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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04.02 : 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 적백내전

by 당대 제일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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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ㆍ일 전쟁 (露日戰爭)"은 무너지고 있던 "러시아 제국"의 싸움이었지만, 모두가 "러시아 제국"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주변국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일본 제국"이 승리하였고, 일본 은 일순간에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1. 러일전쟁 (露日戰爭1904.02.08~1905.09.05)포츠머스 조약적백내전

러시아 제국ㆍ일본 제국이 만주ㆍ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욕망이 충돌하여 발생하였다. 만주ㆍ한반도 일대의 권리를 점유하고자 하였으나, 서구열강(미ㆍ영ㆍ프)들의 러시아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발생했다. 러시아는 해군ㆍ해상 무역을 목적으로, "태평양" 연안에 있는 "부동항"을 얻으려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사용 가능한 유일한 항구였으나, "여름"에만 주로 이용되었다. "여순(旅順ㆍPort Arthur)항"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 일 시 : 1904.02.08.~ 1905.09.05

• 장 소 :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

• 결 과 : 일본제국의 승리 → 포츠머스 조약체결 (1905.09.05일, "미국"의 주선) → "미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영 향 : 러시아 제국-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패전의 영향으로, "2월 혁명"을 겪는다. 일 본- "제국주의의 광풍"이 더 심하게 몰아치게 된다.  대한제국- 열강의 묵인 속에 "을사조약(1905)"을 강요당하는 등,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1910년에 "일본"에 "강제 합병"된다.

• 교 전 : 러시아ㆍ세르비아 (프랑스ㆍ독일) / 일본제국 (미국ㆍ영국ㆍ인도ㆍ캐나다)

• 병 력 : 러시아- 50~100만 명 / 일 본- 30~ 50만 명

• 피 해 : 러시아- 전사(4~ 6만 명)ㆍ부상(15 만 명)ㆍ계 : 19~ 21만 명 사상  / 일 본- 전사(4~ 5만 명)ㆍ부상(1.2만 명)ㆍ계 : 6만 명 사상

"청ㆍ일 전쟁" 이후인 1903.0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차르 정부"와 "일본" 간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으로 하는 "분할통치 안"을 역제안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일본은 1904년 협상 결렬 후,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전쟁을 선택하였다.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도움을 받던 "일본 제국"과 무너지고 있던 "러시아 제국"의 싸움이었지만, 모두가 "러시아 제국"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주변국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일본 제국"이 승리하였고, 일본 은 일순간에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이전부터, "피의 일요일" 같은 심한 "내전"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쳐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차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거셀 수 없이 커졌고, 결국 "적백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 연보 >

04.02.08. : 여순항(무승부)/ 제물포 해전(: 일본) →  04.04.30~05.01 : 압록강 (: 일본)  04.05.25~26 : 남산(요동) (: 일본) →  04.06.14~15 : 텔리수 (: 일본) →  04.07.17 : 모티엔 (: 일본) →  04.07.24 : 대석교 (: 일본) →  04.07.31 : 시무쳉 (: 일본) →  04.08.10 : 황해 해전 (: 일본) →  04.08.14 : 울산 해전 (: 일본) →  04.08.19~1905.01.02 : 여순항 포위 (: 일본) →  05.08.25~09.03 : 요동 (무승부) →  05.10.05 : 사하 (무승부) →  05.01.26~27 : 산데푸 (무승부) →  05.02.21~03.10 : 봉천 (: 일본) →  05.05.27~28 : 쓰시마 해전 (: 일본)

러일전쟁

2. 배 경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사상, 기술적인 진보, 풍습 등을 받아들이려 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짧은 시간 내에 고립에서 벗어나, 근대화된 산업국가로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본은 서양의 열강과 같은 세력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주요 열강 제국인 "러시아"는 동쪽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1890년대에는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을 흡수하면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캄차카 반도"까지 뻗어 있었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과 존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다.

① 청일전쟁ㆍ삼국간섭

"청ㆍ일 전쟁(1894.07~1895.04)"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였고, "시모노세키 조약(1895.04.17일)"이 체결되어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일본제국"에 양도해야 했다.

일본에 할양된 "랴오둥 반도"에 "여순항(Port Arthur)"이 포함되자,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던 "러시아 제국ㆍ독일 제국ㆍ프랑스"의 서방 3개국은 "삼국간섭(1895.04.23.)"을 적용하여, "랴오둥반도와 여순항을 대상으로 한, 요구를 포기하라"고 일본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② "여순항" 양도

1897.12월, "러시아 제국"의 함대가 "여순항"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3개월 후, "중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협정되어, "러시아 제국"은 "여순항과 대련만"을 조차하여, 주변의 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으로서는 "부동항" 확보가 전략상 중요하였고, 1년 후에는 이를 확고히 하려고 "동청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대련ㆍ여순역"이 소실되자, "러시아 제국"은 "의화단"에게서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 시기, "일본군"은 "러시아"와 "중국"에 보호 협정을 맺은 "조선"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 군"을 몰아내기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였고,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권한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독점권과 "한반도"의 "북위 39도 이북"에 대한 중립지역 설정, "한반도의 군사적 이용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영ㆍ일 동맹(1902)"을 맺었는데, 이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나라가 있으면, 영국이 일본의 편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러시아"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영국"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그 뒤,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이 1904.02.04일부로 협상 중지를 선언했다. 

