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新幹會)"는 "좌ㆍ우익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로,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조선민족 운동의 대표단체"로 발족하여, 독립운동 가운데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일제"로부터 탄압받아 해산된 것이 아닌, "좌ㆍ우 내부분열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다.
1. 신간회 (新幹會) : 1927.02.15~ 1931.05.15
본래 "지하 비밀결사 단체"가 아닌, "합법적으로 항일독립"을 전개한 단체로, 합법 단체인 까닭에 "일제 당국"의 탄압 하에서, 기대한 만큼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좌ㆍ우익"의 갈등은 적잖게 있었다. "비타협 민족주의자ㆍ사회주의자ㆍ천도교(구파)ㆍ기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으나, 자치운동을 주장하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 일 시 : 1927.02.15~ 1931.05.15
• 구 성 : 민족주의자 + 사회주의자 + 독립운동가 + 민중운동가 + 민흥회(民興會ㆍ서울청년회 + 물산장려운동 세력)
• 이상재(회장ㆍ조선일보사장)ㆍ권동진(부회장ㆍ천도교(구파)) →간사 35명 선출, 조직 확대에 주력 ㆍ홍명희ㆍ안재홍(조선일보사장)ㆍ허헌ㆍ김병로ㆍ신석우ㆍ문일평 ㆍ사회주의자 - 강달영(조선공산당 책임비서)ㆍ김준연
•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불참 : 이광수ㆍ최남선ㆍ최린ㆍ김성수 (동아일보 창립자ㆍ호남 대지주)ㆍ송진우 등 → "민족개조론"이 정신적ㆍ이론적 바탕으로, 실력 양성(경제)ㆍ민족성 개조(사상)ㆍ자치권 획득(정치)
• 목 표 :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예속 탈피ㆍ언론, 집회, 결사,출판의 자유 쟁취ㆍ청소년 운동ㆍ여성운동ㆍ형평운동 지원ㆍ파벌주의/족보주의 배격ㆍ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ㆍ근검절약운동 전개
• 회원 수 : "전국구"는 물론 "해외 지부"까지 두었다. 농민의 숫자가 가장 많아, 1931.05월 회원 중, 농민이 2만여 명, 54%를 차지했다. 1928.02 (20,000명)ㆍ1929.02 (30,000명)ㆍ1931.05 (해산 시, 39,914명)
• 지회 수 : 1927.12 (100개소 돌파 기념식)ㆍ1928.02 (123개)ㆍ1929.02 (144개)ㆍ1931.05 (해산 시, 124~126개)
"3ㆍ1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ㆍ진출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1920년대에 "민족운동"이 국내외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무장 독립투쟁"이, "중국"에서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이, "국내"에서는 "노동ㆍ농민ㆍ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개량 정책"을 써서, "독립운동"의 역량 분열ㆍ약화를 모색했다. "일제"는 당시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실력양성 운동"을 "일제지배" 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1925.01월, 발표된 "이광수(민족개량주의자)"의 "민족적 경륜"은 "자치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에 "이상재ㆍ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1927.02.15일, "기독교청년회(YMCA)회관"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거행되었다. 회장에 "이상재"를 선출했으며, 창립 후 각지의 "독립운동가ㆍ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각 지회는 "대중의 의식개발"에 노력했고, 다양한 형태로 "일제 식민지정책 반대운동"을 했으나, 그러나 "신간회 본부"는 일제의 탄압ㆍ지도력의 미비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가, 1929.12월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집행부의 다수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이후 등장한 "김병로(변호사) 체제"는 "일제"와의 직접적 충돌을 가급적 피하려 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신간회"는 "지도부"마저 일제와 타협하려는 타협주의"를 내세워, 소위 "민족 개량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자, "민족주의 계ㆍ사회주의 계"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런 "온건노선"에 "12월 테제"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반발하여, "신간회 해소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1931.05.15일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되었다.
"신간회" 해체 이후, "사회주의 계"는 중요한 합법적 활동무대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후 국내에서는 "통일전선 운동"이 전개되지 못했다.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안재홍 등)"은 거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지조를 지키거나, "국어ㆍ국사 연구" 등의 개인적 저항에 머물고 말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보다는, "혁명적 노동조합ㆍ농민조합 운동"과 그에 기초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몰두했다.
