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협회 (皇國協會)" 창립은 "독립협회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개화파"가 조직한 "독립협회"의 혁신적인 요구에 맞서, "수구파 관료들"의 후원 하에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1898.11월, "황국협회 (정부의 외곽단체)"등의 무고로 "이상재ㆍ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고,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1,000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고종"은 칙령으로 "양회 해산"을 명령하였다.
1. 황국협회 (皇國協會)
대한제국의 "근왕적 관료들"이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보부상들"을 내세워 조직한 정치ㆍ경제 단체, "정부 고관"이 후원하고,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1,000원을 하사했다.
"발족식"은 "훈련원"에서 거행되어, 정부 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여주었다. "황국협회" 창립은 "독립협회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개화파"가 조직한 "독립협회"의 혁신적인 요구에 맞서, "수구파 관료들"의 후원 하에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와 밀착한 정부를 "친러 정권"이라고 비판하고, "헌의6조 건의ㆍ독립신문 발간ㆍ만민공동회 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독립협회"에 대항하여 결성되었다.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고종을 폐위시키는 공화정을 추구한다."는 내용의 벽서를 붙이고, "반독립협회" 여론을 일으켰고, 결국 1898.11.15일,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간부들이 검거되었다.
"독립협회 해산"에 반발하는 "만민공동회"가 서울에서 열릴 때, "황국협회" 회원들이 습격하면서 양 집단의 물리적 충돌도 일어났으며, 이 충돌에 "고종"이 직접 나서서 화해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군대를 동원한 강제 해체로 "만민공동회"마저 사라지자, 존재 목적이 없어진 "황국협회"도 해산되었다. 생업에 열중하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우리 땅의 백성이고, 민초들인 "보부상이 조직한 집단"으로, 후에 참가자 중 일부는 "항일 운동에 나섰다"는 평가도 있다.
• 일 시 : 1898.06.30.~ 1898.12.25 (고종의 해산 명령)
1898.11월, "황국협회(정부의 외곽단체)"등의 무고로 "이상재ㆍ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고,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1,000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고종"은 칙령으로 "양회 해산"을 명령하였다.
• 강 령 : 황권 강화를 통한 부국강병ㆍ "민간인" 중심의 "상업 활동"을 권장
• 목 적 : 정치적으로 "독립협회 견제", 독립협회와는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내세웠다. 예를 들어 "독립협회"가 "의회" 설치를 주장하면서, "엘리트" 위주의 "상원 우선 설치"를 말하면, "황국협회"는 "서민 대중"이 참여하는 "하원"이 먼저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
• 회 원 : 대부분 보부상(褓負商) 혹은 부보상(負褓商) : 봇짐장수ㆍ등짐장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부상(負商)은 삼국시대 이전에, 보상(褓商)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 지도부 : 허위 (을미사변 후 의병장) 참여ㆍ회장 (이기동(법부 민사국장))
• 중심인물 : 이용익 측근(이기동ㆍ길영수)ㆍ홍종우(김옥균 암살범)ㆍ고영근 등 : "고영근"은 초기에 "황국협회"를 이탈하여, "독립협회"에서 더욱 많은 활동을 하였다.
※ 이용익 : 조선 광산 갑부ㆍ사업가ㆍ대한제국 대표적인 친러파 관료ㆍ외교관ㆍ내장원경ㆍ탁지부장ㆍ중앙은행 총재
2. 부보청 (負褓廳)
"조선 정부"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지닌 "보부상 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보부상"을 총괄하는 관청을 만들었는데, 1866년에 "부보청"을 설치되었고, 그것이 1883년 "혜상공국"으로 이어졌다.
("보부상ㆍ부보상"은 조선전기부터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유지하며, 정부의 역(役)을 수행하고 그 대가로 상업의 이권을 행사하였다. 조선전기 유지되던 "부상청 (負商廳)"과 "보상단 (褓商團)"을 통합하였으며, 정부의 관리ㆍ보호 아래 두기 위해 "부보청 (負褓廳)"으로 개칭하여, 보부상을 관리하는 관청이 되었다.)
"혜상공국"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들"의 "14개조 개혁 정강"에서 없어져야 할 관청으로 지목하였는데, 이유는 "혜상공국"이 당시 집권층이었던 "민씨 세력"의 권력 강화에 이용되고, 그들의 재정기반을 돕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혜상공국"은 유지되었으며, 1898년 "황국협회"가 만들어 지면서, "보부상 관리" 업무는 "혜상공국"에서 "황국협회"로 이관되었다.
"보부상" 조직은 그 활동의 범위와 조직성 때문에, "집권층"과 연결되어 있는 측면이 있었으며, 이러한 활동의 흐름은 "혜상공국" 이후에도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이 "황국협회ㆍ독립협회"의 대립과정에서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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