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측천무후 (당나라ㆍ則天武后ㆍ무측천(武則天)ㆍ624?~ 705ㆍ향년 81세)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ㆍ"무주(武周)"의 초대 황제(당나라 7대 황제)ㆍ최초의 "여성 태상황"
중국 역사 2번째 여성 군주ㆍ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일생동안 살해한 사람(93명): 직계 가족(23명)ㆍ왕족(34명)ㆍ대신(36명) / 성욕이 넘쳐, 무려 3,000명의 "남첩"을 두고, 77세도 식지 않는 성욕을 유지하며, 미소년들ㆍ신하ㆍ심지어 길거리 고약장수까지 침대로 불러들여, 성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왜 "황제"가 되려고 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며,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ㆍ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녀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녀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 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녀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 재 위 : 655~690 (35년)ㆍ690~ 705 (15년) • 출 생 : 당나라 이주(현, 사천 광원) • 사 망 : 장안 상양궁 선거전
• 본 명 : 무조 (武照) • 별 칭 : 무미랑 (武媚娘)ㆍ무미 (武媚) • 시 호 : 측천무후여황제 (則天武后女皇帝)
• 개 명 : 무조 (武曌)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개명하였다. • 배우자 : 당나라 고종 이치 (당 태종 이세민의 9남) • 자 녀 : 4남 2녀 • 언니 : 한국부인 무씨 (측천무후에 의해 독살)
• 1남 : 의종 (이홍) 황태자→ "황후 무씨"가 독살 / 2남 : 장회태자 (이현(李賢)) 황태자→ 폐출ㆍ유배→ "구신적" 보내, 자살 유도 / 3남 : 중종 (이현(李顯)) 황제→ 처가의 정사개입→ 여릉왕으로 강등 / 4남 : 예종 (이단) 황제→ 폐출→ "황후 무씨"가 황제 / 1녀 :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황후 왕씨"를 폐출하기위해, 목 졸라 살해 / 2녀 : 태평공주ㆍ손자 : 현종ㆍ손녀 : 안락공주
① 생 애
"무조(武曌)"는 "무사확(武士彠)"의 차녀로 태어났다. "무사확(武士彠)"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양제 양광"의 "대 토목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 당시, "태원 유수 이연(李淵)"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 씨(수나라 시절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 출신)"을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武曌)"이다.
② 후궁 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 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다.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인 "재인(才人: 정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
어느 날 "당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ㆍ철추ㆍ비수 단 3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 버리겠습니다."고 답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조는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무조의 간청으로 9남인 "이치"가 "이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한다.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고종)"은 분향 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고종)"에게 몰래 "여의낭(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③ 재 입궁과 암투
무조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고종"의 황후인 "왕 씨"의 도움이 컸다. "황후 왕 씨"는 당시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고종"이 무조와 밀회한 사실을 알고,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황후 왕 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고종"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황후 왕씨"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 앞에서는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황후 왕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고종" 앞에서 여러 번 그녀를 칭찬하였다. "고종"이 무조를 "소의"에 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황후 왕씨"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무조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가 되었다.
무조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고종"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고,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황궁 안에서 "왕씨"나 그 일족이 오만한 태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기회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았고, "왕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조가 딸을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황후 왕씨"는 기뻐하며, 무조의 처소를 찾아와 딸을 보고 갔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 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 때, "고종"이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여, 이에 "고종"은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소의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영휘 6년(655년) 10.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폐서인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 또한 "폐서인 왕씨"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과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④ 비정한 어머니 "황후 무씨"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남편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살시키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 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656년, "황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녀의 전횡을 보다 못한 "고종"이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황후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황후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황후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녀는 대신들을 폐 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 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황후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종"에게 "건언 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고종"은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고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은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고종"과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도 신임이 두터웠지만, "황후 무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황후 무씨"는 675년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고종"과 함께 "이홍"과 식사를 하였고, "이홍"은 그 자리에서 독살 당하였다. 그 후로,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후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고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 당하였고, "고종"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였으나, 681년 수도에서 2,300리 떨어진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퍼져 "황후 무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684년 "황후 무씨"는 조사를 한다는 구실로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 아들을 자살하게 하였고, 조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구신적"이 "이현"을 죽였다고 덮어씌웠다. "황후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은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황후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⑤ 실권 장악, 정사 관장
이때부터, "황후 무씨"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황후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0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황후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황후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황후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조카인 "무승사(649~698)"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고 씌어진 돌을 가져와 "황후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황후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⑥ 유일무이한 여 황제
690.09.09일 "중양절"을 기해, "황후 무씨"는 "예종 이단"을 황제에서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도읍을 "장안"에서 "신도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ㆍ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무씨"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악독한 대신들을 임명하여, "당 황조"의 종친과 구 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무씨"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의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는데, 이들이 "적인걸","장간지"등이다.
또한, 과거를 "회시ㆍ공사ㆍ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무씨"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까지도 했다.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기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그러나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한 동시에, 토지와 조세제도 붕괴로 인한 "자작농" 쇠퇴의 시작을 알리면서, 다양한 사회문제가 야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무씨"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⑦ 여걸의 말년과 죽음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李顯, 중종, 삼남)"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무씨"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 달라고 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명하였다. 705년 음력 11.02일, 거의 반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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