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11.09 : 신민회 사건 (105인ㆍ안악)

by 당대 제일 2022. 10. 5.
반응형

 

"신민회 사건 (新民會)"은 1911.01월에 발생한 사건으로,  "1심 공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여,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1910.11월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지방에서 "서간도"에 세우려고 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된 사건으로,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의 발단이 된다.

 

1. 신민회 사건 (新民會)ㆍ105인 사건ㆍ안악 사건안명근 사건ㆍ총독암살 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 (3대 한국통감ㆍ초대 조선총독ㆍ1852~1919ㆍ67세)

1910년경, "신민회ㆍ서북지역(평안도ㆍ황해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지역의 "배일적 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잡힌 "안명근 사건"을 확대ㆍ날조하고 하여, "신민회ㆍ서북지역(평안도ㆍ황해도) 기독교인"들 다수를 체포한 것이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하고 해체시키는 등, "비밀 항일단체"를 제거했으나, 이와 연루되었던 많은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신민회"는 비록 일제의 감시ㆍ탄압 속에 해체되었지만, 뒷날 "임시정부"로 계승하게 된다.

• 일 시 : 1911.01~ 1913.07

• 결 과 : 전국적으로 600여 명 검거→ 유죄 판결 105명

• 체 포 : (신민회) 안명근(종신형)ㆍ김구(징역15년)ㆍ윤치호(징역10년)ㆍ양기탁(징역10년)ㆍ이승훈(징역10년)

"신민회 간부들(양기탁ㆍ이동휘ㆍ이승훈ㆍ안태국 등)"이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국권 회복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은 갖은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하였다.

"암살 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따라 "윤치호"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하였다.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은 5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최종 판결에서는 "윤치호" 등 6명에게, 징역 5~6년형이 선고되었다. 조작된 사건 진행으로 "신민회 주요 인사 (윤치호ㆍ안창호ㆍ양기탁ㆍ이동휘)"들이 검거되어, 민족운동이 탄압을 받아 "신민회"는 해체되게 된다.

2. 안악 사건 (安岳事件)안명근 사건

1910.11"안명근""황해도 안악"지방에서 "서간도"우려고 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된 사건으로,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의 발단이 된다.

"일제""무관학교 설립자금""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고 날조했고, "최명식"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안둥 현(安東縣)"에 설립하려던 "무역회 사건"과 결부시켜, 사건을 확대하여, "애국계몽구국운동"에 헌신한 독립지사가 대부분인 "해서교육총회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면학회(勉學會)" 에 관련된 "안명근박만준배경진승길한순직김홍량김구박형병최명식도인권김용제이유필" 16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김구"1909"황해도 안악""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11.07, "안악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안명근"의 무기징역을 비롯하여, 7~15년의 징역형을, "민회 중앙간부"에 대해서는 징역 2~ 원도안치처분(遠島安置處分)까지 선고하였다.

"일제""안악 사건"을 계기로, 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비밀결""민회"의 관련 인사정책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이후, "일제""신민회" 간부회원들과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사전에 일망타진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던 것이다.

데라우치

※  안명근 (안중근 사촌 동생ㆍ安明根ㆍ1879~1927ㆍ48세) 신민회 회원은 아니었음.

어려서부터 안중근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이승훈김구"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북간도"로 망명해, "신천"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1910.12"평양역"에서 일경잡혀, "서울 경무총감부"로 압송10년 복역 후 출옥"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

4. 무관학교 설립ㆍ독립군기지 창건

"신민회"가 국외의 "무관학교 설립독립군기지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 들어간 1909년 봄이었다"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립, 현대전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사업이 실천에 들어가기도 전인 1909.10"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났다"일제""안중근"과의 관련 혐의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을 구속하였다가, 이듬해인 1910.02월에야 석방하였다1910.03, "신민회""긴급 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신민회"가 이때 결정한 "독립군기지 창건사업과 독립전쟁 전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독립군 기지""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 일대"에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 국내 진입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로서 선정한다.