2월 초, 일본은 "마산포ㆍ원산" 등지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는 등, 전쟁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3. 진행 과정 (1904년)

1904.02.10일,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하였지만, 선전포고에 앞서 02.08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극동 함대", 02.09일에는 "제물포항의 전함 2척"을 공격하였다.

일본의 공격 소식에 "러시아 제국"의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는 아연실색하였으나, 일본 제국이 선전포고하지 않고서 전쟁을 걸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장관들도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과 전투한 지, 8일 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4.01.23일 대외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한성부를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02.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5월에는 일본이 "대한시설강령"을 내세워서 중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

① 1904년 전투

"요동반도"에 있는 "여순항"은 "러시아 제국"의 주요 해군 기지로 요새화되었다. 아시아 본토에서 전쟁을 벌이려면, 바다를 손에 넣어야 했으므로, "일본 제국"의 첫 군사 목표는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제국" 함대의 축출이었다.

② 1904년 여순항ㆍ제물포 해전 (바략 함ㆍ카레이츠 함)

• 02.04 : "러시아 제국 태평양 함대" 수십 척이 "여순 항을 떠났다"는 정보가 일본에 입수되었다.

• 02.06 : "도고 헤이하치로"는 "사세보"에서 "제물포의 육군 상륙ㆍ여순항 공격"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켰다.

• 02.08 : "도고"가 지휘하는 "일본제국 함대"가 "여순항"의 "러시아제국 군함"을 어뢰로 기습공격하여 개전하였다. 전함 2척이 대파되었고, 공격은 다음 날 아침 "여순항 해전"으로 발전했다.

결판나지 않는 해상전투가 이어졌으나, "도고"는 항구의 해안 포대의 보호를 받는 "러시아 함대"를 충분히 공격할 수 없었고, 1904.04.13일 "러시아"는 "제독 스테판 마카로프"가 전사하여, 어쩔 수 없이 항구를 떠나야 했다.  이 전투는 일본군 약 3,000명의 "제물포 상륙"을 은폐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에서 이동하여 한성까지, 대한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였다. 당시 "제물포" 앞바다에는 각국 여러 전함이 정박하고 있었고, "일본제국" 해군에게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위협받고 피신하였다.

• 02.09 : 오후까지 일본:러시아 → 14:2로 벌어진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의 정예함 "바략 함ㆍ카레이츠 함"이 침몰하였다. 일본은 "인천항"에 병력 50,000명을 상륙시켰다.

• 02.12 : "러시아 제국공사"가 철수하자, "대한제국ㆍ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었다.

③ 압록강 전투 : 러일전쟁의 첫 육상전

4월 말, "이테이 쿠로키"가 지휘하는 "일본 육군"은 "러시아 제국"이 점령한 "만주"를 향해 압록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기간에 "만주"를 지배할 발판을 얻으려는 일본의 전략과 달리, "러시아 제국"은 당시 "이르쿠츠크" 부근까지의 미완성인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수송되는 지원 병력을 기다릴 시간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05.01일, "압록강 전투"는 "러일전쟁"의 첫 육상전이 되었고, 일본 군은 저항 없이 강을 건너 "러시아 제국"의 거점을 공략하였다. "만주" 해안 곳곳으로 상륙하여, "러시아 제국군"을 "여순항"으로부터 축출하였고, "러시아 제국군"은 방어에만 전념하고 반격하지 않았다.

④ 여순 항 봉쇄ㆍ황해 해전ㆍ발트 함대의 이동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의 "여순항 사용"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02.13~14일, 일본군은 시멘트를 채운 증기선 7척을 해협 깊숙이 가라앉혀, 여순항을 봉쇄하려 하였으나 배가 너무 깊이 가라앉아 실패하였다. 3월, 가장 유능한 러시아의 전략가였던 "제독 마카로프"는 "제1태평양 소함대"를 맡아, "여순 항"의 봉쇄를 돌파하려 하였다. 04.12일, 기뢰가 폭발하여, "페트로파블롭스크 호"는 곧바로 침몰하고, "제독 마카로프"는 그 함대에서 전사하였다.

06.23일,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의 지휘 하에 소함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실패하였다. 6월 말, 일본군 포병이 항구를 포격하였고, 오랫동안 "여순 항"을 봉쇄하였다. 08.10일, "러시아 제국"은 포위를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재시도하였지만, 공해에 닿기 전에 "도고"의 전함으로 구성된 소함대와 마주친다. "황해해전ㆍ08.10일의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양측은 포격을 주고받는다.

