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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26.06 : 6ㆍ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by 당대 제일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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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10 만세운동 (병인만세운동)"은 "3ㆍ1운동"을 잇는 전국적ㆍ전 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이며,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19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1.  610 만세운동 (六十萬歲運動병인만세운동)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결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1919)" "광주학생운동 (1929)"의 교량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큰 횃불이 되었다.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민족진영의 조직약화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곧 실패하였다. (순종 (純宗ㆍ1874~1926.04.25ㆍ향년 52세): 2대 황제ㆍ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군주)

일 시 : 1926.06.10일 오전 8:30분경 "순종의 상여""종로"를 지날 때 (순종의 인산일 (장례일))

참가자 : 학생 24,000여 명

격문 내용 : 일본 제국주의 타도토지는 농민에게우리 교육은 우리들 손에ㆍ8시간 노동제 채택

주동자 : 공산주의자(박헌영 체포)순종의 유칙위작(遺勅僞作) 획책(송진우,정인보)사회주의계(권오설,김단야,이지탁)중앙고보(이현상)인쇄직공(민영식,이민재)연희전문(이병립,박하균)경성대학(이천진)천도교(박내원,권동진)

결 과 : 1,000여 명이 체포(서울 210여 명)취조(106)수감(53)1927.03.25: 징역 1(10여 명)징역 1년에 집행유예 3(1)

영 향 : "권오설(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1927"신간회근우회신정회연정회" 등의 조선인 사회단체 조직과 1929.11월의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장 소 : 전국이 운동"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고,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당진강경전주하동"까지 파급되었다.

6ㆍ10 만세운동

2. 배 경

1919, "31운동" 이후,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도 "미국서구열강"의 원조가 소극적이고, 일제의 교묘한 술책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임시정부""상해(上海)"에 모인 청년 정객들의 "이상주의"에 불과하여, 처음부터 많은 분란과 오해의 요인을 안고 수립된 망명정부였다그런데 1921, "레닌 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원조 자금문제"1925"이승만 대통령 면직결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결정적으로 난파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 무장독립투쟁"1920"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인해, "러시아" 방면으로 밀려났다가, 1921"자유시 참변"으로 큰 상처를 입었고, 이처럼 해외 독립운동은 1922년을 고비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당시 국내에서도, 1920년부터 활발히 전개된 "실력양성 운동"에 의해, "민립대학 설립운동물산장려운동" 등이 추진되었지만,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양단정책에 말려, 1925년 이후 좌절되면서, 부진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3. 경 과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04.26 사망한 "대한제국 황제 순종"에 대한 국민의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불순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심지어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인천에 함대를 정박시키기까지 하였다.

학생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1926.06.10"순종 인산일"참가한 2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오전 8:30분경 "순종의 상""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기습시위를 감행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 학생 50여 명이, 오전 9: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박두종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김낙환(시대일보 배달부)"과 청년 2명이, 오후 2"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박용철,이동환)중동교생(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 만세시위" 계속 이어졌다.

이에 "2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고,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결여민족진영의 조직약화노동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에 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4. "송진우정인보""순종의 유칙위작(遺勅僞作)"을 획책

"송진우""정인보"와 함께, "순종의 유칙위작(遺勅僞作)"을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었다"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수감된 "공산주의자 박헌영" 역시 배후조종혐의로 고문을 당했으나, 관련있다는 근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해 11"송진우""31운동 7주년 기념사" 관련 항소에서 패소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어 11"국제농민본부 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가, 1927.02 일본 신임 "천황 히로히토(裕仁) 즉위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

5. 결 과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어느 정도 시위가 가라앉자,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06.2511명은 "제령(制令) 7출판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그 해 11.02"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이 때 "재판장 에토"의 심문에 주동학생들은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진술하였다.

이병림 :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하균 : 우리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이천진 : 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선호 :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

유면희 : 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기하려 하였다.

박용규 : 4,000여 매의 격문을 각 남녀고보에 배부하였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하였다.

곽대형 : 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포한 뒤, 통동계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 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검사"1~3년의 실형을 구형하였으나, 그 해 11.17"재판장"은 언도공판에서 10명에게는 2~3, 1에게는 징역 1년에 5년간 집행유예를 언도하였다. 이에 "검사"가 상소를 제기하여, 10여 명은 징역 1,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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