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이지 유신ㆍ명치유신(明治維新)ㆍ 1868~1889 "의 과정은 개국ㆍ도쿠가와 막부의 붕괴ㆍ천황 중심 통일국가의 형성과 그에 따른 신정책의 실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막부체제"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1. 1868~1889 : 일본 메이지 유신ㆍ명치유신(明治維新)ㆍ1912년 메이지 천황사망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친정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킨 근대 일본의 정치ㆍ사회적 변혁이다. "메이지 유신"의 과정은 개국ㆍ도쿠가와 막부의 붕괴ㆍ천황 중심 통일국가의 형성과 그에 따른 신정책의 실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막부체제"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것은 학문상의 명칭으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 등으로 불렸었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시기에 대해, 대체로 "덴포(天保)시기"로 일치하고 있지만, 종료 시기에 대해서는 "폐번치현(廢藩置縣,1871)ㆍ지조개정(地租改正,1873)ㆍ세이난 전쟁(西南戰爭,1877)ㆍ헌법발표(1889)" 등으로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1889년 "헌법 제정"으로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었다고 본다.
2. 1919.01.21~1921.07.11 : 아일랜드 독립 전쟁 (Irish War)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해, 1918년에 만들어진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일으킨 게릴라전으로, "영국"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전쟁 (The Anglo-Irish War)"으로 불린다.
전쟁은 1919.01.21일부터 2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1921.07.11일 휴전하였다. 전쟁으로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ㆍ북아일랜드"가 각각 분리되었다. 전쟁에 참가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옛 IRA"로, 후에 같은 이름으로 출현한 "급진주의 IRA"와 구별하고 있다.
3. 1911 : 중국의 신해혁명 (辛亥革命)
"신해혁명"은 1911년(신해년)~1912년까지, 넓게 보면 ~1915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혁명
1911년(辛亥年)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이 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함으로써,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끝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여,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정치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① 1911.05 : 사천폭동 (쓰촨ㆍ四川暴動)
1911.05월, "청나라"는 "철도국유령"을 발표하여, 그때까지 민영인 철도를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본 연합체인 "4국 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대해, "후난(湖南)ㆍ후베이(湖北)ㆍ광둥(廣東)" 등에서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쓰촨(四川)"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② 1911.10 : 우창봉기 (武昌蜂起ㆍ제1혁명)
10월 초, "쓰촨 폭동"을 토벌하기 위하여 "후베이신군(湖北新軍)"을 동원하자, "우한(武漢)지구"에서 "문학사(文學社)ㆍ공진회(共進會)" 등을 조직하여 "신군(新軍)공작"을 전개해온 혁명파는, 10.10일 "우창"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1912.01.01일,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南京)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지도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발족하였다.
③ 1912.03 : 위안스카이의 베이징(北京) 정부ㆍ국민당 창립ㆍ반혁명파로 진화
"위안스카이(원세개)"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이양받았고,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北京)정부"를 조직하였다.
"혁명파"는 "혁명동맹회"를 개조하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서, "국민당(國民黨)"을 창립, 의회정치의 실현을 희구하였으나, 구미 열강ㆍ입헌파의 지지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에게 무력탄압을 가하여, "제2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④ 1913.07 (제2혁명)ㆍ1915.12 (제3혁명)
"혁명파"는 "제2혁명(1913.07)ㆍ제3혁명(1915.12)"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정권"과 대결하였으나, 반제(反帝)ㆍ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5ㆍ4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루어졌다.
⑤ 1919.05 : 5ㆍ4 운동 (五四運動)
1919.05.04일, "베이징(北京)"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ㆍ반제국주의ㆍ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이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지만,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ㆍ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사건으로 평가한다. "베이징" 학생들은 05.04일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반대집회를 벌였다.
"5ㆍ4 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ㆍ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의 3ㆍ1운동"에 고무되었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있었다. 그 후 "공산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코민테른"은 "보이틴스키(Voitinsky)"를 밀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당시 중국 공산주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대교(李大釗)ㆍ진독수(陳獨秀)"를 종용하여 "공산당"이 결성되도록 하였다.
⑥ 쑨원 : 손문 (孫文)ㆍ중산ㆍSūn Wén (1866~1925ㆍ향년 59세)
• 중화민국 : 국부로 추앙 • 중화인민공화국 : 마오쩌둥 보다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ㆍ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ㆍ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립자ㆍ중국의 외과 의사ㆍ정치가ㆍ삼민주의(三民主義) = 민족주의(民族主義)ㆍ민권주의(民權主義)ㆍ민생주의(民生主義)
그가 주장한 사상인 "삼민주의 정신"은 "중화민국ㆍ중화인민공화국" 양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현재 "중화민국"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부"보다는 "마오쩌둥" 보다도 유명한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 존경받고 있다.
