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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898.11 : 만민공동회 ← 황국협회 기습공격

by 당대 제일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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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 공동회 (萬民 共同會)"는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의 수호ㆍ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조직ㆍ개최되었던 민중 대회ㆍ민중 운동으로,  1898.12.13일, 마침내 "고종"은 "군대 동원"의 결단으로, "시위대"에 의한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수구파들"은 "시위대"에 술을 먹이고, "만민공동회"를 향하여 진격하게 하였다. "보부상"까지 "시위대" 뒤를 따라, 공격하여 왔다. "만민공동회" 시민들은 "시위대의 총검ㆍ보부상의 몽둥이"에 쫓겨, 해산하였다.

 

1.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관민공동회 (官民共同會)

"수구파들"은 "시위대"에 술을 먹이고, "만민공동회"를 향하여 진격하게 하였다. "보부상"까지 "시위대" 뒤를 따라, 공격하여 왔다. "만민공동회" 시민들은 "시위대의 총검ㆍ보부상의 몽둥이"에 쫓겨, 해산하였다.

1898.12.24, 서울 시내는 한때 "계엄 상태" 하에 들어갔다12.25, 마침내 "고종""11가지 죄목"을 들어,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구금하였다결국, "러시아일본"의 외세를 업은 "고종친러 수구파"의 무력 탄압 앞에 마침내 해산당하고 말았다.

일 시 : 1898.11.05~ 1898.12.23 (고종의 해산 명령)

전 개 : 1898.11.05~12.23일까지 "고종친유 이후의 6일간"을 제외하고는 사상 최장기일인 "42일간 철야 시위"로 전개

주도자 : "서재필윤치호이상재이건호" 등 독립협회 간부들

결 과 : 430여 명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구금

만민공동회

2. 의의

비록 "만민공동회운동"은 실패하였지만

1898년의 가장 위험한 시기에, "한반도"까지 진출한 "제정러시아""랴오둥 반도"로 후퇴시키고 국제 세력 균형을 형성하여 유지시켰다 이 때 획득된 세력 균형이 1904.02"러일전쟁" 발발 때까지, 6년간 지속된 것이었다.

열강의 이권 침탈과 침략 간섭 정책을 물리침으로써, 일시적이지만 한국의 자주독립을 굳건히 지키고, 열강의 침략을 일단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애국적 인사들"을 근대적으로 배양하였다.  "만민공동회운동"에 참가하였던 청소년들을 후일뒤 민족운동 지도자로 길러냈고, "주자학위정척사" 사상에 젖어 있던 낡은 애국적 인사들을 "근대적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가진 애국적 인사로 전환시킨 사실이다. (대표적 인물 :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

유명한 "연설가웅변가"를 배출했다.  "만민공동회""신분연령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가 가능했다. "현덕호(미곡상인 출신)박성춘(백정 출신)"을 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대표적 인물 : 박정양(정부 관료)ㆍ안창호(20평남 대동군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평안남도지회 연사))

"자유 민권 사상", "민주주의 사상"을 시민들 사이에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민중들 사이에서, 민중에 의한, 애국운동의 새로운 형태를 정립하였다.

 "민중에 의한 독립운동"의 원동력을 양성 공급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31운동"인데, 우리는 한국근대사에서 그 최초의 원형을 "만민공동회"의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3. 배 경

1898.02.07, "서재필윤치호" 등을 비롯한 "독립협회 간부들"은 기존 방식은 "계몽 운동"으로부터 민족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킬 것을 결정하였다1898.02.21, 독립협회의 "이상재이건호" 등은 "구국 정치 운동"을 선언하는 강경한 "상소문""고종"에게 올렸다.

