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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3대 악녀 ② 여태후 (전한ㆍ呂太后ㆍ여치ㆍBC 241~180ㆍ61세)

by 당대 제일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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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劉邦ㆍ한고조(漢 高祖)ㆍBC 247(256?)~195ㆍ52세(61세)"이 총애한 미녀 "척희 (후에 척부인)"은 "조왕"이 된 "여의"를 낳았고, "유방"은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유방"이 죽고, "혜제 유영 (여태후 아들)"이 즉위하면서, "여치 (여태후ㆍ呂太后ㆍBC 241~180ㆍ61세)"는 "황태후"로 후견을 맡았지만,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치는 "조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유여의"의 모비인 "척부인"의 손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었으며, 약을 이용하여 귀를 멀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여,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고,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적고 있다.

 

1. 여태후여후 (전한시대폐후 여씨(廢后 呂氏)여치BC 241~ 180향년 61)

전한 황후ㆍ전한 "고조(유방- 한고조)"의 황후ㆍ전한 "혜제"의 어머니ㆍ"한신" 척살

"중국 삼대 악녀""당의 측천무후청의 서태후"와 동급으로 취급인간 돼지(척부인 사건)중국사상 최초 정식 황후중국 최초 "황태후태황태후"이다. 남편인 "고조(유방)"의 사후, "황태후ㆍ태황태후"가 되어, "여후ㆍ여태후" 등으로 불린다.

재 위 : BC 188~ 180 (8)         사 망 : 중국 장안         시 호 : 고황후 (高皇后, 그러나 광무제가 시호박탈)   

 본 명 : 여치 (呂雉)         배우자 : 전한 태조 고제 (유방) 자 녀 : 11- 전한 혜제, 노원공주

"여태후"가 전횡하던 시대에는 황족이나 공신들이 살해당하는 등 정계에서는 피를 부르는 사건이 속되었던 시대였지만, "여태후"가 대외 원정을 위시한 대사업을 급격히 줄여, 국민생활안정에 진력하였으므로, 시정은 매우 평화롭고 안정되었다특히 원정하느라고 "고조 유방" 부재한 사이에 건국공신이자 고조의 충복인 "한신"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허리를 끊어 살해한 일은 천하가 재 분열되어, 전쟁하는 일을 막았다.

"문제경제"에 의한 "문경의 치무제 시대"의 대 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의 정치상경제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그러나 "후한 동란"때에 "적미"의 군대는 "전한 황제"들의 묘를 도굴하여, 안치되었던 "여태후"체를 훼손하였다"광무제""여태후"에게서 "황후 지위"와 시호인 "고황후 칭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인 """유방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하여, 시호 "고황후"를 추증하였다.

생 애

"산둥성""단부"의 유력자인 여공의 딸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후에 당시 "패현 사수"의 정장이던 "유방"에게 시집가고, 여동생인 "여수(呂須)""번쾌(樊噲)"에게 시집갔다젊었을 때의 "유방"은 별볼일 없는 하급 관리였으나, "여치"의 아버지는 그가 걸물임을 간파하고 딸을 시집보냈던 것이었다.

번 쾌 (樊噲, ? ~ BC 189): 중국의 전한 초기의 무장으로, 한 고조와 같은 "패현 사람"이며, 작위는 무양후(舞陽侯). 시호 무후(武侯 고조의 장인인 "여문"의 둘째 딸과 결혼해, 고조와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항우"와 비교될 만큼 괴력의 소유자로, 유방의 거병 이후 유방을 따라 무장이 되고, 선봉에 서서 수많은 공을 세운다 "유방"이 즉위한 뒤 "좌승상","상국"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다 공신서열 5번째, "무양후"에 봉해지고, 식읍 5000호를 하사받았다.

"()"의 혼란기에 "한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패현"에서 시아버지인 "유태공"이나 아이들과 같이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시아버지와 농사를 도와 아이들을 키웠지만, "팽성전투"에서 "유방""항우"에게 생포되었을 때에, "유태공"과 같이 "초나라" 진영에 인질로 잡혔다"혜제""노원공주"는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도망하던 중에, "유방""항우 "군대의 추격에서 안전히 벗어나고자, "혜제""노원공주"를 버렸다.

