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 (漢武帝ㆍBC 156~87ㆍ전한 7대 황제)"는 역사상 "진황한무(秦皇漢武 : 진나라는 시황제ㆍ한나라는 무제)"로 잘 알려져 있는 "한 무제"는 재위 54년간("청나라의 강희ㆍ건륭"을 제외하고는 재위 년이 가장 길다) 그의 업적에 비해 많은 여인과의 이야기꺼리를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역사가에 따라, 성군인지, 폭군인지, 혼군인지 평가가 갈리는 양면적인 인물이다.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하게, 업적도, 과오도, 뚜렷한 인물이다.
1. 중국의 위대한 황제 : 시황제(진)ㆍ무제(한)ㆍ태종(당)ㆍ영락제(명)ㆍ강희제(청)
① 진시황제 (秦始皇帝ㆍBC 259~210ㆍ향년 49세): 전국 칠웅 진나라의 31대 왕ㆍ중국 최초의 황제
② 한 무제 (漢武帝ㆍBC 156~87ㆍ향년 69세): 전한의 7대 황제
③ 당 태종 이세민 (唐太宗 李世民ㆍ598~ 649년ㆍ향년 51세): 당나라의 2대 황제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 : 제세안민(濟世安民)ㆍ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중국 역대 최고 "성군"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종종 "청나라 강희제"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가 다스린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다.
④ 명 영락제 (明成祖 永樂帝ㆍ1360~1424ㆍ향년 64세): 명 왕조의 3대 황제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주변국을 굴복시켜,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였다. 이에 "베트남"이 "명"에 정복당하여, 한때 중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⑤ 청 강희제 (康熙帝ㆍ1654~1722ㆍ향년 68세): 청 제국의 4대 황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ㆍ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61년간 재위) 60년간의 통치를 통해, "청 제국"의 성장ㆍ안정에 비범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청 제국"을 근세(근대 초기)의 제국들 가운데 가장 큰 국가로 만든 것은 대체로 그의 굉장한 "지적 능력ㆍ정치적 직감ㆍ체력" 때문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 제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ㆍ자식을 둔 황제 : 황후(4명)ㆍ후비(后妃)-잉첩(媵妾)(64명)ㆍ자식(55명-아들 35ㆍ딸 20)
2. 한 무제 (漢武帝ㆍBC 156~87ㆍ전한 7대 황제)
군사적인 큰 업적도 있으나, "문제(할아버지)ㆍ경제(아버지)"가 "문경치지(文景之治ㆍ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킴)"로 이룩한 한나라의 국력을 대거 낭비하는 등 폐해도 상당히 남긴 황제이기에, 명군ㆍ폭군의 경계선상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황제이다.
• "흉노"를 토벌하고,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굵직한 업적들이 많다. "한국사"에서도 "고조선(위만 조선)"을 멸망시켰고, "남월(베트남)"도 멸망시켰다.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관료체제를 완비하였고, "염철 전매법ㆍ균수법ㆍ평준법" 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인물이다. "무제"의 정책은 "후한"이후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유학" 또한 그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선다.
• 그러나 소모적이고, 거대한 "대원정"을 일으키고, "자신의 능"을 짓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낭비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ㆍ세금 신설을 단행해,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게 하였다.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말년에는 "신비주의"에 빠졌다가, "황후ㆍ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 성격이 꽤나 다혈질이었는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을 고자로 만들기도 했다.
• "이릉(李陵)"은 BC 99년, 직접 부하 5,000명을 거느리고, "흉노"와 싸웠다. 그는 적은 수의 병사로 "흉노"를 무찌른 뒤, 돌아오는 길에 강력한 적의 대군을 만나 힘써 싸웠지만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의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한 "무제"가 그의 일족을 몰살시키려고 하자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충성심과 용감한 전투정신을 칭찬하며, 변론했다. 그러나 "무제"가 오히려 더욱 분노하여, "사마천"을 "궁형"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흉노 왕"은 투항한 "이릉"을 사위로 삼고, "우교왕"으로 봉했다.