"독립협회"는 외국의 군사권과 재정권 간섭을 규탄하고,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입헌정치를 주장하면서 탐관오리 제거와 대대적 내정 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이에 개혁 세력과 러시아 등 외세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러시아""대한제국"에 대한 침략 정책이 "독립협회"의 민족 운동에 의해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03.07일 오후, 장문의 협박 외교 문서를 "대한제국 외부(外部)"에 보냈다. "러시아"는 외교문서에서, "무뢰배들(독립협회 회원들)이 러시아를 배반하는 것을 러시아 대 황제는 괴이하게 여기고 있는데, 러시아 사관과 고문관을 보낸 것은 한국 고종의 요청에 응한 것이므로, 만일 고종이나 조선 정부가 러시아의 원조를 불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사관 및 고문관이 불필요하다고 보면, 러시아는 이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니, 이에 대한 회답을 24시간 내로 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던 것이다. "최후통첩"을 받은 "고종대한제국 정부"는 매우 당황하였다.

"고종""각 대신들외국공사들"에게 자문을 청하는 한편, 우선 24시간의 회답 시한을 3일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러시아 공사"에게 발송하게 하였다"독립협회""러시아의 침략 간섭 정책을 완전히 배제할 기회가 왔다" 판단하고, 즉각 "정부가 러시아 사관과 고문이 불필요하다는 회답을 보내고 그들을 철수시켜 자주 독립을 확립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4. 1898.03.10 : "독립협회" 주도로, "종로"에서 "만민공동회" 개최

1898.03.10, "독립협회""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힘으로 "제정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배제하고, "자주 독립"을 공고히 하기로 하였다"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17만 명)의 약 1/171만 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였다.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1만여 명의 민중들은 "러시아의 군사교관재정 고문의 철환""만민공동회" 의사로서 결의하였다. "만민공동회"라는 "독립협회"의 새로운 민중 대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1만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민공동회"라는 민중 집회는 한국 사상 처음으로, 민중과 연사가 "자주 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고종정부""만민공동회"의 압력과 "러시아" 측의 압력 사이에서 고심하면서, 연일 "대신회의" 열고,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결국 정부는 03.11일 밤,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러시아 공사"에게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의 철수를 요구"하는 외교 문서를 발송하였다이에 놀란 "러시아 공사""고종"에게 "이러한 회답을 보내면, 큰 일이 일어나므로 종전과 같이 러시아에 의뢰하기를 바란다."는 회답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고종"은 취침중이라고 만나 주지 않았다.

1898.03.12, 개최된 "만민공동회""독립협회"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서울 남촌(南村)" 거주하는 "평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5. 러시아 , 재정 고문군사 교관의 철수

"러시아" 측은 2차례의 "만민공동회"의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고려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회답 전문을 보내어,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의 철수"를 훈령하였다"러시아 정부"는 한국에 대한 침략간섭 정책실행에 실패한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04.12일자로 해임하고, "마튜닌(Matunine)"을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의 군사기지를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설치하도록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도 할 수 없이, 그들의 "월미도 석탄고기지"를 한국 정부에 돌려보내 왔다이로부터 "한국 시위대"의 군사 훈련은 "한국인 장교들"에 의해 현대식으로 진행되었고, 황실 호위와 지방의 치안을 위한 군사 훈련이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다또한 "전국의 재정""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의 관장 하에 놓이게 되었다"재정권군사권"이 완전히 "대한제국 정부"에 복귀된 것이었다.

한반도가 완전한 "힘의 진공상태"로 되자, "제정러시아일본"은 상호 견제를 위해, 1898.04.25."로젠-니시 협정(Rosen-Nish Agreement)"을 맺어, 양국이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고, 동시에 "대한제국"이 군사 교관이나 재정 고문의 초빙을 요청하는 경우에도 양국의 사전 동의 없이는 응낙할 수 없도록 협약하였다"로젠-니시 협정"에 의해, 종래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맺어진 "웨버-고무라 각서로바노프-야마가다 협정" 등은 사라지게 되어, 비로소 완전한 "국제 세력 균형"이 이뤄지게 되었다.

"세력 균형""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02월까지, 6년간 지속된 것이었다"대한제국""국제세력 균형"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만민공동회"의 운동에 의한 결실이었다.