"한전""유방"의 지배 하에 있던 "한신"의 주도로, ""의 진영에 모인 각국을 대상으로 한 "와해 공작"과 평정이 이루어졌고, "유태공""여치"의 신병 해방이 초점화되었다전세는 "항우"에게 유리하였으나, 기원전 203년에 들어서서는 "와해 공작"이 성공하여, 형세는 역전되었다궁지에 빠진 "항우""유방"과 강화하였고, "여치""유태공"과 함께 "유방" 곁으로 복귀하였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2년에 "유방""항우"를 멸망시키고, "한조"를 열어 "황제(고조)"가 되고, "여치" "황후(여후)"가 된다아직 정치 상황은 "유방"이 스스로 반란을 토벌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하였고, 궁중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암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남편이 원정으로 부재한 중에 "여후""한신"을 반란을 시도하였다고 모함하여 살해하고, 자신의 친정인 "여씨" 일족과 "중신 장량"에게 도움 받아, 황태자가 된 "유영" 지위를 안정화하려고 진력했다.

인간 돼지 (여태후의 전횡)

"고조"가 죽고, "혜제 유영"이 즉위하면서, "여치""황태후"로 후견을 맡았지만,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치는 "조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유여의"의 모비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었으며, 약을 이용하여 귀를 멀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여,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고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적고 있다"여치""유방"이 라이벌인 "항우"와 세력을 겨룰 때에는 "항우"의 인질로서 오랫동안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기도 하면서,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의 시조가 되기까지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여자로서 가장 속을 썩인 것은 "유방"이 천하를 차지하고 나서부터였다"유방"이 많은 미녀를 총애하여 아내를 돌보지 않게 되었는데, 특히 만년의 그가 총애한 이는 "정도"라는 지역출신인 날씬한 미녀 "척희(후에 척부인)"이었.

"척부인"은 억센 "여태후"의 성격과는 달리 애교가 많고, 살가운 성격으로 "고조""척 부인"을 매우 총애하였다고 전해진다"여태후"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도성에 머물러야 했고, 어디를 가든 그녀를 꼭 데리고 다녔으며, 중요한 행차에는 항상 "척부인""유방(한고조)"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척부인""조왕"이 된 "여의"를 낳는다나중에는 "여태후"가 낳은 "황태자 혜제"를 폐하고, 그녀의 아들인 "여의"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까지 하였으나, 가까스로 중신들의 반대에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여태후의 분노는 "유방"이 죽은 후에 폭발하게 된다

"여태후"가 낳은 "효혜제"는 사람 됨됨이가 너무 착하고, 우유부단 했던 걸로 전해지는데, "유방""효혜제"의 이런 착한 심성은 왕으로서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척부인"이 낳은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여의""조왕"이 된 후에 "태자"가 될 뻔한 기회가 몇 차례 있었으나. 조정의 대신들의 간쟁과 "유후 장량"의 계책으로 "태자"가 되지 못한다그러던 중, "한고조" 124월 갑진일, "유방""장락궁"에서 승하하고, 태자였던 "효혜"가 왕이 된다.

"유방"이 죽고, 아들 "효혜"가 황제가 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서운 복수를 시작한다첫 번째로, "척부인"을 궁정에 유패하고, "조왕"에 봉해져서 "조나라" 수도인 ""에 가있는 "척부인" 아들 "유의"를 불러들였다인자한 "혜제" 태후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궁성에 도착한 "여의"를 몸소 빼돌려 침식을 같이하며 까지 보호했지만, "혜제"가 사냥을 잠시 나간 사이, "여태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왕" 독살해 버렸으며, 그런 후, "여태후""척부인"을 잡아오라 명한 후, 간수들에게 "강간"하라 명한다.

