 1929.11.03일 "허정숙 (허헌의 딸ㆍ독립운동가ㆍ북조선 정치인ㆍ법관)"은 "광주"로 내려와, 이들 학생들을 면담하고,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 여성 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시위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

② 1929.11.03  :  광주학생운동 (1차)

1929.11.03일(일요일)은 "일본"에게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0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하굣길에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 들어가서 항의할 정도로 그들의 반일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한편 "장재성" 등은 "일제"에 대항할 자세한 행동방향을 제시한다.

•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 광주중학생과 대치 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그리하여 "장재성"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적(일제)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탄압을 하였고, 심지어는 "태양의원(개인의원)"에서 치료받던 학생들을 "도립병원장이 치료할 가치도 없다"면서, 비하하는 망언을 하여, 공분을 샀다. "동아일보ㆍ조선일보" 등에서도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ㆍ차별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할 정도였다.

③ 1929.11.12 : 광주학생운동 (2차)

"장재성"은 "광주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했으며, 인쇄를 맡은 "오쾌일"에 의해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박기석"의 집에서 약 1,000장을 인쇄하였다. 1929.11.12일 오전 8시 경, "오쾌일"은 "광주고보ㆍ광주농고"의 학생들을 통해서 유인물을 배포한다. 당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ㆍ광주농고ㆍ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일제"는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으며, "사회운동단체 간부들"도 검거당했다.

일단 경찰에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교 당국"의 가혹한 처벌이 잇따랐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기정학ㆍ퇴학"으로 "광주학생운동 가담자들"을 탄압함으로써, 중등학교 학교 교실이 텅 빌 지경이었다. 12.28일까지, "일제"는 언론 통제를 단행하여, 학생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대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각종 탄압에 대한 소문ㆍ풍문이 더욱 커지면서, 그동안 응축되었던 항일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은 "약소민족해방만세ㆍ제국주의타도 만세ㆍ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ㆍ무산계급혁명 만세"라는 구호를 사용하여, "일경"이 사상운동으로 몰아붙일 만큼 학생운동의 지도부들은 당시 "러시아혁명" 이후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론"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학생운동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분노와 우리 민족의 독립적 삶을 되돌려야 한다는 의기에 바탕을 둔 건강한 청년정신으로부터 발로했다고 볼 수 있다.

④ 여성계의 항의 운동

1929.06월, "광주학생운동"이 터지자, "허정숙" 등은 "경성"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ㆍ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며, "동맹휴학ㆍ시위"를 홍보ㆍ독려하였다.

또한 "허정숙" 등은 1930.01.15일 경에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들 "페미니스트들ㆍ이화학당ㆍ배화여전 출신 인사들"은 "경성" 각급 학교의 대표들이 만나는 자리에도 특별히 참석하여, "광주에서의 조선인 여학생의 성추행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항거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주변의 남학교 학생들과도 연대하여, 휴학ㆍ시위할 것을 부탁하였다.

"허정숙" 등은 적극적으로 나서, "이화여전" 외에도 "동덕여대ㆍ배화여전ㆍ근화여자상업학교ㆍ경성보육학교ㆍ정신여학교ㆍ실천여학교ㆍ태화여자미술학교ㆍ숙명여자고보" 등의 여학생 수백 명이 이에 동조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또한 여학생들을 통해, 인근 남자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려ㆍ호소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 밀정"에게 정보가 입수되어, 그해 말 "허정숙"과 여학생들은 "경성"에서의 "항일동맹휴교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30.01월 "경성 종로경찰서"에 체포,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ㆍ경성 항일학생 시위 주도ㆍ조선공산당 재건 등의 혐의ㆍ유언비어 날조ㆍ선동 혐의" 등으로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의 배후 조종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는 탄압을 받자, "허정숙"은 1930년대 중반 "옌안"으로 망명하게 된다.

⑤ 학생독립운동의 전국으로의 확산

11.16일, "장석천(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는 "서울"로 올라와, "조병옥ㆍ김병로" 등 "신간회 중앙간부들"에게 "제2차 시위"의 전말을 보고하고, 이어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곽양훈ㆍ차재정" 등에게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를 전국 항일시위운동으로 확산할 것을 역설했다. 이 두 모임에서 서울 시내 각 학교에 이미 조직되어 있는 "비밀독서회 조직"을 통해, 시위운동을 "서울"로 확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장석천"은 특히 후배 "장홍염(휘문고보 5년생)"을 설득하여, "장홍염"이 서울시내의 주요 "조선인학교"들의 학생 운동가들을 접촉하였다. 1년 전에, "장홍염" 자신이 "ㄱ당 사건"에 관련되어, 수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처지였다.

11.20~ 12.02일까지의 준비기간을 거쳐, 1929.12.03일 "서울"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광주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ㆍ독립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 "일경"의 예비검속으로 "서울지역"의 조직 주동자들이 잡혀 갔지만, 드디어 12.09일부터 서울지역 학교들의 항일시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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