"최적지"가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일정 면적의 토지를 구입, 이에 필요한 자금은 국내에서 "신민회 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모금한다. 또한 "이주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휴대하도록 한다.

토지를 구입하면, 국내에서 애국적 인사들과 애국 청년들을 계획적으로 단체 이주시켜, 신영토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한다.

새로 건설된 "신한민촌"에는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교회기타 문화시설을 세우는 한편, 무엇보다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文武雙全敎育)"을 실시해, 사관(士官)을 양성한다.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사관"이 양성되면, 이들과 이주 애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한다. "독립군 장교"는 현대적 장교 훈련과 전략전술을 습득한 "무관학교 출신 사관"으로 편성하며, 병사들 역시 모두 무관학교에서 현대 군사교육과 전략전술을 익히는 "정병주의(精兵主義) 군사훈련" 채택한다. 이는 "일본 정규군"과의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꼭 필요한 조치였다.

강력한 "독립군"이 양성되면, 최적의 기회를 포착,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한다 최적의 기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힘이 더욱 커지고, 침략 야욕이 팽배하여, 만주 지역이나 태평양 지역까지 집어삼키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 중으로 추정했다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재빨리 잡아서, 그동안 국외에서 양성한 "립군"을 국내로 들여보내고, 국내에서는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내외 호응해서 일거에 봉기, 실력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크게 볼 때, "무관학교독립군 창건독립전쟁 전략" 등은,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신민회"의 응전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갑신정변동학혁명운동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의병운동"을 실제 경험에 의해 종합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이며, 한국 "근대민족운동"의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 결론"과 같았다.

"신민회""만주""무관학교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04"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 등을 출국시켰다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이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조가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신민회"1911년 봄에 대대적인 "단체 이주"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5. 신민회 사건ㆍ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 발생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1911.01월에 "안악사건(安岳事件)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1911.09월에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회원"을 대량 체포하였다"일제"1911.01,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 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김도희옥관빈" 17명도 검거하였다.

또한, 1911.09,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이란 것을 날조, "신민회 평안남북도 지회" 회원을 비롯해,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나, "신민회""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국내의 "신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중에도,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무관학교""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불렀다가,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흥(新興)"이란 "신민회가 흥국(興國)한다"는 뜻이다.

"신민회" 회원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신흥무관학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무관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 외에, 6개월3개월의 "속성과"를 두어, 찾아오는 모든 애국 청년의병들에게 철저한 현대식 군사교육군사훈련을 시켰다1917, "통화현(通化縣)의 소북대(小北岱)""분교"를 설치할 만큼 크게 발전하였다.

이 밖에 1913,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왕청현 나자구(汪淸縣羅子溝)""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蜂蜜山子)""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신민회"는 결국 "3개의 무관학교독립군 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민회""무관학교 설립독립군기지 창건" 운동은 국내의 "신민회"가 해체되는 도중에 진행되어,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그러나 이 3곳의 "무관학교독립군기지" 창건은 그 뒤 "만주"에서의 "독립군 창건"의 모체가 되었다.

"신민회" 회원들이 세운 "무관학교"에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애국주의"로 정신 무장을 시켰다그런 상태에서, 현대적 사관교육을 받은 장교병사들이 체계적으로 양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현대적 독립군이 편성되었다. "의병들"도 재훈련되어, "현대적 독립군 대원"으로 발전하였다이렇게 만들어진 "독립군"은 과거의 "의병"과는 달리, "일본 정규군""현대전"에서 능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신민회"가 창건한 "독립군"은 사병이 부족해, "장교 중심의 소규모 부대"로 꾸려나갔다그러나 "31운동" , 국내에서 청소년들이 물밀듯이 찾아오자, 이들을 훈련해, 대규모 "독립군단" 편성, "청산리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주" 도처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독립 전쟁"을 전개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