만신창이가 된 "척부인"의 사지를 잘라 몸뚱이만 남게 했으며, 눈을 뽑고, 코를 잘라 버렸으며, 약을 이용하여 귀를 멀게 하고, 벙어리로 만드는 약을 강제로 먹인 후, 돼지들이 있는 돼지우리에 가두고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하였다"척부인"은 죽을 때까지 듣지도 보지도 움직일 수도 없이 돼지우리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갔다몇 일후, "여태후"는 자신의 아들 "효혜제"에게 "척부인"을 보여주게 된다.

"효혜제"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 "척부인"이며,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통곡하더니, 이내 병을 얻어 1년이 못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효혜제"가 죽기 전 "여태후"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한 말은 "이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이 아닙니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기 때문에,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효혜제"가 죽고 난 후, 2명의 황제가 뒤이어 올라가게 되지만, 이름뿐이었고, 한나라의 정권은 "여태후"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게 된다"여치""혜제"의 아들인 "소제" 황제로 옹립하고, "태황태후"가 되었다.

여태후의 전횡

친정인 "여씨 일족""진평주발"을 위시한 한나라 건국공신에게 협력을 받아서,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꾀했지만, 이 때부터 각지에서 "제후"로 봉해져 있던 "유방""서자"들을 겁박하고 암살해 "여씨 일족"의 세력을 키웠다. 먼저 "유방"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를 짐주로 독살하려 했다.

암살 자체는 이를 눈치 챈 "혜제"가 독이 든 잔을 빼앗아 실패했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낀 "제도혜왕" "태후"에게 굴복하여 "성양군""노원공주""화장료"로 바쳤다"태후""제나라" 영토에서 "제남군낭야군"도 빼앗아, "제남군""여나라"로 고치고, 자기 조카인 "여태"를 왕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여씨""제후 왕"으로 세운 일이다그리고 "유씨 일족"을 위로한답시고, 고조의 종제 뻘인 "유택""낭야 왕"으로 삼았다.

고황후 7(기원전181), 자신에게 반발하는 뜻을 품은 "고조"7"조유왕 유우"를 장안으로 소환하고, 감금해 굶겨 죽였으며, 그리고는 "고조"6"조공왕 유회""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기고, "양나라" 조카 "여산"에게 주어, "여씨"의 나라로 만들었다.

"조나라"로 옮겨간 "조공왕"에게도 "여씨 일족"의 감시로 핍박해 자살하게 했고, "조나라"를 또 다른 조카 "여록"에게 주었으며, 한편 "고조"8"연영왕 유건"이 죽자, "유건"의 서자를 죽이고, 또 다른 조카 "여통""연나라 왕"으로 삼았다그나마 "대왕 유항"은 어머니 박씨가 "고조"의 총애를 거의 받지 못했고, "회남여왕 유장"은 어머니가 "회남여왕"을 낳고 바로 죽어, "태후"가 직접 길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또한, 자신에게 반항하는 "소제"를 살해하고, "항산왕 유홍(소제)"을 옹립한 탓에 공신들이 반발하였고, 자신들도 살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여태후" 자신도 이 일을 깨달았으므로, 조카인 "여산"에게 공신들의 동향을 보고하도록 하고, "여씨 일족"이 중앙의 병권을 잡는 중직에 기용하고서 죽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주발"을 위시한 공신들이 황족인 "제도혜왕"의 아들들 "유양유장유흥거"와 남은 "유씨 왕"들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서, "여씨 일족"을 대상으로 죄를 물어 모두 죽이고, "유방"5남인 "대왕 유항(문제)"을 새로운 황제로 책립하였다

"유홍(소제)""혜제"의 친자가 아니고, "여태후"가 어딘가에서 데리고 온 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문제의 책립 전후에 살해당했고, 여동생이자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채찍형으로 살해되었고, "여수"의 아들인 "번항"도 살해당했다이 숙청에서 여씨의 피를 이은 사람 중, "여치"의 딸인 "노원공주""장이"의 아들 "장오"사이에 태어난 "장언"만 작위가 왕에서 ""로 격하되어, 생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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