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사변 (1차 상하이 사변)"은 1932.01.28일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중국은 "28사건"이라고도 부르고, 구미에서는 "상하이 사변", 일본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라고 하며, "상하이 전투 (2차 상하이 사변ㆍ중일전쟁의 일부)은: 1937.08월, "중ㆍ일 전쟁"시, 일본 제국이 "상하이"에 상륙ㆍ전투했던 전쟁을 말한다.
1. 제1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사변 (28사건): 1932.01.28~04.29
< 제2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전투 (중일전쟁의 일부): 1937.08.13~11.26 >
"상하이 사변 (1차 상하이 사변)"은 1932.01.28일,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주변"에서 일어났던 중화민국과 일본제국의 군사적 충돌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지닌 충돌이었다. "중국군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군대의 무장해제를 당했고,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 장 소 : 중화민국 상하이ㆍ국제 공동조계 주변
• 결 과 :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 교전국 : 중화민국ㆍ일본 제국 (시라카와 요시노리)
① 배 경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상하이 북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열강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조계지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그래서 대의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1932.01.18일, 일본인 승려(5명)가 "삼우실업사 (三友實業社)" 근처에서 성난 중국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재, 이 범행은 일본 측에 고용된 중국인에 의한 행위라는 것이 정설이다) 01.20일,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항의 데모를 벌였고, 일부 청년들이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우고, 1명을 살해하였다. 진압을 위해 파견된 중국 관원 2명을 "일본도"로 살해하고, 일본인 1명도 살해당하게 된다. 상하이 시민들의 반일 감정을 자극하여, 일본 제품의 보이콧을 외치며, 항의 행진을 벌이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일본을 포함한 서양열강은 협의를 통해, "공동 조계" 내의 경비를 분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무라이 구라마쓰 (총영사)"는 "오철승 (상하이 시장)"을 면담하고, 손해배상과 더불어 사건에 관한 진상조사ㆍ가해자 처벌ㆍ항일단체의 해산 등을 요구했다. "오철승" 측은 즉답을 미루었지만, 최종적으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부 학생들이 분개하여 시청을 습격하였다.
② 전 투
01.26일, "중화민국 정부"가 계엄령을 포고하고, 중국인 지구 전역에 모래주머니ㆍ가시철망으로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외국인에게 조계 안으로 피난을 권고한다. 2일 후, "상하이 시의회"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상하이 의용군 부대"를 배치ㆍ수비하였다. "공동조계 방위위원회"는 사태에 위협을 느끼고, "홍커우" 방위를 "일본인 의용군 부대"에 맡겼다.
01.27일 일본군은 함정(30척)ㆍ전투기(40기)를 동원하여, "상하이 해안" 근처에 7,000명 정도의 부대를 집결시켰다. 01.28일 오후 5시, "조계국"은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양열강의 군대가 각자의 담당 경비구역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의 병력은 1,000명이 넘었고, 9:30분경 군함에서 1,700명을 상륙하게 하여, 합계 2,700명이 주둔하였다.
"상하이"에는 중화민국 정부 "채정해"를 사령관으로 하는 약 33,000명의 "19로군" 병력이 있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로군"은 조계의 요소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황푸강" 유역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01.28일 자정,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양군이 "북사천로"에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조계지" 개정방위계획에 따라 일본군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중화민국 정부에는 통보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권지에 속했는데, 중국은 일본에 맞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다.
"일본군"은 개전 3일 만에 "본국 증원군"을 요청하여, 02.01일 해군사령부는 2개의 육군부대를 증파하고, 제3함대를 편성하여 해군병력을 지원하였다.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자, 일본은 "육군 9사단"을 주력으로 한 병력을 증파, 16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15~16일 "상하이 항ㆍ오송부대"에 상륙하였다.
"우에다(9사단장)ㆍ채정해(19로군 군단장)"는 "영국"이 주선한 중일 양국군 대표 회담을 통해, 입장을 조율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음모에 의한 전쟁이었기에 간극은 좁힐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02.10일 다시 양군이 충돌하게 된다. 일본은 "19로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여, 다시 한차례 증원을 본국에 요청하게 되는데, 일본에서는 다시 2개 사단이 증파된다.
