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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11.09 : 신민회 (新民會) 란?

by 당대 제일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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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新民會)"는 1907.0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 1907.04월,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1. 신민회 (新民會)

1907.02,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 1907.04,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1907.04, 서울에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 "비밀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다"공옥학교(상동교회 부설)"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지사(안창호이동녕이승훈)" 등이 조직하였다. "공화정제"를 제창한 대표적 조직으로, "실력 양성론독립 전쟁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공화정제의 근대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이는 근대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이상향으로 지향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있으며, "민족교육 계몽 운동 및 무장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  일 시 : 1907.04~ 1913.07.15.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

•  목 적 : 전국적인 규모로서 국권을 회복하는 것

•  설립자 : 양기탁 (총감독당수대한매일신보 주필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

 창건위원 : 안창호(부회장발기)양기탁이동휘동녕전덕기이갑유동열

 중심 : 노백린이승훈안태국최광옥이시영이회영이상재이강조성환김구신채호은식임치정이종호주진수 등 (언론인군인산업인 등이 중심)

•  회원 수 : 1910년 경, 800명에 달하였다 일제 관헌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 밑에서 조직된 지하정당임을 고려하면 많은 수였다 이 숫자는 당시의 "저명한 애국계몽운동가"들 대부분을 망라하는 숫자였다 직업별 분포를 보면, "상업(32%)광공업(6%)시민 층(38%)/ 교사(23%)학생(16%) 지식층(39%), , "시민 층지식층"이 전체의 76%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목표 : "무실역행 (務實力行)"을 방향으로 삼고, "독립사상의 고취ㆍ국민 역량의 배양ㆍ청소년 교육ㆍ상공업의 진흥을 통한 자체 실력 양성" 등이 기본 목표였다. (무실역행 :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

4대 강령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ㆍ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 역량 축적ㆍ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ㆍ교육기관 설립으로, 청소년교육 진흥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당시, "일제"의 감시신문법보안법 등의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활동 합법성의 한계를 느껴, "애국계몽"의 틀을 일부 벗어나, 투쟁적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고자, 결성한 단체가 신민회였다"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표방하였고, "사회 각층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하였는데, "비밀단체" 임에도, 그 활동은 거의 대부분 "합법성"을 띄고, 이루어졌었다.

"신민회"의 가장 큰 특징은 "비밀결사"이면서도, 중앙에서 군에 이르기까지 의결 기관을 두었다는 점이다또한 "조직""종선"으로만 이어지게 해서, 당사자 2인 이상은 회원을 서로 알지 못하게 했고, "횡선"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조직의 사회적 기반은 "105인 사건" , 재판받은 인사들의 직업별 분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흥 시민 층신지식인 층"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주로 "시민 층""시민 층"의 지지를 받는 "신지식인 층"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가 조직되고 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나타낸다이는 "신민회"가 모든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그 성격은 "시민적 특성"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창 립

"신민회"의 창립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앞서 존재했던 "5개의 비공식 애국집단 세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민회""5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 운동단체"였다.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세력

"상동교회 (尙洞敎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세력

"서북지방 (평안도황해도)"서울 등지의 "신흥 시민" 세력

"무관 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세력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 (共立協會)"의 세력

"5개 집단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국내에서는 "동학당"에서 출발한 "김구" 등 몇 명과 "미주지역"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 회원"들이었다

"독립협회""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그들은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다그러나 1905년 이후에는 각자 관련 분야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말~ 1907년 초의 연휴 기간에, "안창호이강임준기" 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LA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안창호"가 생각해 낸,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그리고 "대한신민회 취지서대한신민회 통용 장정"을 초안하였다그들은 이 결사의 목적에 비추어, "미주"에서 이 단체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다그리하여 본국에서 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본국에 파견할 대표로 "안창호"를 뽑았다1907.01.20일경, "안창호""샌프란시스코"를 출발, "동경"을 거쳐 02.20"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후, "양기탁(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안창호""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 유력한 지도자였고,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반면에 당시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독립협회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0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양기탁"이 맡고, "이동녕(총서기)전덕기(재무) 안창호(집행원)" 담당했다.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다"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 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3.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공개 합법단체"가 아닌, "비밀결사"로 만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의 핵심 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한 것은,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수구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에는 "도총감(道總監)"을 두고 ,각 도별 회원을 지휘하도록 했으며, 의결기관으로 "평의원(評議員)" 두었다. ""에는 "군감(郡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다"군감" 밑에는 "()"을 편성했는데,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 두었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두었다. 5명 단위의 ""조직이 "신민회의 기본단위 조직" 이었다.

"회원의 입회"는 매우 엄격하게 심사해서 이루어졌다회원은 애국사상이 확고하고,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결심이 굳건한 인사에 한해 엄선하였다

"신민회" 입회 때는 예식이 있고, 회원의 책임에 대한 서약이 있었다서약의 내용은, 회원의 생명과 재산을 신민회의 명령에 의해, 국권 회복에 바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4. 활 동

① 교육 구국 운동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력 양성"의 방법으로서 가장 많은 힘을 쏟은 운동이 "신교육구국운동"이다. "교육구국운동"은 "신민회"가 창립될 당시,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이 운동은 3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3번째의 "학교 설립"이었다.