"중화민국"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4. 1917 : 러시아 혁명ㆍ소련 정권
"러시아 구력"으로 "1917.02월ㆍ1917.10월"에 일어난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정권"이 수립된 혁명이다.
① 1905.01.22일 :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1905.01.22일 이른 아침, 시내 각 지구의 노동자들은 "성상(聖像)ㆍ황제 차르"의 초상을 들고, "사제 가폰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설립ㆍ근로조건의 향상들을 "황제 차르"에게 요구하였으나, "차르"는 요구에 무력진압으로 답했다. 황제는 부재중이었으나, 경찰ㆍ군대가 평화적 행진에 대해 발포하기 시작, 광장의 "눈(雪)"을 피로 물들였다. 문제가 발생하자, "러시아 제국 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두마"라 불리는 의회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ㆍ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② 1914년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민 불만은 진정되지 않다가, 1907년 즈음 가서야 겨우 진정되어 갔었다. 처음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많은 지지를 하였고, 무려 1500만 명이나 지원했었다. 그러나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하여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민중의 복지에 써야 할 국가예산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민중들의 생활은 오늘 먹을 빵과 우유조차 없을 정도로 아주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지휘에 나서며, 국정을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괴승)"을 중심으로 운영되자,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민중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③ 1917년 : 2월 혁명 (3월 혁명)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하면 "3월 혁명"이 된다. 그들은 "민중운동"으로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하였고, 1917.03.08일 "페트로그라드 시위"가 그것이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민중들은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빵을 살 수 없었고,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빵ㆍ우유를 배급받고자,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시위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참여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1917.02.22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황제는 "하발로프(수도방위사령관)"에게 진압하도록 명령하였으나, 02.27일 "군대"까지 노동자들 편에 섰다. 결국 03.02일,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체제가 붕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판단하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결국,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④ 1917년 : 10월 혁명ㆍ볼셰비키 혁명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원인인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한계를 드러내고,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다. 9월이 되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17.11.07일(구력 10.25) 오전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수도)"에서 볼셰비키 1,000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⑤ 1917년 : 4월 테제
1917년, 일어난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귀족ㆍ부르주아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ㆍ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독일 제국"이 제공한 봉인 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혁명의 기운이 타오르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였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등 10개 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는데, "4월 테제"는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⑥ 임시정부 함락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봉기 방침이 결정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됐다. 11.06일 새벽 2시, "케렌스키(임시정부 수상)"가 "볼셰비키 신문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정부청사ㆍ전화국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린 오전 11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겨울 궁전"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1.07일 새벽 2시, "겨울 궁전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소비에트 대회장"에 알려지자,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선언"이 낭독됐다.
⑦ 러시아 내전 (백군ㆍ적군)
"10월 혁명" 이후의 전쟁은 "백군(황제 지지 세력)ㆍ적군(혁명 지지세력)" 사이의 내전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전은 "레닌 주도"의 공산주의 혁명세력과 혁명을 지지하는 "러시아 국민들"과 "백군"과 백군을 후원하는 "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다.
내전 초기, 혁명 국가는 완성되지 못했으며, "혁명 러시아"의 국가ㆍ군대 체계는 매우 엉성한 상태였다. 반면, "백군"은 제정시대 장교들의 통솔력과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후원받은 강력한 무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내전 초기에 "적군"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르 콜차크ㆍ안톤 데니킨ㆍ레오니드 유스포프ㆍ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지휘하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하지만 "백군"은 "공산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구체제로 구성된 귀족 출신들ㆍ장군들이었고, 이들에게 뚜렷한 제도나 정책이 없었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히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체제"로 회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자ㆍ농민들은 "백군"을 후원하는 세력들 뒤에는 귀족들ㆍ자본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노동자ㆍ농민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했다. 그래서 "러시아 공산당"의 끈질긴 저항과 민중들의 지지로 인해, 1922년부터는 "백군"이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밀려나게 되어 패망했으며, 1922.12.30일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⑧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ㆍ향년 54세)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ㆍ"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ㆍ혁명지도자ㆍ정치경제학자ㆍ정치철학자ㆍ노동운동가ㆍ소비에트 연방의 제1대 인민위원회 위원장ㆍ볼셰비키의 지도자ㆍ혁명가ㆍ공산주의자 • 사망시 병명 : 암살총상 휴유증ㆍ매독ㆍ폐질환ㆍ과로ㆍ고혈압(실어증)ㆍ소련에 적대적이던 주변의 제1세계에서 암살설 (독살설)
흔히 알려진 "니콜라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하였고, "마르크스ㆍ엥겔스"의 혁명이론에 충실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국영화ㆍ국유화ㆍ사상적 단결을 통해, 국론통일을 지향했다.
"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 창조적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될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면도 있어서,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스탈린ㆍ호치민ㆍ마오쩌둥ㆍ요시프 브로즈 티토ㆍ피델 카스트로ㆍ김일성" 등이 그의 공산주의 국가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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