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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고대 • 불가사의 (7대) • 로마 • 신화

고대 이집트 ③ 오벨리스크 (Obelisk) ②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by 당대 제일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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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2개의 오벨리스크, 런던ㆍ뉴욕)"로 알려진 2개의 "오벨리스크"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BC 69~ 30)"과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BC 1C 로마의 최고 실권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ㆍ옥타비아누스ㆍ안토니우스"와 각각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래 BC 1450년 경, "툿트모세 3세(1479-1425)"가 "헬리오 폴리스의 라(Ra) 신전" 입구에 세운 것이다. 그와 "람세스 2세(BC 1304~1237)" 의 내용이 "전형적인 붉은색 화강암"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높이- 21.2mㆍ밑바닥(직사각형)길이- 가로 2.36m, 세로 2.33mㆍ무게- 약 180t)  BC 3C, "헬레니즘 시대"에 2개의 오벨리스크는 "알렉산드리아의 케사리움 신전" 입구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 전체 수량 : 30개ㆍ이집트 (6개)ㆍ이탈리아 (16개 로마 13개)

"이집트의 타니스"와 같이 쓰러져, 토막 난 채, 방치된 "오벨리스크"까지 모두 합하면 적어도 50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 30개 : 이집트(6개)ㆍ이탈리아(16개- 로마 13개)ㆍ영국(3개)ㆍ프랑스(2개)ㆍ미국(1개)ㆍ터키(1개)ㆍ이스라엘(1개)

• 이탈리아(16개): 로마(13개)ㆍ피렌체(1개)ㆍ우르비노(1개)ㆍ사칠리아의 카타니아(1개)  /  "로마"의 경우, 현존하는 13개 중, 19세기 이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것도 포함되어 있어,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오벨리스크"가 "로마"의 땅 속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 터키 이스탄불 : 390년경, "테오도시우스 대제(347~395)" : "카르나크(karnak)의 아문 대신전"에 세워져있던 "툿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플"의 전차 경기장(히포드롬)에 세웠는데, 원래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는 두 동강이 나서, 오늘날 윗부분 약 20m만 "이스탄불의 옛 히포드롬 자리"에 세워져 있다.

 원래 자리에 세워진 채로, 오늘날까지 보존된 오벨리스크 : 4개

• 센우스렛트 1세(BC 1965~1920): 헬리오 폴리스(카이로 교외)의 "태양신 라(Re) 신전" 입구 :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 (높이- 20mㆍ무게- 약 120t)새겨진 비문을 통해, 파라오의 즉위 30주년을 축하하는 "세티 축제"를 기념하여, 세워진 

• 툿트모세 1세(BC 1520~1492) : 카르나크(karnak)의 "아문 대신전"의 3번-4번째 탑문(pylon)사이 : 카르나크(karnak) 신전 : BC 1990년 건립, "룩소르 신전" 북쪽 3km지점에 있고, 최대 규모 신전높이- 24m밑바닥 4면체 길이- 1.8m무게-  143t (현재, 1개만 20m 높이로 남아있음 비문을 통해 원래는 꼭대기의 "피라미드 부분"이 금ㆍ은의 자연 상태의 합금인 "일렉트룸"으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침에 해가 뜰 때,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멀리서도 태양의 존재를 가장 이른 시각에 알려주는 "자명종"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 하트셉수트 여왕(BC 1479~1464): 카르나크(karnak)의 "아문 대신전"의 4번-5번째 탑문(pylon)사이 : 이집트 제18왕조 5번째 파라오ㆍ재위 기간은 이집트의 여왕 중 가장 길다.(약 20년)"툿트모세 1"의 딸"하트셉수트"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높이 29.5m무게 323t아버지가 세운 것 옆에 자신의 것을 세웠다.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왕 자신이 거룩한 다주실(多柱室) 앞에 아버지 "아문-라"를 위하여, "일렉트룸"으로 장식한 2개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그들은 하늘의 칼날처럼 세워졌고 태양처럼 두 땅을 밝혔다.  태초로부터 이와 같은 일은 없었다." 

• 람세스 2세(BC 1279~1213) : 룩소르의 "아문 신전" 입구 왼쪽

 원래 자리에서 옮겨, "카이로 시내"에 기념비적으로 세운 것 : 2개

모두 "타니스(이집트 북부)"에서 발굴된 것이다.  "나일 강" 한 가운데 "제지라 섬의 알-안달루스 정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1958년에 가져왔고, "카이로 공항" 입구에 세워진 것은 1984년에 가져왔다.  BC 1060년경, 제21왕조 "스멘데스"는 "타니스"를 새로운 수도로 재건하면서, "피-람세스"에서 "람세스 2세 시대"의 오벨리스크들을 가져와, "아문 신전"에 배치하였는데, "타니스"에는 적어도 10개 이상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높이는 13~16m로 비교적 소규모이다.

 과연 몇 개의 오벨리스크가 건설되었나?

모든 신전의 입구에 2개씩 세워졌다고 가정하여, 전체 신전의 숫자를 파악해 보면, "오벨리스크"의 숫자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카르낙 아문 대신전" 같이 탑문이 10개나 되는 "신전"에는 훨씬 많은 "오벨리스크"가 세워졌기 때문에, 숫자를 세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고대 이집트 신전들"이 파괴된 이후, 후 시대에 같은 장소에 새로운 "신전"이 재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현존하는 "오벨리스크"의 숫자는 특정한 장소에 제대로 세워진 것을 기준으로 한다.

