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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4대 황실 정원 : 이화원ㆍ승덕 피서산장ㆍ소주 졸정원ㆍ소주 류원

by 당대 제일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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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황실 정원"은 "이화원 (頤和園)ㆍ승덕 피서산장 (避暑山莊)ㆍ소주 졸정원 (拙政園)ㆍ소주 류원 (留園)"을 말한다.

 

1. 4대 황실 정원

① 베이징 이화원 (頤和園ㆍ청의원(淸漪園)→ 이화원): 정원ㆍ공원ㆍ궁전ㆍ서태후의 여름 피서지

② 승덕 피서산장 (避暑山莊ㆍ열하(熱河ㆍ옛 지명)행궁ㆍ이궁(離宮)ㆍ피서별궁) :  "조선의 연암 박지원"도 이곳에서 "건륭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③ 소주 졸정원 (拙政園): "명나라" 때, 재상 "왕헌신 (王獻臣ㆍ어사)"의 개인 정원ㆍ사택

④ 소주 류원 (留園) : "명나라" 때, 관리였던 "서시태 (徐泰时)"의 개인 정원ㆍ사택

2. 북경 (베이징) 이화원 (頤和園ㆍ청의원(淸漪園)→ 이화원)

청나라 황실 정원ㆍ공원ㆍ궁전ㆍ서태후의 여름 피서지

1888, "서태후"137년간 불리던 "청의원(淸漪園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명명)"이라는 명칭을 "순치(順治)와 자비의 뜻"이 담겨있는 "이화원"으로 고쳤다.

• 위 치 : 북경(베이징) 서북부의 하이뎬 구         • 건 축 : 1750~ 1764년 (14년 간)          크 기 : 2.9 km2 (곤명호 2.2 km2)75%가 호수로 구성          특 징 :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

① 곤명호 (昆明湖ㆍ쿤밍후)

개축→ "청의원(淸漪園)"이라고 명명ㆍ1750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사람을 동원하여, "시후(西湖)"를 확대하는 공사를 하여, 커다란 물 저장고를 만든 후, 이름을 "곤명호(昆明湖)"라고 바꾸었다.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 데, 사용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건축ㆍ중앙에는 "연꽃", 주변에는 "버드나무"로 되어있고, "동ㆍ남ㆍ북"으로는 "궁정 벽"을 쌓지 못하게 하여, 하나의 연결된 "숲"을 이룬다.

② 만수산 (萬壽山ㆍ완쑈우 산) : 높이 60m

"건륭제 (乾隆帝)"가 어머니 환갑에 지은 큰 "스먀오(寺廟ㆍ사묘)"였다.

③ 역 사

 1153 : "금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됨

• 1264 : "원나라" 때, "완서우 산ㆍ쿤밍 호"를 만듦.  "원나라" 때, "베이징" 서남 지역은 강이 범람하여, 수재가 많았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1264년 "원 세조"가 천연 호수를 물 저장고로 만들어, 수위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하였고, 호수 옆에 여러 개의 "스먀오(寺廟ㆍ사묘)"도 건설하여, "정원"으로 만들었다. "명대"에 이르러, 이 천연호수를 "시후(西湖)"라고 고쳤으며, 당시 "베이징"에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호수로 되었고, 주위에는 여러 개의 건물들이 들어서, "정원"을 이루었다.

• 1750~1764 : "건륭제(청나라)"가 개축→ "청의원(淸漪園)"이라고 명명 → 1860 : "2차 아편 전쟁", "-프 연합군"에 의해, 모조리 약탈당하고, 불태워짐

• 1888 : "서태후(청나라)"가 "해군 예산(30만 은) 유용하여 재건→ "이화원(頤和園)"이라고 명명. 1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현재의 "이화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1900 : "의화단 운동" 시, "서양 8개국 연합군"에 의해 공격당함 → 1902 : "서태후"가 다시 파괴된 부분을 재건

이화원

3. 승덕 피서산장 (避暑山莊ㆍ열하(熱河ㆍ옛 지명)행궁ㆍ이궁(離宮)ㆍ피서별궁)

제일 큰 황실 정원ㆍ"베이징" 이외의 "제2의 정치 중심"ㆍ여름에는 황제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도 이곳에서 "건륭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산장 정궁의 오문"에 걸려있는 "피서산장"이라는 현판은 "강희제"가 직접 쓴 것이다.  "청 황제"는 "선양(당시 봉천)"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었지만, 황제의 행차는 "청더"에 머물렀다.  "청더"는 계절과 날씨가 좋고, 온천도 있으며, 자연이 수려하며, 풍경이 아름답다.

