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ㆍ대규모 연구기관ㆍ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최고의 연구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원"을 뛰어넘으려고, "브루케이온 지역"에 세워졌다. BC 3C 건립 이후,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BC 30년까지, 지식ㆍ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도서관의 모토는 " 전 세계의 모든 책과 문헌들을 수집하자"였다. (대략 70만권 이상의 책 보관)
1. 알렉산드리아 도서관ㆍ박물관
"무세이움(Musaeumㆍ그리스 사원ㆍ학예관ㆍMuseum과 관련)"의 부속ㆍ근처에 건립. "무세이온"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말고도, 천문학ㆍ해부학 등을 연구하는 공간을 갖추었고,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동물들을 모아놓은 "동물원"도 있었다.
① 설 립 : BC 3C 초,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창설 (알렉산더 대왕의 지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BC 323~283) 또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BC 283~246) 때 창설) 본관은 "궁전" 경내의 "브루케이움"이라고 하는 구역에 설치ㆍBC 235년 경,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사라피스 신전"에 보조적인 "딸 도서관"을 설립
② 파 괴
도서관ㆍ박물관- 3C 말, "아우렐리우스" 때, 발생한 "내전"으로 파괴 / 딸 도서관- 391년,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파괴 / "플루타르코스(46~120)"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8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실수로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카이사르"는 적들이 바다를 통한 그의 통신 능력을 막으려하자, 자신의 배에 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반면, "에드워드 기븐"은 391년, "세라페이온"의 파괴를 지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빌로"가 도서관의 파괴 역시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세라페이온 :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과 올림포스 신앙의 하데스 신을 절충한 세라피스 신의 신전)
③ 디미트리오스 팔레레오스ㆍ칼리마코스
• 조직 담당자 : 디미트리오스 팔레레오스 (아테네에서 도서관 사업 경험자) • 사서장(전국적인 문헌목록의 편찬사업): 칼리마코스 (최초의 그리스 문헌 목록 "피나케스"의 저자) 이 목록은 오늘날에는 소실되었지만, "비잔틴 시대"까지 "그리스 문헌"의 교과서적인 참조자료로 이용
분과별로 조직되었고, "관장사제(館長司祭)"가 총감독했으며, 직원들의 급료는 "왕"이 지급했다. 모든 "그리스 문헌"뿐만 아니라, "지중해ㆍ중동ㆍ인도" 등지의 타언어 문헌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까지, "국제적 도서관"을 세우고자 했던 이상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스 문헌"이 주류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나와 있는 번역본은 "70인 역 성서"가 유일하다.
④ 문서의 양ㆍ현재
• 문서 양 : 얼마나 많은 문서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문서들은 "파피루스 종이"로 되어 있었다. BC 3C 이후, "양피지"로 만든 고사본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양피지 문서를 만들지 않았다. 이는 도서관과 파피루스 무역 간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 2002년 :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서 개관
2. 다른 2개의 도서관 : 세라페이온 신전 도서관ㆍ세사리온 신전 도서관
사실 "알렉산드리아"에는 "대 도서관" 말고도 최소 2개의 다른 도서관이 존재했다. "알렉산드리아"는 1C~ 6C까지 세계의 과학ㆍ문학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는데, 이는 "대 도서관"이 파괴된 이후에도, 이 2개 도서관에 보관된 수많은 책과 참고문헌들에 의해 가능했다. "대 도서관"이 왕족ㆍ일부 학자들만 이용 가능했던 반면에, 이 두 도서관은 대중에게 열려 있었다. 또한 "대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에 의해서 세워졌고, 궁전ㆍ왕가의 정원 근처의 "브루키온 거주자"만 이용이 가능했던 반면,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세라페이온 신전ㆍ딸 도서관"을 "라코티스"의 대중들을 위해 설립했다.
3. 도서관 내부ㆍ"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
"신간 도서"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서고 근처"에 지어졌거나, "항구"로부터의 접근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정확한 설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정원ㆍ공동식사 실ㆍ독서실ㆍ강의실ㆍ집회실 등을 포함했다. "회랑"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을 보관하는 책장들로 채워졌으며, 책장의 벽에는 "영혼의 안식처"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과거 자료 수집하는 것ㆍ여행ㆍ숙박ㆍ급여를 제공해 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국제학자들에게 "학문의 쉼터"를 제공해 주었다. "수학ㆍ공학ㆍ생리학ㆍ지리학ㆍ의약"의 아버지라 불러지던 당시 사상가들은 여기서 연구ㆍ실험을 진행하고 기록을 남겼다.
