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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고대 • 불가사의 (7대) • 로마 • 신화

고대 이집트 ④ 아몬(암몬)ㆍ라(레ㆍReㆍ호루스)ㆍ프타ㆍ룩소르(테베)

by 당대 제일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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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 (Amon)ㆍ아문 (Amun)ㆍ암몬 (Ammon)ㆍ아멘 (Amen)"은 "이집트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테베"에서 숭배되던 "바람과 공기의 신"으로서, 후에 "태양신 라()"와 합쳐진 후, "아몬-아몬-"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신"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 "이집트"에 입성한 BC 332, 고대 이집트의 문명을 보고 스스로를 "아몬의 아들"이라고 칭하였다.

 

1. 아몬 (Amon)ㆍ아문 (Amun)ㆍ암몬 (Ammon)ㆍ아멘 (Amen)

이집트에서 "()들의 왕"으로 숭배된 신"숨겨진 자"라는 뜻이다. "아몬"은 주요 신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제우스", 로마인들은 "주피터"와 동일시하였다.   "아몬 레"는 "사람의 모습"을 띠었으며, 때로는 "숫양의 머리 또는 숫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내 여신 무트ㆍ아들 콘스"와 함께, "테베" 사람들이 숭배하던 세 신 가운데 하나였다.

원래는 "크문(이집트 중부)"의 지방 신이었다. "아몬" 숭배는 "테베"까지 퍼졌으며, "멘투호테프 2세(재위 BC 2007~1956)"가 다스릴 때에는 "파라오의 수호신"이 되었다. 또한 그 무렵에는 "헬리오폴리스(이집트의 고대 신전 도시)의 태양신 레"와 동일시되었으며, "아몬 레"가 되어, "민족 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형상은 "불가시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파란색"으로 칠해졌다.  "불가시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신왕국(BC 1567~1085)"  "아몬의 전지성ㆍ공명정대함"이 널리 신봉되었으며,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신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아몬의 영향력"은 이집트의 정치적 안녕과 밀접하게 연결되기도 했다.  "힉소스 왕조(BC 1630~1522)" 때는, "테베"의 군주들이 "아몬 숭배"를 지지했다. "투탕카멘ㆍ아이ㆍ호렘헤브의 시대(BC 1332경~1292경)"에 "아몬"은 점차 "제국의 신ㆍ파라오의 수호신"으로 복원되었다. 제19왕조(BC 1252~1190) 때, "아몬" 제사장들 가운데 신학자들은 "아몬"이 "프타ㆍ레"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며, "프타ㆍ레"를 포함한 다른 모든 신들은 "단일신 아몬" 안에서 현시한다고 생각했다. 

라 (Ra)ㆍ레 (Re)

고대 이집트 신화의 낮(정오)의 태양신ㆍ아침에는 "케프리", 저녁에는 "아툼"이라 불린다.  벽화에서 "매의 머리"로 코브라가 태양을 둘러싼 모양의 왕관을 쓰고 있다.  주요 숭배 도시는 "태양의 도시"라 불린 "헬리오폴리스(이집트의 고대 신전 도시)"다.  고대 이집트 후기 왕조에 이르러서는, "호루스"와 합쳐져, "라-호라크티"라고 불리었다.  "태양신"은 "파라오"를 보호하고 왕권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라에 대한 숭배의식은 더 강력해졌다.

그는 4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세크메트"는 "암사자의 머리를 한 파괴의 여신"이다.  평상시에는 "소의 머리를 한 사랑과 미의 여신인 하토르"이나, "라"의 벌을 인류에게 가할 때는 "세크메트"로 변하였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의 눈"이 인류에 대한 동정의 의미를 담은 "라의 눈"이라고 불리었는데, 그래서 "소" 또한 "라의 가축"이라 숭배되었다.

② 프타 (Ptah)

고대 이집트 신화의 창조신ㆍ세크메트(파괴의 여신)의 남편"건립자"라는 뜻이 있으며, "토트(지혜의 신)"의 명령에 따라 천지창조를 마치고 정의를 확립하였다고 전해지는 신이다. "멤피스(하 이집트의 수도)"를 지배한 최고의 신으로 일컬어지며, "미라가 된 남자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2. 룩소르 카르나크 신전

"룩소르" 4개의 신전 중 가장 오래된 "카르나크 신전"은 BC 2,000년 이전에 건설을 시작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2,000여 년간 공사가 계속됐다.

"이집트" 최고의 신전으로 꼽히는 "카르나크 신전"은 매표소를 지나 한참이나 걸어야 입구가 나올 정도로 넓었다. "카르나크 신전"의 완성자로 "람세스2세"가 꼽힌다. "누비아" 지역의 "아부심벨 신전"부터 지중해까지, 아니 정복전쟁을 벌였던 "시리아"까지 그의 흔적은 없는 곳이 없었다. "룩소르" 중심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이 신전은 "파라오 시대"에는 "이페트수트"로 불렸다. "가장 완벽한 곳"이라는 뜻이다.

입구에는 "양머리 스핑크스"가 줄 지어 세워져 있다. "피라미드"는 하늘을 찌르는데 허접한 궁전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며칠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신왕국의 수도 "룩소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가의 계곡"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라오의 무덤"이 수두룩한 "룩소르"에도 궁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파라오"는 살아서 자신의 왕궁을 건설하는 것보다 사후세계를 보장받는 "신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궁"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는 흙벽돌로 짓고, "신전"은 화강암으로 올렸다.

"카르나크 신전" 안에는 높이 23m의 원주 134개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여기가 성속이 갈리는 경계지점 같았다. 높이 15m, 폭 113m의 갑문이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갑문 중간 통로에 들어서니, 대낮인데도 빛이 사라진 느낌이다. 이곳 주신전인 "아몬 신전" 내 다주실로 들어서니, 길이 102m, 너비 53m의 장방형 공간에 통로 양쪽으로 촘촘히 늘어선 기둥이 빛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높이 23m, 둘레 15m의 기둥 134개가 있다. 탑문을 하나 더 지났더니, 뾰족한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18왕조 투트모세 1ㆍ3세"가 각 1쌍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는데, 3개는 간 곳이 없고 1개만 남아 있었다. 높이 23m, 무게 143톤의 화강암 덩어리였다. 중앙통로를 건너, 대각선 자리에도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 1개가 있었다. 그녀도 1쌍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는데, 하나는 부서져 인근 호수 옆에 전시돼 있었다. 그러니까 "카르나크 신전"에 세워진 6개의 오벨리스크 중, 2개만 온전히 남아있는 셈이었다.

"신전" 중앙에는 "아몬 라"의 신상을 모시던 좌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 신상은 새해 첫날, "오페트 축제"가 열릴 때면, 남쪽으로 3km 떨어진 "람세스 신전"으로 3주간 옮겨져 있다가 돌아왔다.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바로 이곳 "람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 19C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이룬 "마하마드 알리"가 "프랑스 왕 루이 필립"에게 건넨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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