"도고 제독"은 "러시아 제국"의 다른 전함이 "태평양"으로 파견될 것임을 알았지만, 이 전투는 일본이 승리할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러시아 기함인 "체사레비치 전함"이 함교에 직격탄을 맞아, 함대 사령관 "비트게프트 제독"이 사망하게 된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다시 "여순 항"으로 향해 돌아가 머무르게 되었고, "여순 항"에 있던 러시아 제국의 여러 전함들은 "일본 육군"의 포격으로 침몰하게 된다. 육지로 포위된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도 실패하였다.

8월 말, "요양(遼陽) 전투" 후, 러시아 제국군은 "선양(瀋陽)"으로 후퇴하였다. "여순항"은 주둔군 지휘관이 상부와 의논없이, "일본 제국"에 항구를 양도하여, 1905.01.02일에 결국 함락되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러시아 제국은 "제독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지휘 하에 "희망봉"을 거쳐, 아시아로 향하는 "발트 함대"를 보내, 러시아 함대를 지원하려 하였다.

⑤ 울릉도ㆍ독도에 망루 설치

1904.08월, 일본 정부는 동해에서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해, "울릉도ㆍ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 하였다. 이에 1905.01.28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 담당으로 지정하였으며, 02.22일에는 "독도"를 일 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하였다. "울릉도"에는 1904.09월, "독도"에는 1905.08월에 망루가 세워졌다.

⑥ 1905년 전투

"여순항"이 함락되어, 일본 제3군은 북진할 수 있었고, 남방의 러시아 제국이 점령한 "선양"에 지원군을 파견할 수도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닥쳐와, 1904년의 "사하(沙河)전투" 이후, 육지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양측은 "선양" 남쪽전선 110km를 따라 야영하였다.

⑦ 흑구대ㆍ선양전투

1905.01.25~29일, "러시아 제2군"이 "흑구대시" 부근에서 일본군의 왼쪽 측면을 공격하여, 거의 돌파하였다. 일본군을 놀라게 하였으나, 다른 "러시아" 부대의 지원 없이 하는 공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전투는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일본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러시아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만주의 러시아군"을 괴멸시켜야 함을 알고 있었다.

"선양 전투"는 1905.02.20일에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80km 전선을 따라, "선양"을 둘러싼 러시아군의 좌ㆍ우측면을 습격하기 위해 진행하였다. 양측은 참호를 파고, 수백 대의 대포에 의지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격렬한 전투 뒤에, 양 측면에 가해지는 압박은 러시아군 양쪽 끝의 방어선이 안쪽으로 휘어지게 하였다. 포위될 것을 알아차리고, 러시아군은 퇴각을 시작하여, 수차례의 지연작전을 하였으나, 곧 혼란과 붕괴 속에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03.10일, 전투 후 3주가 지났을 때, "쿠로파트킨 장군"은 "선양" 북쪽으로 철수를 결정하였다. 철수하는 러시아의 만주군 대형을 일본군은 이들을 완벽히 괴멸시키지 못했다. 일본군도 희생자가 많아 추격할 상태가 아니었다. 러시아가 패배한 "선양의 전투"는 중요한 전투였으나 결정적이지는 않았고, 마지막 승리는 해군에 달려 있었다.

⑧ 쓰시마 해전 : 러일전쟁을 결정지은 마지막 해전

러시아의 "제2 태평양함대 (발트함대)"는 "여순 항"을 구하기 위해 29,000km를 여행하였으나, "여순 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마다가스카르"에 있던 함대의 사기를 꺾었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유일한 희망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는 3가지가 있었는데, "한국ㆍ일본" 사이의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길은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었으나, 일본에 매우 가까워 위험한 길이었다.

"도고 제독"은 러시아의 진행을 간파했고, "여순 항"이 함락되어 "제2ㆍ제3 태평양함대"는 극동의 유일한 러시아의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아챈다. 일본 연합함대는 처음에는 6척으로 구성되었으나, 당시에는 4척이 남아 있었으며, "순양함ㆍ구축함ㆍ어뢰정"은 그대로였다.

"제2태평양함대"는 신형 전함 4척을 포함하여, 전함(8척)ㆍ순양함ㆍ구축함ㆍ기타 함선까지 총 38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5월 말, "제2태평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여행의 막바지에 있었다. "러시아 병원선"이 불빛을 노출하여, 무장한 일본 "순양함 시나노 마루호"에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무선으로 "도고 사령부"에 알려졌고, 일본의 연합함대는 곧 출격을 명령받았다. 여전히 정찰에서 정보를 받으면서,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 위치를 알 수 있었고, 러시아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를 수 있었다 .

05.27~ 28일, 교전하여, "러시아 함대"는 전멸되었고, 전함(8척)ㆍ소형 함정ㆍ5,000명 이상 인원을 잃었고, 일본군은 어뢰정 3척ㆍ116명을 잃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함정 3척만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져나갔다. "쓰시마 해전" 후, 일본은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평화 회담"을 청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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