"연구기관"으로써의 "수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자연과학" 등 많은 과목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보유하게 되었고, 검증된 책들은 학자들에 의해 정확한 "복사본"으로 만들어졌고, 세계의 부유한 "책 애호가들"이 이러한 책들을 사들임에 따라, "도서관의 부"는 증대되었다.
4. 도서관의 역할
"도서관의 기능과 학문 연구의 대학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점에서, "국립학술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연과학 연구"의 중심지였고, "에우리피데스ㆍ소포클레스ㆍ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 책의 원본을 상당수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학자들에게 국가차원에서 "연구실"을 제공하고,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수학ㆍ천문학ㆍ기하학ㆍ의학ㆍ응용과학" 등의 분야에서 "당시 학계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주변의 "고대 희랍세계 문화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 문헌 수집/취합ㆍ배열 주석" 등은 물론 "주변 국가들ㆍ지중해ㆍ중동ㆍ인도" 등지의 모든 언어를 "그리스 어"로 번역하여 보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이 도서관이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5. 연구를 했던 주요 인물
① 에우클레이데스 ( ? ~ ? ) 으뜸가는 수학자ㆍ기하학 원본ㆍ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BC 300년 경) ② 유클리드 (BC 325~ 265) 그리스 수학자ㆍ기하학 원론ㆍ유클리드 기하학ㆍ유클리드 호제법ㆍ유클리드 공간 ③ 에라토스테네스 (BC 275~ 194) 그리스 수학자ㆍ에라토스테네스의 체ㆍ지구의 둘레(원주) 최초 측정
④ 아르키메데스 (BC 287?~ 212?) 그리스 수학자ㆍ부력의 원리ㆍ원주율 연구ㆍ지렛대 원리 / "뉴턴ㆍ가우스" 등과 함께 역사상 위대한 "3대 과학자"로 여겨진다. "부력의 원리"를 알게 된 그는 너무 기뻐서 옷 입는 것도 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유레카(Eurekaㆍ알아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⑤ 헤로필로스 (BC 335?~ 280?) 알렉산드리아 의사ㆍ해부학의 아버지ㆍ인간 시체를 해부 ⑥ 에라시스트라토스 ( ? ~ ? ) 그리스 의사ㆍ해부학자ㆍ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BC 250년 경) ⑦ 아리스타르코스 (BC 310?~ 230) 그리스 천문학자ㆍ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최초 주장
6. 도서관 파괴 4가지 가설
BC 48년 : "알렉산드리아 전쟁(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방화 • 3C 경 :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전쟁에 의한 파괴ㆍ"콘스탄티노플"로 이관 • 391년 : 콥트 주교 "테오도시우스"의 법령→ "세라페이온"의 파괴 • 642년 이후 : "무슬림"의 "알렉산드리아" 점령
① BC 48년 : "알렉산드리아 전쟁(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방화
역사가인 "플루타르크ㆍ겔리우스ㆍ암미아누스ㆍ마리켈리누스ㆍ오로시우스" 등은 모두 BC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였다. 1C 말~ 2C 초에 기록된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배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적들이 바다를 통한 그의 통신 능력을 막으려하자, 자신의 배를 태워버렸다. 이 불길은 부두를 태우고 나서, 번지고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윌리엄 셔프"는 BC 48년, "카이사르ㆍ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전투에서 처음에 "불 바람"이 일어났고, 부두를 불태운 후, "도서관에 불이 옮아붙어 파괴됐다"고 기록했다.
2C 무렵, "로마의 역사가 겔리우스"는 그의 저서 "Attic Nights"에서 "카이사르 군사"가 부두에 불을 놓는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전했다. 4C 무렵,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비기독교도 역사가)ㆍ오로시우스(기독교도 역사가)"는 도서관이 카이사르의 방화에 의해서 불태워졌다고 기록했다. "세네카(BC 4~ AD 65ㆍ로마 스토아철학자)"는 "도서관의 40,000여 개의 책들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했다. BC 40~30,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제국 동쪽"을 점령하고 나서, "페르가몬"에 위치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도서관을 약탈했다. 그리고는 "카이사르의 방화"에 의해, 불태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을 대체하기 위해, 약탈한 책들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했다.