① 효경황후 왕씨 (孝景皇后 王氏) : 한 무제의 모친
"한 무제"는 "한 경제"의 11번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이다. "효경황후" 또한 흥미로운 여자인데, 황제의 부인이 되기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전력이 있는 여자였다. "효경황후"의 부친은 "공후 왕중(共侯 王仲)"으로, 그는 "연왕 장도"(藏茶: 유방의 공신숙청으로 몰락한 왕)의 손녀였던 "장아(藏兒: 후에 平原君으로 존칭됨)"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는데, "왕중"은 곧 죽어버렸다.
이후 "장아"는 다시 "전씨(田氏)"와 재혼하여, 후에 승상이 된 "무안후 전분(武安侯 田粉)"을 낳았다. 즉, "효경황후"와 "전분"은 "이부 동모"형제인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는 아직까지 유교관념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시기라 여자들의 재혼 또한 자유로웠다.
"장아"는 "왕중"과의 큰 딸(효경황후)을 "김왕손(金王孫)"이라는 자에게 시집을 보내었는데, "왕씨(효경황후)"는 "김왕손"과의 사이에서 딸을 1명 낳았다. 어느 날, "장아"가 지나가는 점쟁이와 마주쳤는데, 그 점쟁이가 말하길 "당신의 큰 딸은 후에 귀하게 될 몸이니, 반드시 개가(改嫁, 재혼)시켜야 하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장아"는 사위였던 "김왕손"에게 가서, 자신의 딸과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김왕손"은 듣지 않았다. 이에 "장아"는 강제로 자신의 딸을 납치해서, "장안"에 있는 "황태자(한 경제)"의 시녀로 들여보냈다. "왕씨(효경황후)"는 "황태자"의 첩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개척하게 된다.
② "한 경제"의 즉위
"황태자"가 즉위하여 "경제"가 되었는데, "경제"의 첫 부인은 "박씨(薄氏)"였다. "황후 박씨"는 "경제"의 할머니였던 "효문태후 박씨(孝文太后 薄氏 : 고조 유방의 첩)"의 친정집 사람이었는데, 아기가 없다는 이유로 "효문태후"가 죽자, 곧바로 폐위시켜 버렸다. 당시 "경제"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던 여인은 "율희(栗姬)"라는 여인이었는데, 아주 자존심이 세고 질투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마침 "율희"의 아들 "영(榮)"이 "황제의 장남"이었으므로, "영(榮)"을 "황태자"에 책봉하였다.
"경제"에게는 남동생 1명과 누나 1명이 있었는데, 남동생은 "양효왕 무(梁孝王 武)"이고, 누나는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였다. "관도장공주"는 "당읍후 진오(堂邑侯 陳午)"와 결혼하여, 딸 1명을 두고 있었는데, 이름이 "아교(阿嬌)"라 하였다.
"관도장공주"는 마침 비어있는 "황태자 비"를 자신의 딸에게 주려고 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권세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관도장공주"는 "황태자"의 생모인 "율희"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딸인 "아교"와 "황태자 영(榮)"을 혼인시키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했던 "율희"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평소에 "관도장공주"가 많은 여인들을 "경제"의 후궁으로 보내어서, "황제"가 "관도장공주"가 소개시켜 준 여인들과 밤을 보낸다고 투덜대던 "율희"였으니, "관도장공주"가 좋게 보일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의 자리는 확실하게 떼놓은 당상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관도장공주"는 "율희"의 거절에 분노하였고, 계략을 써서 "율희"를 몰락시키고자 했다. 마침,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장아"의 딸 "왕미인(王美人: 이미 美人에 책봉되었다)"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교동왕 철(膠東王 徹, 한 무제)"를 "관도장공주"에 소개시켜준다.
③ 금옥장교 (金玉藏嬌): "교동왕 철(무제)"와 "아교"의 결혼, "한 무제"의 등극
이에 그 유명한 "금옥장교(金玉藏嬌)"의 고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고사를 대략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연회에서 "경제"의 누나이자, "무제"의 고모인 "관도장공주"가 "교동왕 철(무제)"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아내를 맞아들이고 싶지 않느냐?" 교동왕 철이 말했다. "저도 맞아들이고 싶어요." "관도장공주"가 좌우에 늘어선 궁녀들을 가리켰지만, "교동왕 철(무제)"은 모두 싫다고 하였다. 관도장공주가 끝에 서있는 궁녀를 가리키며 "교동왕 철(무제)"에게 다시 물었다. "저기 있는 아교(阿嬌)는 어떻니?" "교동왕 철(무제)"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좋아요. 아교가 나의 아내가 된다면, 마땅히 금으로 만든 집에다 그녀를 모셔놓을 것입니다."
