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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31.09 : 만주사변 → 중국과 "15년 전쟁"의 시작

by 당대 제일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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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변 (滿洲事變, 918사변)"은 1931.09.18, 일본 제국이 "류탸오후 사건 (柳條湖事件ㆍ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만주 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며, 2차 세계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룬다.

 

1.  만주 사변 (滿洲事變, 918사변ㆍ1931.09.18~1932.02.18ㆍ15년 전쟁의 시작)

•  일 시 : 1931.09.18~ 1932.02.18         •  장 소 : 만주중국

•  결 과 : 일본 승리         교 전 : 중화민국(국민혁명군) - 일본제국 육군

지 휘 : 중화민국- 장쉐량마잔산펑잔하이 - 병력 : 160,000명 / 일본제국- 혼조 시게루미나미 지로 - 병력 : 30,000~ 66,000

2.  요 약

①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일본이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싸우던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 일본 지원)"에게 퇴각 권고"관동군" 일부 참모가 반발하여, "장쭤린" 암살(1928)"관동군""봉천파"의 협조 종결"장쉐량("장쭤린" 아들) "국민당 정부(장제스의 국민혁명군)" 합류(1929)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에 타격만주 전체 침략을 위해 "만보산 사건(1931.07)", 자작극 "류타오후 사건(1931.09) 발생"동삼성"전역 점령(1932.01)"만주국(괴뢰정권)"(1932.03)국제연맹 비난탈퇴국제연맹 탈퇴"중일전쟁(1937.07.07~ 1945.09.02)2차 세계대전(1939.09.01~ 1945.09.02)

②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장제스의 국민혁명군"밀리기 시작하여, 일본본국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 → 일본 정부의 시각에 반발해,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관동군""봉천파"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국민당 정부"에 합류하였다.(1929)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1929)"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利權) 타격을 받았다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만보산 사건(1931.07)"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이때,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1931.09)"을 일으켰던 것이다일본은 1932.01월까지 "동삼성(東三省)"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傀儡)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1933.02"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③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1933.05.25"난징 국민정부"가 일본 제국에 정전을 요청했고, 05.31"톈진"의 외항인 "탕구(塘沽, 당고)"에서 중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정전협정"에는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둔다는 조항이 들어갔다이는 곧 "만주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난징 국민정부"가 인정한 셈이었다그러나 광대한 만주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일본의 지배력이 미칠 수는 없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비롯한 여러 갈래의 항일 무장활동이 계속됐다.

3.  관동군 (關東軍1906~1945)만주국 (滿洲國1931~1945)

① 관동군 (關東軍ㆍ1906~ 1945)

중국과 소련을 침략할 목적으로 1906~1945에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하고 있던 일본 육군 주력부대의 하나.  "러ㆍ일 전쟁" 승리 후, 러시아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인수하여 "관동주"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는데, 이때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② 만주국 (滿洲國ㆍ1931~ 1945)

"일본제국"이 "만주사변" 직후부터, 만주지역에 세운 "괴뢰국(꼭두각시 국가)"이다. 1932.03.01 만주국을 선포하고, 03.09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를 "황제(강덕제)"로 내세우고, 일본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다,

관동군

4. 배 경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1905)"에 의해, 만주의 "창춘-뤼순 간"철도의 이권을 획득하고, "관동주"를 조차(1905)한 이후, 만주는 일본의 자본투자상품시장중공업 원료공급지로서 일본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남만주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1905년부터 만주에 설치되어 주둔하고 있었다.

"신해혁명(1911)" 이후, 만주에 "보안부대""신군"이 편성되었다"장쭤린""봉계 군벌군대(봉군(奉軍), 봉천파)"1920년 직계 군벌과 연합하여, "환계 군벌"을 패퇴시키고, 만주에서의 세력을 "산해관" 안쪽까지 확장하였다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1914.07~1918.11)이후, "봉천파"를 원조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1927"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북벌운동"을 개시하면서, 점차 "봉천파"의 군벌 "장쭤린" 압박해왔고, 그는 이에 밀리기 시작했다이들이 조만간 "베이징"을 점령할 것이 분명해진 것이었고, 그러자 막후에서 그를 지원하던 일본 정부도 결국 "장쭤린"에게 "베이징""국민당"에 넘겨주고, 퇴각하도록 권고했다

"다나카"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로 철수하도록 "장쭤린"에게 압력을 가했다"만주"에서는 일본군이 그를 보호할 수 있었기에 "장쭤린"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그렇지만 일부 관동군 참모들은 이 조치에 계속 불만이었고, "괴뢰 군벌"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직접 지배권을 만주에 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그 중 한 사람이었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일을 벌일 구실을 꾸미기로 결심하였다

"고모토""장쭤린"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고모토"직속 부하로 하여금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남만주 철도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장쭤린 폭살사건, 1928.06.04)한다이 사건은 사실상 "고모토"가 의도했던 일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했다왜냐하면 "고모토"의 상관이나 "도쿄"의 내각이나 그러한 행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실제 "고모토"는 간신히 군법 회의를 면했다.