매년 4~9월 "베이징"의 더위를 피해, "청나라 전기 황제"가 피서지 겸 정무를 보는 곳이었다.  또 신하들을 접견해, "정사(政事)"를 처리하기도 하는 "다용도 별장"이었다.  "청나라 전기 황제"의 여름 집무지로, 정치ㆍ군사ㆍ외교 등의 국가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이런 이유로 "베이징" 이외의 "제2의 정치 중심"로 불렸다.

"중국 도법(道家)"에 하늘아래,  "36개 동굴ㆍ72개의 복지(福地)"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에 있다.  "강희제" 때, "36개의 경치구(景觀)"를 건설하고, "건륭제" 때, "36개의 경치구"를 더 건설하여, "72개"의 숫자를 이룬다. 역시 신선 같은 "불로장수"의 생활을 원했던 같다.

• 위 치 : 중국 허베이 성, 승덕시(承德市ㆍ청더시)ㆍ옛 지명- 열하(熱河)        • 건 축 : 1703~ 1793년 (90년 간)         크 기 : 5.9 km2 (주위 성벽(담장) 10 km)이화원(2)북해공원(8)         특 징 : "강남지방"의 훌륭한 정원명승을 참고해 지어졌다고 한다 쑤저우(사자림ㆍ한산사)ㆍ항저우(무릉사ㆍ육화탑)ㆍ진강(금산정)ㆍ가흥(연우루)는 모방하기 좋은 교과서였다. "내몽골ㆍ대흥안령" 등으로부터 소나무를 가져와 사용했다고 한다. 원내에는 "사고전서(전 3,503부ㆍ79,337권)"가 소장되어 있다.

①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ㆍ26권)"

조선을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여, "건륭제"를 만나는 과정을 적은 기행문이다. 1780년(정조4), 북학파 박지원(44세)에 삼종형(8촌 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ㆍ칠순)" 사절로 "북경(연경)"에 갈 때, 군관자제 신분(수행 비서역)으로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 (단국대 친필본이 소장)

"조선사신단"은 "열하(熱河)"에서 1780년 음력 08.09~14일(6일간) 머무는데, 이에 대한 박지원의 기록이 "열하일기 제6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 담겨 있고, 특히 "피서산장"에 관한 기록은 마지막권인 "26권 피서록(避署錄)"에 잘 나타난다.  당시의 "연암"의 행적은 한양→ 압록강→ 박천ㆍ의주ㆍ풍성ㆍ요양ㆍ거류하ㆍ북진ㆍ산해관ㆍ옥전ㆍ 연경→ 목적지 : 열하(熱河ㆍ승덕)까지 장장 4개월간의 빡빡한 일정이었다.

② 여정문 (麗正門ㆍ피서산장 정문)의 이름 유래

"해와 달이 하늘에 있기에 밝듯이, 황제가 앉을 자리는 반듯해야, 광명정대하게 천하를 통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③ 건립 배경

"건륭제"는 "피서산장"에서 사치한 생활을 했다. 그는 매일 "피서산장" 호수의 연꽃잎에 달린 "이슬을 차(茶)로 마셨다"고 한다. 특히 과일인 "푸젠성(福建)의 리츠(여지(荔枝))"를 좋아하여 "리츠"를 꿀에 담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운송하도록 했다.

1703년, "강희제"가 건설을 시작, 90년간의 시간을 거쳐, 1793년에 완성되었다.  북방시찰 도중, "승덕(承德)"의 여러 가지 자연 특징이 맘에 들어 정원을 건설하기로 했다.  즉, 분지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중심으로, 산들이 예배를 하는 모양으로 "황제"로서의 최고 통치자 위엄을 과시할 수 있었다.  또 여름날씨가 서늘하여, 20°를 넘지 않았고, 풍경이 아름다웠다.  "베이징"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정사(政事)를 보는데 편리했다.  "승덕"은 당시 편벽한 곳이어서 정원을 건설해도,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1722년, "강희제"는 어린 손자 "건륭제"를 특별히 총애하여, "피서산장의 만학송풍(萬壑松風)"을 "건륭제"에게 선물하고, 아침이면 자기 무릎에 앉히고, 나랏일을 보았다.  "건륭제"가 왕위를 계승 한 후, "피서산장에 기은당(紀恩堂)"을 지어, "강희제"가 사용했던 활ㆍ말안장 등을 전시해 놓고, "강희제"를 기념했다.