"관도장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경제"에게 이들의 혼인을 윤허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얼마 후, "경제"의 허락으로 "교동왕 철(무제)"와 "아교"는 부부가 되었다. 즉, "금옥장교(金玉藏嬌)"라는 고사는 "훌륭한 집에 미인을 감춰둔다"는 말이 되겠다.
어쨌든, "교동왕 철(무제)"와 "아교"는 결혼에 성공했고, "관도장공주"와 "왕미인"은 "교동왕 철(무제)"을 황태자로 옹립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면, 자신들의 아들딸들이 후일의 "황제"와 "황후"가 될 것이므로. 이후 "관도장공주"는 뻔질나게 "황궁"을 드나들면서, 동생이었던 "경제"에게 "율희"와 "황태자 영(榮)"의 좋지 않은 점을 고자질하고 모함하였다. 게다가 모친이었던 "두태후(竇太后)"까지 구슬려서, "황태자 폐위"에 동참을 하니, "경제"는 이에 "율희"와 "황태자 영(榮)"을 마침내 의심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날, "경제"가 병석에 누웠을 때, "율희"가 간호를 맡게 되었다. 이에 "경제"는 "율희"의 마음을 떠보고자, "율희"에게 부탁을 하나 하였다. "짐이 만약 죽거든, 당신이 낳은 황태자 못지않게 다른 황자들도 사랑해 줄 수 있겠소?" 이에, "율희"가 매몰차게 말하길,"저하고 그 아이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습니다." 이에, "경제"는 "율희"에게 크게 실망하였고, 안 그래도 "율희"의 성가신 성격에 못마땅하던 터이라, 얼마 있지 않아, "황태자 영(榮)"을 폐위시켜 버렸다.
이에 절망한 "율희"는 "관도장공주"에게 사정해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자신의 과욕 때문에 아들의 인생까지 망쳐 놓은데 대한 자괴심으로 곧 죽어버렸다. 황태자가 폐위되자, "관도장공주"와 "왕미인"의 뜻대로 "교동왕 철(무제)"이 "황태자"가 되었고, "관도장공주"의 딸인 "아교"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덩달아 "황태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왕미인" 또한 비어있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일의 성사에는 "관도장공주"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죽고, 마침내 "황태자 철(무제)"이 즉위하여, "무제"가 되었다. "아교"는 마침내 "황후"가 되었고, "관도장공주"는 "황제"의 장모이자 고모로써, 그 위세와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결혼 6년이 넘어가도록, "황후 아교"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금옥장교"라 떠벌리며, 첫사랑이었던 "아교"를 그토록 끔찍이 사랑했던 "무제"도 점차 "아교"와의 사랑이 식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근친혼" 때문에 아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무제"와 "아교"는 고종사촌간이다) 어쨌든, "무제"의 사랑이 식어 가는데는 "아교"의 성질도 한 몫 했는데, 모친이었던 "관도장공주"를 닮아 성격이 거만했고, 질투심이 많아 "무제"가 바람(?)을 피는 꼴을 보지 못하였고, 시시콜콜 황제에게 간섭하는 성격이었다. 쉽게 말하면, 황제를 너무나 사랑해서, 한 시라도 황제가 옆에 있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했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다.