2. 역 사

 높이 10m 이하가 되는 작은 "오벨리스크"는 대부분 BC 1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제4왕조(BC 2613~2494) 때부터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 세워진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 때 세워진 여러 태양신전들의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3.3m에 불과한 비교적 나지막한 편이다.  제5왕조 "태양 신전" 마당에 "사각뿔 형태"로 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하나의 돌로 다듬은 최초의 "오벨리스크"는 "제6왕조 테티(BC 2345~2323)"의 것으로 고 왕국 시대 수도인 "멤피스의 왕실 묘지 사카라"에 세워졌다.

 신전의 입구인 탑문 (pylon)

BC 2000년경, "중 왕국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신전의 입구인 탑문(pylon)" 좌우 양쪽에 1쌍으로 대칭되게 세워졌다. 이때부터 "신전 입구 탑문"에 설치되었던 30여m 높이의 "깃대"와 함께, "오벨리스크"는 "신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랜드 마크가 되었다.

 왕국의 수도 "테베 (룩소르)"

신 왕국시대(BC 1550~1069)에 들어와서, 전통적인 태양 숭배 도시인 "헬리오 폴리스"외에도 왕국의 수도였던 "테베(룩소르)"에 세워진 신전들 입구에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룩소르의 아문 신전ㆍ헬리오 폴리스의 라 (Re호루스) 신전"에 집중적으로 건설

"툿트모세 3세" 이후, "오벨리스크"는 더 이상 "카르낙의 아문 신전"이 아닌 "룩소르의 아문 신전ㆍ헬리오 폴리스의 라 신전"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또한, "세티 1세"가 건설한 "하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인 "피-람세스"에도 신전 건설과 함께 많은 오벨리스크들이 세워졌다.

3. 해외 반출

① "로마제국" 동안, "이집트"에서 "이탈리아"로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가 옮겨졌다.

적어도 "16개"가 이탈리아로 옮겨졌으며, 그 중 13개가 "로마"로 왔다. 해외로 반출된 "오벨리스크"의 경우, 처음부터 작게 만든 것도 있지만, 원래 깨진 것의 윗부분만 다시 세운 경우도 있다. "로마 제국" 황제들은 조직적으로 "오벨리스크"를 이탈리아로 가져왔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BC 63~ AD 14ㆍ로마제국 초대 황제)"였으며, 황제가 되기 이전인 AD 31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헬리오 폴리스의 라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2개)를 "로마"로 가져와, 해시계의 중심 기둥으로 사용했다.

"도미티아누스(51~96ㆍ로마제국 11번째 황제)"는 직접 "이집트 아스완채석장"에 주문하여, 자신의 오벨리스크를 제작하기도 했다. 황제들이 세운 "로마의 오벨리스크"는 대부분 "전차 경주장ㆍ신전 앞 광장"에 세워졌다. 4C 이후,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쟁ㆍ지진 등으로 황폐해져서, 일부는 넘어져 깨지거나, 땅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②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1쌍 2개의 오벨리스크, 런던ㆍ뉴욕)

"해외 오벨리스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진 2개의 "오벨리스크"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BC 69~ 30)"과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이 오벨리스크는 BC 1C 로마의 최고 실권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ㆍ옥타비아누스ㆍ안토니우스"와 각각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래 BC 1450년 경, "툿트모세 3세(1479-1425)"가 "헬리오 폴리스의 라(Ra) 신전" 입구에 세운 것이다. 그와 "람세스 2세(BC 1304~1237)" 의 내용이 "전형적인 붉은색 화강암"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높이- 21.2mㆍ밑바닥(직사각형)길이- 가로 2.36m, 세로 2.33mㆍ무게- 약 180t)  BC 3C, "헬레니즘 시대"에 2개의 오벨리스크는 "알렉산드리아의 케사리움 신전" 입구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집트 정부"는 1쌍의 "오벨리스크"를 2개로 나눠, "미국ㆍ영국"에 각각 하나씩 주었다. (영국 런던 "템즈 강변"ㆍ미국 뉴욕 시의 "센트럴 파크"에 서 있다.)

1878.08월, 현재의 위치인 "영국 런던의 템즈 강변"에 세워졌다.  1819년, 이집트의 통치자 "메흐멧트 알리"는 "넬슨 제독의 알렉산드리아 승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중 하나를 "영국"에 선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수송비 부담에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즉각 실행에 옮겨지지 않다가, 1877년 "윌리엄 윌슨 경"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수송 작업이 이루어졌다.  200t 가까이 되는 오벨리스크를 선박에 옮겨 싣는 것이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육지에서 길이 27.5mㆍ직경 4.5m 크기의 "철제 실린더"를 제작하여, "오벨리스크"에 씌운 다음 바다에 띄워, 증기선으로 끌고 갔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서 당시 "이스마일 파샤(이집트의 통치자)"가 "미국"에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영국 런던"의 것과 짝을 이루었던 다른 하나의 오벨리스크)  당시 "윌리엄 밴더빌트(미국의 철도 갑부)"의 후원 하에, 1880.07월 "뉴욕 항구"에 도착하여, 1881.02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프랑스"의 오벨리스크 (파리 콩코드 광장)

프랑스는 1829년, "이집트의 통치자"에게 "룩소르 신전" 입구에 서 있던,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를 기증받아, 1833년 "루이-필립 왕"에 의해, "파리"로 운반되어, "콩코드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날 "룩소르 신전" 입구에는 "왼쪽의 오벨리스크"만이 외롭게 현장을 지키고 있다

 현대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워싱턴 기념비)

1884년, "워싱턴 DC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169m로, 전망대ㆍ내부계단ㆍ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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