1780년, "건륭제"는 "피서산장"에서 70세 생일인 "만수제(萬壽節)"를 열었는데, 수많은 소수민족 대표와 외국사절들이 이곳을 찾아, "황제"를 알현하는 경축행사에 참가했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수많은 진귀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④ 역 사

 1703 : "강희제"는 2개의 별궁을 짓기로 결정한다. "강희제"는 매년 입추 이후, "목란위장"을 찾아, 20여 일에 걸쳐 사냥을 했으며, "피서산장"으로 돌아와 쉬었다.  "피서산장"은 그가 유약하지 않도록, 사냥을 함으로 문ㆍ무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소였다.  또한 피서산장에서 북방의 소수민족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열하행궁"과 주변에 있는 사당에서는 소수민족의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였다.

 1741 :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때, 대규모 정비가 이루어져, 준공으로부터 87년이 지난 1790년에 완성하고, "외팔묘"를 궁 밖에 짓기 시작한다.

 1793 : "영국 사절단""피서산장"에 있던 "건륭제"를 만나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상업통상구" 설립을 위하여, 방문한 "영국 사절단" "텐진닝보저우산" 등을 개항할 것과, "광저우" 부근의 일부 토지를 거류지로 할양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건륭제"는 모두 거절하였다 "건륭제"는 "영국 대사"를 접견했고, "영국 대사"는 두 나라의 문화적 예법 차이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던 "청나라 예법" 대신 한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 1860 : "제2차 아편전쟁" 때,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에 난입하여, "함풍제"는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이듬해 "피서산장"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권력을 잡은 "서태후"는 "함풍제" 때 시작된 보수공사를 모두 중지하라고 명하였고, "피서산장" 대신에 "이화원"을 보수하였다  1933 : "일본"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만주국"을 세웠으며, 이곳의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1961 : "중화인민공화국""전국 중점 문물보호 단위"로 선정하였다.

4. 소주 졸정원 (拙政園)

"명나라" 때, 재상 "왕헌신 (王獻臣ㆍ어사)"의 개인 정원ㆍ사택ㆍ"동ㆍ중ㆍ서원" 3개의 구역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ㆍ"소주"에서 가장 큰 정원 중의 하나"왕헌신"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이곳을 지었다.  1522년, 관직에서 추방되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정한 정치의 허망함을 비판하며 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쫓겨난 그가 농사를 지으며, 정원을 꾸미고 말년을 지냈다하여, 그 이름을 "졸정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졸정원"이라는 이름도 그가 "한거부(閑居賦)"라는 시 중에서 따온 것이다. "졸정원"이란 "반악(潘岳ㆍ서진(西晉)학자)의 "한거부(閑居賦)"에 나오는 말로, "차역졸자지위정야(此亦拙者之爲政也)ㆍ졸자(拙者)가 정치를 하는구나."는 구절에서 따왔다.  "졸저(拙著)ㆍ졸고(拙稿)"등의 경우와 같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경우에, "졸(拙)"이란 말을 쓰는데, 따라서,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낮춰 부르는 의미이다.

"소주 원림" 대표자 : 졸정원ㆍ류원 (소주 4대 명원 : 졸정원ㆍ류원ㆍ사자림ㆍ창랑정) 정원 안은 "동ㆍ중ㆍ서원"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변화가 풍부하다.  물 주변으로 "누각ㆍ정자"가 있어, 대부분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평범함이 묻어난다.  부지가 넓어, 다 못 보더라도 "북사탑"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중간 정원"까지는 산책해야한다.

• 위 치 : 강남 소주시(蘇州ㆍSuzhou) 평강구ㆍ"항주"와 더불어, 강남 문화의 중심지        • 건 축 : 1510(명나라 정덕제5)~ 1526년 (16년 간)         크 기 : 51,950 m²         특 징 : "소주""물의 도시"라는 것을 말하듯 부지의, 60% 정도가 연못

① 원향당 (遠香堂)

"연꽃의 향기가 퍼져 있다"는 것에서 이름이 붙였다.  여기서 바라보는 "졸정원"의 풍취도 일품이다.  소설 "홍루몽"의 배경인 "대관원의 모델"이라고도 한다.

② 원래 "정원" 형식은 "개인 정원ㆍ황가식 정원ㆍ절가식 정원"으로 나뉜다.

"강남 정원"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개인ㆍ절가식" 정원이 주를 이루고, "북방 정원"은 대규모의 "황가식 정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개인 정원"의 대표는 "졸정원"이고, "황가식"은 "이화원", "절가식"은 "한산사"를 꼽는다고 한다.