•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고취한다  • 민중이 각지에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국권 회복에 적합하도록 지도한다 • 신민회 자체가 우수한 학교를 세워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학교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소학교"였다.  "신민회"는 이런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서,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 간부"를 양성해, 국권회복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실시해, "교사"를 양성했다. "사범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시켜서, "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 평양 : 대성학교(大成學校)    • 정주 : 오산학교(五山學校)ㆍ신안학교(新安學校)   • 강화 : 보창학교(普昌學校)   • 안악 : 양산학교(楊山學校)    • 서울 : 협성학교(協成學校)   • 경성 : 경성학교(鏡城學校)    • 의주 : 양실학교(養實學校)   • 곽산 : 흥양학교(興襄學校)    • 안주 : 협성안흥학교(協成安興學校) • 납청정(納淸亭)- 가명학교(嘉明學校)    • 선천 : 신흥학교(新興學校) • 영흥- 명륜학교(明倫學校)

이 중에서도 "대성학교(평양)ㆍ보창학교(강화)"는 유명했다. "대성학교 (평양)"는 "국권회복운동 간부와 국민교육에 필요한 사부(師傅)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때문에 "중학교"로서의 완전한 시설을 갖추고, "철저한 애국주의 신교육ㆍ체육교육ㆍ사관훈련"을 시켰다. 

"보창학교 (강화)"는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두고, "강화군" 내에 21개의 "소학교 분교"를 두었다. 이 밖에도 "개성ㆍ금천ㆍ장단ㆍ풍덕ㆍ안악ㆍ충주ㆍ함흥" 등지에도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각 지역의 "보창학교"는 "대성학교"에 비해 시설은 뒤떨어졌으나, 같은 계열의 학교를 전국적으로 설립해 나가면서, 더욱 전투적인 "애국주의 교육"을 시킨 데 특징이 있다.

이 시기에 "이동휘 (임시정부 국무총리ㆍ사회주계열 독립운동가)"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학교 설립ㆍ교육구국운동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애국계몽운동" 중의 "신교육구국운동"에 큰 기둥이 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② 계몽강연ㆍ학회운동

활동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활발하게 전개된 사업의 하나가 "계몽 강연ㆍ학회 활동"이었다. "신민회"의 취약점 중의 하나인, 부족한 재정의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고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ㆍ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했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ㆍ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ㆍ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ㆍ동제회(同濟會)ㆍ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이 "계몽 강연"을 통해 고취한 것은 "애국주의ㆍ국권 회복ㆍ민권 사상ㆍ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계몽ㆍ구습 타파ㆍ교육구국운동과 학교 설립의 고취ㆍ자발적 의무 교육 실시ㆍ학회 활동의 고취ㆍ민지(民志)의 단합 고취ㆍ실력 양성 호소" 등이었다.

③ 잡지ㆍ서적 출판운동

기관지로 "대한매일신보"를 활용하였다. "양기탁"과 함께, 논설위원ㆍ직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해, "대한매일신보"는 쉽게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기탁"이 주로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신민회의 총본부" 기능까지 겸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잡지ㆍ출판운동"으로서, 서울에서 "최남선"을 중심으로 하여, 1908.11월에 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였다. 종래 "소년"지는 "최남선의 개인잡지"로서 많이 알려졌으나, "신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어, 활동하였다. "소년"지가 "105인 사건"과 때를 같이해,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다.

"출판 사업"은 외곽 단체로서, 1910년에 조직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단체는 "신민회" 회원 중, "민족문화와 근대 국사학의 창립"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의 보존과 간행을 주장하는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

④ 민족 산업 진흥운동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 침략을 군사 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다. 그들은 민족 산업의 진흥을 위해, 우선 "신민회" 회원들이 출자해서, "본보기 공장ㆍ본보기 회사"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를 "실업가"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영업 방침을 지도함으로써, "민족 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 산업 진흥운동"은 "민족 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독점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했으므로, "교육구국운동"과 같은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실업체"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ㆍ협성동사(協成同事)ㆍ상무동사(商務同事)ㆍ조선실업회사ㆍ안악의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ㆍ연초공장ㆍ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이다.

⑤ 청년 운동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를 "국민"으로 보았지만, 세대별로는 "청년층"이 그 핵심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청년운동"을 독립시켜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의 청년 운동은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해, 1909.08월 "신민회"의 합법적인 외곽 단체로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 운동"은 의기는 높았으나, "민족 산업 진흥운동"과 비슷하게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해, "청년 단체"를 너무 늦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⑥ 무관학교 설립ㆍ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신민회"는 국내의 활동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내외의 호응을 얻어, 단숨에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ㆍ독립군기지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08월이었다.

"일제"가 1907.07.3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그 이튿날 "해산식"이 있자, 해산당한 군인의 일부가 봉기해서 "의병운동"에 합류,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가 "의병운동"에서 문제 삼은 것은 "일본 정규군"과 대전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현대적 군사훈련과 무기였다. "신민회"는 "의병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07~1908년 말까지, "의병운동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했고, 둘째 이 시기에 "의병운동"이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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