03.01일이 되자, 그간 잘 방어를 해 오던 "중국군"은 갑작스런 철수를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철수의 배경에는 "금벽휘 (청나라 숙친왕의 딸)"라는 여인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설이 있었다. "금벽휘"는 당시 일본군 특무기관의 "소좌 다나카"에게 포섭되어, 일본군이 또 증파된다는 거짓 정보를 중국군 지휘관들에게 흘려, 철수를 유도했다고 한다. "금벽휘"는 1948년 "장제스"에 의해 총살된다.
※금벽휘 (金璧輝): 가와시마 요시코 (川島芳子)ㆍ1907~1948 (41세)ㆍ동양의 마타 하리 : 청나라 황족인 "숙친왕(肅親王)"의 14번째 딸로서, "청조 부흥"을 위해 일본에게 협력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파이 혐의로 처형된 인물이다. "만주 양백기(鑲白旗)" 출신으로, "일본인의 양녀"로 들어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③ 결 과
"중국군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군대의 무장해제를 당했고,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④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폭탄투척 사건
중국의 패전의 분위기 속에서 1932.04.29일, 중일 양국이 정전협정을 맺기 전, 일본인 거주민들은 "홍커우 공원"에서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일본 천황의 "천장절" 경축행사와 "일본군" 승전 파티를 겸한 행사였다. 이 때 식민지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ㆍ1908~1932ㆍ향년 23세ㆍ충남 덕산 출신ㆍ총살형)"이 폭탄을 투척하여, "상하이 일본영사ㆍ해군 중장" 등의 여러 군 인사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2. 제2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전투 (중일전쟁의 일부): 1937.08.13~11.26
1937.08월, "중ㆍ일 전쟁"시, 일본 제국이 "상하이"에 상륙ㆍ전투했던 전쟁을 말한다.
• 장 소 : 중화민국 상하이ㆍ국제 공동조계 주변
• 결 과 : 일본제국의 승리ㆍ중화민국의 전략적 승리
• 피 해 : 중화민국 (약 15만 명)ㆍ일본제국 (약 8만 명)
• 교전국 : 중화민국(장제스ㆍ천청)ㆍ사단(75개)ㆍ여단(9개)ㆍ병력(60만 명)ㆍ항공기(200대)ㆍ탱크(16대) / 일본제국 (하세가와 기요시ㆍ야나가와 헤이스케ㆍ마쓰이 이와네)ㆍ사단(8개)ㆍ여단(6개)ㆍ병력(30만 명)ㆍ항공기(500대)ㆍ탱크(300대)ㆍ상륙함(130대)
① 개 요
1937.07월, 일본 제국은 "루거우차오 사건 (마르코 폴로 다리ㆍ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전면전을 선포함으로써,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갔다.
1937.07월 말, "베이징ㆍ톈진"을 손쉽게 장악했고, 이어 8월,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에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개전초기 때만 해도 일본군 수뇌부는 중국대륙을 3개월 이내에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중국군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다. "상하이"의 국민당 군대는 기존 군벌 주축으로 부패한 "당나라 군대"가 아닌 "장제스의 최정예 직속부대"들이 주축이었다.
상당한 저항에 놀란 일본군은 "상하이 공략"에 상당한 고전을 겪게 되는데, 특히 "오송 상륙전투"에서 피해가 컸다. 이는 1930년대에 중국에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젝트 장군이 중화민국 국민당 군대 육성을 위해 강력한 "벙커밭" 조성을 추진하였고, "장개석"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으로 육성하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중화민국으로 파견한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과 어렵게 설치한 벙커 밭을 뚫기 위해, 일본군은 무작정 돌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개석" 직속의 "정예 제88사단"이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놓는 등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격렬한 전투 속에 11월, 일본군은 어렵게 "상하이"를 장악하여 점령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들은 중국군에 대해 상당한 굴욕감ㆍ분노감을 맛보게 되면서, 일본군은 크나큰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937.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난징(중화민국의 수도)"를 향해, 진격을 한다. (일본군 9만 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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