6. "독립협회" 자주민권자강 운동

"대한제국 개혁파"들은 "제정러시아" 세력 철수 운동에 성공하자, 곧 승세를 타고, "친러 수구파 정부" 규탄하면서, 치열한 "자주ㆍ민권ㆍ자강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치 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의회 설립"을 요구하고, "친러 수구파"의 퇴진과 "개혁파 정부의 수립" 요구하여, 마침내 1898.10.12"박정양민영환""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이다그런데 "독립협회"의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공한이나 상소가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숨어 있는 "만민공동회민중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상설 기구가 아니었고, 따라서 "상임 간부"가 따로 없이 "만민공동회"가 개최될 때마다, 수시로 "임시 회장총대위원"을 선출하여, 민중의 결의 사항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7. 1898.10.12 : "박정양민영환""개혁파 정부"를 세우는데 성공

"독립협회" 운동이 1898.10.12, "박정양민영환""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자, "개혁파"들은 신정부를 지지하고, 신정부와의 협의 하에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여, "의회(上院)"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뒤, "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05일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開院)하기로 하고, "중추원 신관제(中樞院 新官制의회 설립법)" 공포하였다.

8. 1898.10.29 : 헌의6(獻議六條) 황제에게 헌의된다.

"개혁파"들은 정부로부터 국정개혁의 약속을 받기 위해, 10.28~11.02일까지(6일간) "종로"에서 대신들을 참석시키고, 민중대회인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했다특히 10.29일에는 사회 각 층의 1만여 명이 모인 군중대회에서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6개조를 결의했다. 6개조가 "황제에게 헌의된다."고 해서, "헌의6"라고 했다.

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관민이 협력하여,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광산철도석탄산림차관차병과 외국과의 조약에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말 것     전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하여 정부의 다른 기관이나 사회사가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포할 것

중죄인을 공판에 회부하되, 피고가 자복한 후에 재판할 것    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 임명할 것    장정을 신설할 것 등이다.

"헌의6"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신들"에게 동의를 받고, "고종"으로부터도 그대로 실시할 것을 약속받았다. 정부도 "헌의6"를 받아들여, 유명무실했던 "중추원"을 의회적 기능을 갖는 기구로 개편하고, "중추원 의관"의 반수인 "민선의관 전원""독립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그러나 "국왕의 측근세력""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9. 1898.11.04 : "의회" 설립 붕괴"독립협회 간부들" 체포

그러나 "개혁파 정부""의회" 설립 하루 전인 11.04일 밤에 붕괴되었다"친러 수구파"들은 "의회"가 설립되어,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그들은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입헌대의군주제(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대통령)윤치호(부통령)이상재(내무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共和政)"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서(匿名書비밀 전단)" 뿌렸다.

"고종""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11.04일 밤~ 5일 새벽에 걸쳐, "독립협회 간부들"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켰다그리고 다시 "조병식"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친러 수구파 정부"를 조직하였다물론 "친러 수구파 정부""독립협회개혁파 정부""의회 설립령"을 취소하였다.

10. 1898.11.05 : "친러 수구파 정부" 재수립

1898.11.05, 서울 시민들은 한국 사상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관람하기 위해, "독립관"으로 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이 때 "이상재"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개혁파 정부"가 붕괴되고, "친러 수구파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만민공동회""지도자 17명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6일간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 시위하였다"고종"은 병력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자, "대신 친러 수구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17"11.10일 오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 지도자 17"의 석방은 "만민공동회"6일간의 철야 시위의 간고한 투쟁 끝에 획득한 시민의 대승리였다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만민공동회""종로"로 옮겨 철야 시위를 계속하면서, "독립협회 복설(復設)모략배의 재판헌의6 실시"를 요구하였다.

