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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19.03 : 3ㆍ1운동 ④ 보성사 (독립선언서 인쇄)

by 당대 제일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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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사(普成社)"는 1919년 3ㆍ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곳이다. "사장 이종일ㆍ공장감독 김홍규ㆍ총무 장효근"이 1919.02.27일 밤에 35,000매를 인쇄하였다. 1919.06.28일 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1. 보성사 (普成社)

보성사는 "30평 2층 기와벽돌집"으로 "전동 보성학교" 구내(현재 홰나무가 있는 조계사 경내)에 있었으며,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의 특명으로,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사장 이종일ㆍ공장감독 김홍규ㆍ총무 장효근"이 1919.02.27일 밤에 35,000매를 인쇄하였다. 일본 측의 형사에게 발각되는 위기도 있었으나, "족보책"이라고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

03.01일에는 "윤익선ㆍ이종린ㆍ이종일ㆍ김홍규" 등이 지하신문인 "조선 독립신문" 10,000부를 계속 발행하였다. 일경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으며, 1919.06.28일 밤에 불을 질러 태워버린 이후,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보성사

 

2.  일화 :  "신승희 (신철?):  종로경찰서의 악질 고등계 형사조선인 )"에게 발각

1919년 3ㆍ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은 "천도교" 측이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천도교" 측의 "최린"은 "최남선"에게 "선언서"의 기초를 의뢰하였고, "​최남선"은 2월 초순부터 초안 작성에 착수하여, 02.11일경 "선언서"를 완료하고, 02.15일 "최린"에게 넘겼다.

"최린"은 "최남선"에게서 받은 "선언서 초안"을 자기 집 벽장에 걸려 있는 "거문고" 속에 잠시 보관하였다가, "천도교 교주" "손병희" 등에게 보여 동의를 얻고, 기독교 측 연락대표인 "함태영"에게 건네 기독교 측의 동의도 구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기미독립선언서"는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로 넘겨져, 02.27일 "사장 이종일"의 책임 하에 "공장감독 김홍규총무 장효근"과 같이 오후 6시부터 극비리에 인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음흉하기로 소문난 종로경찰서 소속의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신승희(신철?)"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고등계 형사 "신승희"가 근처를 지나다가 밤중에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신승희"는 지나가는 사람의 낯빛만 보고도 그가 "독립운동가"인지, 아닌지를 알아내 체포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신승희"은 1909년 "종로경찰서"에 소속된 뒤,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감시하는 일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사태를 알아차린 "신승희"에게 이종일 사장은 "신승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신승희에게 애원했다"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한테 갑시다."

그러자 뜻밖에도 신승희는 "그럼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종일 사장"은 단숨에 "손병희"에게 달려가 위급한 사항을 알렸고, "손병희"는 거금 5,000원을 내주면서, "신승희"에게 주라고 하였다. 거금을 받아 쥔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사라졌다. 총 21,000매에 이르는 "기미독립선언서"는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이종일 사장은 당시 신축 중인 "경운동 대교당" 마당 구석에 있는 창고 같은 집에 임시 기거하고 있었는데, "기미독립선언서"를 이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이병헌ㆍ인종익"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재동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정전으로 가로등이 꺼져 있어,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선언서의 배포는 "천도교ㆍ기독교ㆍ불교ㆍ학생단" 등으로 분담하여 진행되었다. 0​3.01일 전까지 "서울ㆍ평양ㆍ선천ㆍ원산ㆍ개성ㆍ서흥ㆍ수안ㆍ사리원ㆍ해주ㆍ대구ㆍ마산ㆍ전주ㆍ군산" 등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3ㆍ1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3ㆍ1운동"이 벌어졌을 당시, "신승희"는 "본격적인 수사를 한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급기야 일본인 동료 형사와 함께 "신의주"로 출장을 떠났다. 05월에 이르러, 종로경찰서로 돌아온 "신승희"는 천도교 조직을 도운 혐의가 드러나,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청산가리"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물었는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일말의 "민족적 양심"에서 비롯된 일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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