"장쭤린""관동군"의 계략으로 피살됨으로써, "관동군""봉천파" 간의 협조 관계는 종결되었다"국민당 정부"는 북경을 점령한 뒤, "일 통상조약(1896)"을 폐기한다고 일본에 통고하였다이는 "국민당 정부"가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배일공세"를 취하기 위한 신호였다일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장제스""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쉐량 정권""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 철도의 회수, 영사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주장했다이로 인해 일본인의 동북 지역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 70% 이상이 일본의 자본이었을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그러나 1929년 발생한 "세계 경제대공황(1929~1939)"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하게 되었다이러한 중국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의 "15개년 계획"의 진척 등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일본 국내에서는 이것을 "몽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시데하라 외교(당시 일본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의 국제협조노선에 바탕 한 경제외교)"의 연약함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무력에 의한 동북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했다이렇게 보면, "만주사변"은 사실상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인 것만은 아니었다이런 상황에서 "나카무라 대위 사건(1931.06)ㆍ만보산 사건(1931.06)"이 터져 나왔다.

5. 나카무라 대위 사건 (1931.06)ㆍ만보산 사건 (1931.07)

1931.06월에 "나카무라대위 사건(中村大尉事件)"이 발생했다변장을 하고, 중국 동북의 "흥안령(興安嶺)"지방에서 스파이 여행 중이던 참모본부의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대위"가 중국군에게 붙잡혀서 동행하던 "이스키 노부타로(井杉延太郎) 예비역 상사" 등과 함께 사살된 것이다.

진상은 1931.08월이 되어서야 일본 측이 발표했는데, 일본인의 "반 중국의식"을 자극했다한편, 1931.07.02, 지린성 창춘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문제"로 충돌 및 유혈사태가 일어났고, 이것이 일본의 술책으로 인한 것을 알게 된 중국에서는 "배일 운동"이 더욱 심화되었다.

6. 발 단 :  1931.09.18,  류탸오후 사건  (柳條湖事件ㆍ만철 폭파 사건)

1931"관동군 사령관"으로 "혼조 시게루 중장"이 임명되었고, 08.20"뤼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도착했다그는 "우가키 가즈시게"의 부하로 만주침략 공작의 선봉에 섰다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어, 만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혼조"는 부임하자마자, "봉천""장춘" 등지를 시찰하고, 09.18일에 돌아왔다.

09.18일에 일본 제국의 "관동군"이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관동군 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 등 단 3명이 만들었다이들을 중심으로 "몽 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09.18일 밤 10: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 하의 "동북군"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관동군""장쉐량"의 군영인 "북대영""펑톈성(奉天省)"을 공격(19일 새벽)하였고, 이튿날 "펑톈시" 비롯하여, 만주철도 근처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대공황으로 구미열강들의 간섭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고, "장쉐량""베이징", 또한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이남에 집결하고 있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도, "난징""국민정부"는 사건의 확대를 막기 위해, 결코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지했다.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장쉐량""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다"관동군""동대영","봉천 비행장"등을 손에 넣고, 며칠 안 가서 "지린성"까지 수중에 넣었다이로써, "관동군""만주침략 작전"을 시작한지 5일 만에 "랴오둥","지린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2개 성에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09.21일 일본의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에 의한 독단 월경으로 전쟁은 남쪽 만주지방 전체에 확대되었다일본 정부는 군사행동의 정당성과 이후 전쟁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사건을 공인하였다.

7. 전 개 : 만주 침공

1931.10, "진저우"를 폭격하고, 만주 남부를 점령한 후, 11월에는 "치치하얼"을 점령하였으며, 소련만주 간 경계를 이루는 "동북 3"전역을 장악하고, 1932.01.19일에는 "치치하얼"을 제압하였으며, 1932.01"쉐량"의 반만항일 거점인 "진저우"를 점령하였으며, 02.05일에는 "하얼빈"을 점령하여, 만주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초 "만주몽고 지방"을 영유하려고 계획했던 일본 관동군은 만주 지배방식을 괴뢰국가 수립으로 변경하여, 1931.10"몽 공화국 통치 대강안"을 세워 통치방침정부조직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과 군인에게 지역적인 독립정권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11월에는 "톈진"에 망명 중이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탈출시켜, "만주국"의 황제로 삼을 준비를 추진하였다.

1932년 초까지 "관동군"이 만주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해버리자, 당연히 "장쉐량"의 동북군은 고향에서 쫓겨났다그런 일들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은 "장쉐량"의 본심이 아니었지만, 그는 최고지도자였던 "장제스"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1932.01월 말, 항일운동이 거센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나자, 03.01, "왕징웨이"등에 의한 "둥베이 행정위원회""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였고, 만주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화 되었다03.09"푸이"가 집정에 취임, 새로운 국가로 출발하였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황제(강덕제)"로 내세우고, 일본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다. 국제연맹은 중국 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성" 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1933.03"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이 사건은 일본의 군부가 일본 정국을 장악하고, "정당내각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군국주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일 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을 일으키는 침략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8. 화베이(반만 항일군 근거지) 분리공작

일본은 만주를 식민지화하여 지배하는 것을 1933.05월 말, "탕구 정전협정"으로 "중국 국민정부"로 하여금 사실상 인정하도록 하였다그러나 1935년 일본 육군은 "중국의 화베이 5""국민정부"에서 분리독립시켜, 일본의 지배 하에 두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그 이유는 "반만 항일군의" 근거지가 "화베이"에 있고, "만주국"의 치안을 위해서는 "화베이 5"의 지배가 꼭 필요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화베이"의 석탄철 등의 자원과 농산물 등의 시장지배와 수탈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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