11. 1898.11.21 : "황국협회" 지방 보부상(2,000여명)의 "만민공동회" 기습공격규탄

"독립협회"를 복설시키려는 운동이 저변으로 확대되어 가자, "고종수구파"들은 "만민공동회"해산시키기 위해, "황국협회(皇國協會)" 아래에 조직되어 있는 "지방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 들였다1898.11.21, 2,000명의 "보부상"들은 "길영수홍종우"의 지휘 아래, 몽둥이로 무장을 하고, 군사 대오를 편성하여, "만민공동회"를 기습하였다.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난타당한 시민들은 부상자가 부지기수로 나왔으며, "만민공동회장"은 삽시간에 참담한 수라장이 되고, "만민공동회"는 패퇴하였다.  시민들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수구파황국협회"를 격렬히 규탄하였다 "만민공동회"는 해산의 조건으로 "3개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황국협회 인물 8명 처벌ㆍ보부상의 혁파ㆍ시민이 원하는 인재의 등용 (개혁정부 수립))

12. 1898.11.26 : "고종수구파 정부"의 약속 불이행

"고종수구파 정부""만민공동회"의 기세와 압력에 굴복하여, "3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보부상의 혁파"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고종수구파 정부"가 실천하기로 약속한 "3개조의 요구 사항" 실시가 진전이 없자, 서울 시민들은 2일 뒤인 11.26"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이에 놀란 "고종""돈례문(敦禮門덕수궁에 있는 )"까지 나와, "만민공동회 대표황국협회 대표"에게 그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 줄 것을 친유하였다.

"고종수구파 정부" "만민공동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뜻으로,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고 "중추원 의관(50)"을 임명하였다. "중추원 의관"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은 17명으로"이승만고영근윤시병남궁 억유맹현제창윤하영홍재기양홍묵정항모최정덕신해영어용선홍정후조한우변하진손승용" 등이었다비록 "수구파 지지세력"33명이고, "만민공동회 지지세력"17명으로, "중추원 의관수"1/3불과하였으나, "중추원"을 이끌고 갈 자신이 있었으므로, "만민공동회독립협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종"12.02일 개각 때, "친러 수구파"를 진출시키자, 12.06일부터 "만민공동회"를 재개하여 상소 운동을 전개하면서, " 헌의6조 실시ㆍ황국협회 5명의 재판/처벌ㆍ 보부상 혁파" 등을 요구하였다.

13. 1898.12.16 : "고종"의 중추원 개원 허락

이에 "고종""만민공동회"를 무마하기 위해, "중추원의 개원"을 허락하였다. 12.16, "중추원"이 개원하는 날, "만민공동회" 계의 의관들이 앞장서서, 국정을 담당할 인물(개혁정부의 대신 후보) 11명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여, "고종"에게 천거하기로 결의하였다무기명 투표로 선출된 11명은 "민영준민영환이중하박정양한규설윤치호종한박영효재필최익현윤용구" 등이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11명으로 강력하고, 유능한 새 개혁정부를 수립하고, 불만족스러운 대로 "중추원""의회"로 활용하여, 사실상 "전제 군주제""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만민공동회 운동중추원의 대신 급 인물(11)의 천거에 의한 개혁정부 수립 요구"에 직면한 "고종"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14. 1898.12.23 : "고종"의 군대를 동원한 "만민공동회" 해산

이 때, "고종" 장차 "박영효"를 소환하여 우선 "만민공동회"를 무마하고, 정치의 개혁을 도모하려고 하였다그러나 "민영기" "수구파들"은 "군대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고 주장하였다

"종로"에서 계속되는 "만민공동회""중추원"11명 천거를 인준하고, 과단성 있는 "박영효""소환 기용"을 결의하였다그러나 일반 시민들 중에는 "박영효가 역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박영효의 천거"는 시민의 "만민공동회"에 대한 열정적 지지를 크게 감소시켰다.

이에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서, "만민공동회"를 해산할 경우의 각국의 반응을 타진하였다"러시아"만 군대 사용을 권하였고, 다른 공사들은 언급을 회피하였다이 때 "일본공사 가토""일본도 명치유신 초기, 군대로써 민회를 해산시킨 전례가 있음"을 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일본공사 가토"가 노린 것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세력의 붕괴였다"일본"은 침략 정책 수행 시, 한국내의 저항 세력이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력이라고 보고, 이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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