③ 역 사

"당나라" 때, "육귀몽(陸龜蒙)"의 개인 사저였고, "원나라" 때는 "다홍사"라는 절이 되었다. 1509 : "명나라" 때, "왕헌신(王獻臣)"이 절을 사들여, 개인 정원으로 바꾸었다.  "명나라" 때, "문징명(文徵明ㆍ왕헌신 친구ㆍ유명한 화가)이 전체적인 개조의 디자인을 맡았고, 1526년에 완공했으며, 1526년에 "졸정원"에 대한 글인 "왕씨졸정기(王氏拙政記)"를, 1533년엔 "졸정원도영(拙政園圖詠)"이란 그림도 남겼다. "왕헌신" 사후, 아들이 도박으로 "졸정원"을 잃었고, 그 후 계속 주인이 바뀌었다.

1631 : 정원이 "동ㆍ중ㆍ서"로 쪼개어 팔리기도 했으며, 여러 용도로 변용되고 방치되었다   1949 : 3개 정원()이 하나로 합쳐지고, 1952년에 복원되었다.

졸정원

5. 소주 류원 (留園)

"명나라" 때, 관리였던 "서시태(徐泰时)"의 개인 정원ㆍ사택ㆍ4개의 구역(중부ㆍ동부ㆍ서부ㆍ북부)

처음에는 "동원(東園)"이라고 불리었으나, 몇 번의 개축을 거쳐, "청 대"에 "유원(留園)"이라 하였다.  "류원"은 "소주"에 있는 "원림"의 장점을 한데 모아서 탄생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무한한 변화를 창조"하는 "원림 특징에 가장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 "소주 원림" 대표자 : 졸정원ㆍ류원 (소주 4대 명원 : 졸정원ㆍ류원ㆍ사자림ㆍ창랑정)         위 치 : 강남 소주시(蘇州Suzhou) 금창구"항주"와 더불어, 강남 문화의 중심지         • 건 축 : 1525(명나라 가정(嘉靖))~ 1593(58년 간)         • 크 기 : 30,900 m²         • 특 징 : "유원""회랑""가산"이 빼어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과 주변 조경이 그림 같다. 우람한 은행나무 3그루가 노랗게 물든 가을이 특히 환상적이다.

① 관운봉 (冠云峰) : 한 덩어리의 "태호석(太湖石)"ㆍ높이 : 6.5mㆍ무게 : 약 5ton

동원에 있는 "관운봉(冠云峰)"은 한 덩어리의 "태호석(太湖石)"으로, 높이가 6.5m, 무게가 약 5ton 정도인데, "소주 원림"에 사용된 "태호석" 중에서, 가장 큰 "호석"이며, "최고의 돌"로 평가를 받는다.

"관운봉"은 "송 대"에 한 "석농"이 "소주"에서 약 40km 떨어진 "태호변"에서 크고 작은 돌조각을 모아 조각한 후, 호수의 충적작용을 이용해, 몇 년간 완성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해 더 놀랍다.

② 특 징

"류원"은 건축예술이 뛰어나며, "누각이나 회랑"을 정교하게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화창(花窓)"이라 불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일품이다.  "중부ㆍ동부ㆍ서부ㆍ북부"의 4개 구역으로 나뉘며, 구역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각각 "산수ㆍ회랑ㆍ자연경관ㆍ전원풍경"이라는 주제가 설정되어 있다.

서원 : "주로" 토산으로 되어 있고, 산위에 단풍나무가 있다.

"유원"은 전체에 연결되어 있는 "회랑"이 약 700m에 걸쳐 있다. "회랑ㆍ가산"이 빼어나다.  전체에 연결되어 있는 "회랑"이 약 700m에 걸쳐 있는데, 긴 회랑이 "원림의 동ㆍ서ㆍ남ㆍ북"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회랑"에 "누창ㆍ화창"을 많이 내어서, 걷는 동안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변화한다. 그래서 점점 더 깊은 정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소주 원림 건축" 특색의 하나인 "화창(花窓)"이 "유원" 내의 "회랑"에 각기 다른 모양으로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창문은 일종의 장식품일 뿐 아니라, 창문에 비치는 정원의 풍경들을 걸을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그림으로 연출하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③ 역 사

• 1525 : "명나라" 때, 관리였던 "서시태(徐泰时)"의 개인 정원으로 건립 시작 → 1593 : 완공

• 1823 : "청나라" 때, 관리였던 "유소"가 이어받아, "한벽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대중에 공개되었다 → 1876 : "성강"이 정원을 보수하며, "유원"이라 개명하였다 → 태평천국의 난 (1850~1864)중일전쟁(1937~1945)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 1954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주도로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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