"테오도르 브리토스"는 "방화"에 의한 피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37개의 군단을 태운 로마 갤리선은 소아시아를 떠나, 마침내 이집트 연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역풍에 의해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할 수 없었다. 로키아스에 정박한 이집트 함대 역시 로마군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이집트 함대는 모두 불탔고, 불길은 바람을 타고 번져 항구와 함께 주위의 건물들까지 함께 태웠고 수 천 개의 책이 보관된 건물까지 불태웠다.
역사가들은 실수로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태워진 것으로 보았지만, 사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항구와 먼 곳에 있었다. 이 불길에 의한 피해 중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조선소, 무기고, 그리고 곡물과 책을 보관한 창고가 불탄 것이었다. 이 때 거의 40,000여개의 책이 불탔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는 별개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를 비롯한 많은 나라로 수출된 내역이 적혀있는 출납부와 원장이 함께 소실되었다."
② 3C 경 :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전쟁에 의한 파괴ㆍ"콘스탄티노플"로 이관
"카이사르의 방화"보다는 다른 원인에 의해서, 도서관이 불탔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원인으로 3C 후반에 있었던 "제노비아(팔미라의 여왕)ㆍ아우렐리아누스(로마황제)"의 전쟁이 지목되고 있다.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기록들이 유실된 시기는, "제노비아(팔미라의 여왕)"의 반란을 억압하려던 "아우렐리아누스(로마황제)"가 도시를 점령했을 때로 보인다. 전투가 이 "도서관"이 위치한 곳에서 일어나서, "도서관"이 많은 피해를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세라페이온 신전 도서관"은 파괴를 면했지만, 4C 경, 보관하고 있던 일부의 기록들이 새로운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③ 391년 : 콥트 주교 "테오도시우스"의 법령→ "세라페이온"의 파괴
다른 원인으로, 391년 콥트 주교 "테오도시우스"는 "포고령"을 내려, "로마"의 새로운 국교가 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행위를 "이교"라 칭하고, 불법으로 간주했다. "무세이온ㆍ세라페이온"에 있는 모든 도서관은 "이교도 신전" 구역에 있었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국교"로 정해지고 나서는, 이러한 이유로 보호받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신전들"은 391년, "데오빌로"에 의해, 모두 문을 닫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는 440년, 그의 책 "Historia Ecclesiastica"의 15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신전들"이 파괴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빌로의 요청으로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이교도의 신전들의 파괴를 명했고, 데오빌로에게 이 집행을 맡겼다. 데오빌로는 이교 의 의식을 비방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총동원했다. 그는 먼저 미스리움을 제거했고, 그들의 피의 의식을 대중에 공개했다. 그 다음엔 그는 세라페이온을 파괴했고, 역시 터무니없는 미신을 공개했다. 또 남성 생식력의 신 프리아포스의 남근을 광장의 중앙에 전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의 통치자와 이집트 군의 총사령관은 데오빌로를 도와 이교의 신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세라페이온"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일부였지만, 이것이 파괴된 당시 얼마나 많은 책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기록은 도서관이나, 그 내용물에 대해 언급이 없었고, 다만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더 이전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기록"에 의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세라페이온"에 보관되어 있었는지에 상관없이, 4C 말 무렵에는 하나의 책도 보관하지 않았다.
④ 642년 이후 : "무슬림"의 "알렉산드리아" 점령
642년, "알렉산드리아"는 "아무르 이븐 알 아스"의 "무슬림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바그다드의 압드 알 라티프"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카리프 오마르"의 명령을 받은 "아무르"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사건에 관한 가장 긴 기록은 "아부 알 파라즈"로도 알려진 "시리아"의 기독교 작가 "바르 헤브라에우스(1266~1286)가 남겼는데, "Chronicum Syriacum"의 초록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에 내용을 추가했다. 그의 책 "Historia Compendiosa Dynastiarum"에서 "존 그라마티쿠스"가 "아무르"에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을 가져와달라고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아무르"가 "오마르"에게 물어보자, "오마르"는 이렇게 답했다. "만약 그 책들이 코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린 그 책들이 필요가 없고, 만약 그 책들이 코란에 어긋난다면 모두 없애버려라."
"이븐 할둔(1332~1406)"의 기록에 따르면, "오마르"가 "페르시아의 책"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븐 할둔 : 최초로 비종교적인 역사철학을 발전시킨 아라비아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ㆍ중세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가ㆍ사상가ㆍ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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