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07.06 : 헤이그 회담 → "고종" 폐위

by 당대 제일 2022. 10. 5.
반응형

 

"헤이그 회담 (네덜란드 수도)"은 1899년ㆍ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이다. "3차 회담"은 1914년에 열리기로 하였으나, 1915년으로 조정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1. 헤이그 회담 (Hague Conventions)만국평화회의 (萬國平和會議)

"헤이그(네덜란드 수도)"에서 1899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이다"3차 회담"1914년에 열리기로 하였으나, 1915년으로 조정되었고,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헤이그 회담(18991907)"은 전쟁 행위를 천명한 최초의 "다국적 조약"이었으며, 대체로 "리버 법전" 기반으로 했다. "헤이그 회담"의 많은 규제들은 이 법전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네덜란드"17~18C에 해양 진출이 활발해져 "신흥 해양강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때에,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로티우스"를 배출한다이런 배경 하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 평화 회담"이 열리게 된다.

"리버 법안"은 최초의 공식적인 포괄적 성문법으로, "남북전쟁" 중인 1863.04.24, "미국의 북부""링컨 대통령"이 서명하고, 제출한 법이었다.

여기에는 "군법회의"의 측면에서 행위를 제한하고, 민간인과 민간인 재산을 보호하고, 범법행위탈영병전쟁범죄자를 처벌하고, 인질약탈게릴라스파이정전포로교환전 반란군의 집행유예정전조건인간 생명 존중적지에서 군인/시민의 암살/살해내전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교전자들의 지위 등을 언급한 것이었다.

"헤이그 회담"에서 제한된 많은 규칙들은 "1차 세계 대전"에서 위반되었다"독일의 벨기에 침공"1907년의 "협정 3"을 위반한 것이다3항에는 개전은 선전포고와 같은 명시적인 경고 없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언급되어 있다"독일군""독가스"를 사용했고, 그 후로도 전쟁 내내 주요 교전국의 적 병사에게 사용을 했다이것은 독과 독성 무기 사용을 금지한다는 1899년 선언 4-2, 1907년 협약 4항을 위반한 것이었다.

2. 1907.06.15~10.18 : 헤이그 특사 사건헤이그 밀사 사건

"대한제국""2차 헤이그 회의 (1907.06.15.~10.18)"에 참석하려는 소득 없는 노력을 했다"고종 황제"는 회의에 참석하여, "일제"가 한반도를 흡수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준이상설이위종""특사"로 파견했다.

"대한제국"은 외교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국제 사회"에 호소를 했다"호머 헐버트(미국인 선교사)"도 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로 갔다4명은 모두 "일본영국군"에 의해 입장이 거부되었다.

1907, "헤이그"에서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전덕기이동휘"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고종"에게도 동의를 얻었고, 특사로는 "이준이상설이위종"이 정해졌다.

"이준""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헤이그 숙소"에서 객사했는데, "만국평화회의 불참"으로 인한 울분을 못이겨, 앓다가 사했다. 그 증거로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1907.07.15일자 기사에서 "코리아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 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에 있는 "드 용 호텔"에서 죽었다"고 보도했다.

1962, "이준""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으며, 유해는 "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 봉환되었다.

"장지연""위암문고(韋庵文稿)"등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헤이그

1907.07.05, "이상설""만국평화 회의장"에 나가, 호소하는 글을 막힘이 없는 "불어"로 발표하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11.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2~3개 열거해보면,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3. "헤이그 회담""제네바 의정서"

비록 "헤이그 협약"에서 협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헤이그 회담"에서 "제네바 의정서"는 회담에서 가된 것으로 간주된다1925.06.17일에 서명되었고, 1928.02.08일 실효된 "제네바 의정서"에는 모든 종류의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의 사용에 대해, 영구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의정서는 "1차 세계대전"에서 "머스터드 황"과 유사 매개체의 사용에 따른 화학 무기에 반대하는 점점 커지는 대중의 외침에서 나왔으며, "화학무기생물학 무기"가 미래 전쟁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물이다이 의정서는 1972"생물학 무기 협정"1993년의 "화학 무기 협정"으로 확대되었다.

4. 1899.05.18 : 1차 헤이그 회의 (조약은 총 32개국이 서명)

1898.08.24, "니콜라스 2(러시아 차르)""평화 회의"를 제안했다"니콜라이 황제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외무장관)" 이 회의가 성사되는데 기여했다.

회의는 황제의 생일인 1899.05.18일 개최되었다. 협약은 07.29일 서명되었고, 1900.09.04일 발효되었다"토비아스 아세르(네덜란드 법학자)"1899년에 열린 "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상설중재재판소" 결성에 기여한 공로로, 1911"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그는 1913년 사망 전까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의 설립을 도왔다.

5. 1907.06.15~10.18 : 2차 헤이그 회의 (조약은 총 44개국이 서명)

"2차 회의" "1차 회의 협약(1899)"에서 주요한 진보는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끝났다그러나 주요 열강들의 모임은 이후 20C "국제 협력"을 미리 형상화시켰다"2차 회의"의 최종 법안은 1907.10.18일 서명되었고, 1908.01.26일 실효되었다"2차 회의"1904"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제안으로 소집되었지만, "러일전쟁(1904~1905)"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회담이 개최된 의도는 "1차 회의(1899)"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항목을 추가함으로써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2차 회의" "해전"에 대한 초점을 확장하려 하였다"영국"은 군비 제한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영국""독일 함대"의 성장을 중단시키려 한다고 우려한 "독일" 주도의 다른 열강에 의해 좌절되었다.

"독일"은 또한 "강제적 중재 제안"에 대해서도 거절했다그러나 이 회담은 자발적 "중재에 대한 기구"를 확대했으며, 채무의 수집전쟁의 규칙중립국의 권한/의무에 대한 협약을 확립시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