2. 창 립
"사회주의자"들도 초기의 "계급 중심적 사고"를 극복하고, 1924년경부터는 "타협적' 민족운동과 '혁명적' 민족운동"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6년 들어, "비타협 민족운동"과의 협력이 조직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비록 실행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제2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과 "권동진·안재홍·김준연(金俊淵)" 등이 비밀리에 접촉하여, "자치운동세력"의 움직임에 대응한 "국민당" 형태의 "민족통일전선" 조직을 결성하고자 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타협 민족주의자ㆍ사회주의자"들의 협력은 1926.11월 "제3차 조선공산당"의 표면사상단체인 "정우회"가 "비타협 민족주의자ㆍ사회주의자"들의 동맹을 통해, "민족단일당"을 건설할 것을 제창한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면서 급속히 추진되었다.
1927.01.19.일, "홍명희ㆍ권동진ㆍ신석우" 등 27명이 "신간회 창립"을 발기한 후, 02.11일 "서울청년회계열과 물산장려운동 세력"이 제휴한 "민흥회(民興會)"가 합동할 것을 합의하고, 1927.02.15일 "기독교청년회(YMCA)회관"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거행되었다.
회장에 "이상재(조선일보 사장)"을 선출했으며, "우리는 정치적ㆍ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각 지회는 "지역 청년단체ㆍ민중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고, 각 "지방 신문기자"들도 적극 참여해 24개의 지회가 "동아일보ㆍ조선일보ㆍ중외일보" 지국에서 결성되었다.
지회에서는 "웅변대회ㆍ연설회 개최ㆍ야학 개설ㆍ강좌 개설" 등의 계몽수단을 통해, 대중의 의식개발에 노력했다. 또한 "생존권 수호"의 차원에서 "노동농민단체"와 함께, "소작료/소작권 보호운동ㆍ일본인 이민 반대ㆍ수리조합설치 반대/횡포 타파ㆍ농회반대ㆍ최저임금제의 확립ㆍ노동조건과 임금에서의 민족적 차별 철폐" 등을 제기하여, "일제의 식민지정책 반대운동"을 했다.
3. 복대표대회 (復代表大會)와 지도부의 개편
지회의 활발한 활동에 비해. 당시 "신간회 본부"는 일제의 탄압ㆍ지도력의 미비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 지회에서는 "•회장제의 중앙집행위원장제로의 개편 •지방연합기관 설치 •행동강령 제정 •기관지 발행, •단체가입제의 실현"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1929.06.28일, 각 지역에서 선발된 34명 가운데 27명의 "복대표"가 참가한 "복대표대회"가 개최되었고, 대회에서는 "회장제의 중앙집행위원장제로의 개편" 요구를 승인하여, "허헌(許憲)"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이전과 달리 "사회주의자들"이 본부 임원에 대거 진출했다. 또한 "지방연합기관 설치" 요구도 관철되어, 1929.08.25일 "함경북도연합회", 11.30일 "평안남도연합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다른 도(道)에서도 "연합기관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일제의 집회 금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허헌 집행부"는 당시 일어난 "갑산화전민 사건ㆍ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여론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특히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29.12.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허헌 집행부"의 다수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4. 민중대회 사건ㆍ해소 운동
"민중대회 사건" 이후, "허헌"을 대신하여 "김병로(金炳魯)"가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김병로 체제"는 종래의 노선을 수정하여, "일제"와의 직접적 충돌을 가급적 피하려 했다. 이런 "지도부의 온건노선"은 여러 지회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보다는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강조하고, "노동ㆍ농민 운동"의 혁명적 전개에 기초한 "당 재건"을 지시한 "코민테른"의 한국문제에 관한 "12월 테제"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지도부"를 "소부르주아적 정치운동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온건노선"을 거세게 비판했다.
특히 1920년대 말,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격렬해지고, 이를 기반으로 "혁명적 노동조합ㆍ농민조합" 운동이 각 지역에서 전개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점차 확산되어갔다.
그 결과, 1930.12.06일, "부산지회 정기대회"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을 사실상 부정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새로운 정치조직을 결성한다."는 명분 아래, "신간회 해소"주장이 제기되었다. "신간회 해소"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대립되었지만,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전반적인 "좌편향" 분위기 속에서, "해소론"은 각 지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결국 1931.05.15.일, "기독교 청년회회관"에서 창립한 이후, 처음 열린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되었다. 그렇지만 "신간회해소 주장"은 새로운 조직결성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신간회 해산"에만 머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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