④ 제1차 무고의 화 (巫蠱禍) : 평양공주의 노비가수 "위자부"
이러한 황후에게 질려버린 "무제"는 슬슬 바람기가 발동하게 되는데, "무제"에게는 친누나였던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있었다. 어느 날, "평양공주" 집으로 놀러간 "황제 무제"는 "평양공주"가 베푼 연회에서 아리따운 여자가수 "위자부(衛子夫)"라는 노비를 만나게 된다.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몸종으로써, 그녀의 어머니 "위온(衛溫)" 때부터 "평양공주"의 남편 "조수(曺守)"의 노비였는데, "위자부"의 신분도 그러므로 아주 미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자부"를 보고, "무제"는 한 눈에 반하여, "평양공주"집의 화장실에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당시 화장실을 오늘날과 같이 그냥 일만 보는 곳이 아니라, 온갖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고 함) 이런 관계를 눈치 챈 "평양공주"는 "무제"에게 "위자부"를 주었으며, "위자부"는 "무제"의 후궁이 되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황후 진아교"는 눈이 뒤집어져서(?) "무제"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위자부"를 못살게 구는 등 아주 "황후"로써의 체통을 잃어버린 짓을 많이 했다. 그러나 "무제"는 "황후 진아교"와 "관도장공주"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꾹 참고 있었다. (즉, "무제"는 "아교"와 결혼했기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아교"가 만약 "경제"의 다른 아들과 결혼했다면 그 사람이 "황제"가 되었을 것)
마침내 "황후 진아교"는 "위자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리고 "위자부"가 기거하는 궁에 요사스런 물건을 파 묻는 등 "무고(巫蠱)"를 했다. 그러나 이런 짓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발각이 되고, 이에 분노한 "무제"는 "황후 진아교"를 폐위시켜 버리고 "장문궁(長門宮)"에 유폐를 시켜버렸는데, 이것이 곧 "제1차 무고의 화(巫蠱禍)"이다.
이후 "진아교"는 황제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당시 잘 나가는 가수(사실은 시인)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부탁해, 자신의 처지를 황제에게 호소하는 "장문부(長門賦)"라는 노래를 만들게 해서 유행을 시키게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허사가 된 채, 끝내 "무제"는 그녀를 찾지 않았고, "진아교"는 결국 미쳐 정신병을 앓다가 죽어버렸다.
⑤ 황후가 된 "위자부"
"황후 진아교"가 폐위되자, "무제"는 "위자부"를 황후로 삼았다. 명문 귀족들만 될 수 있었던 "황후" 자리에 천한 노비신분의 "위자부"를 앉힌 것이다. 이후 "위자부"의 시호는 "효무황후(孝武皇后)"인데, 곧이어 "무제"의 장남 "여태자 거(戾太子 據)"를 낳고, 곧이어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제읍공주(諸邑公主)"를 출산했다. 이후 "황태자"를 출산한 공로로 그녀는 황후 자리를 40년 동안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오빠였던 "위청(衛靑)"은 "흉노"를 토벌한 공로로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고, 미망인이 된 "평양공주"와 결혼하여, "무제"와는 겹사돈까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즉, "위자부" 남매과 "무제" 남매가 겹쳐가며 결혼한 셈이다)
"위자부"의 언니인 "위군유(衛君儒)"는 승상 "공손하(公孫賀)"와 결혼까지 했으며, 조카였던 "곽거병(藿去病: "위자부"의 또 다른 언니 "위소아"의 아들)" 역시 "위청"과 함께 젊은 나이에 "흉노"토벌에 큰 공을 세워 "무제"의 신임이 대단했다. "곽거병"의 동생 "곽광(藿光)" 역시 "무제"가 죽은 뒤, 사실상의 "한"의 실권자로써 "무제"의 어린 아들 "소제(昭帝)"를 보필한 공로가 있었다.
⑥ "경국지색 이부인(李夫人) : 이연년의 동생ㆍ왕부인 (王夫人)ㆍ이희 (李姬)
그러나 아리따웠던 "위자부"도 늙기 시작하니깐, 주책없이 "무제"는 또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그 1번째 상대가 "제회왕(齊懷王)"을 낳은 "왕부인(王夫人)"이었고, 2번째가 "연자왕(燕刺王)"을 낳은 "이희(李姬)"였다. 3번째는 그 유명한 "경국지색 이부인(李夫人)"이 등장하는데, "이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많다. 여기에도 "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가 끼어있었다.
애초 자기 집의 여가수였던 "위황후"를 천거한 것도 "평양공주"였다. 전속 악단을 거느렸던 "평양공주"는 악단원 중에 재색겸비하고 가무에 능한 자가 있으면, 그를 궁전에 천거했고, "이연년(李蓮年)"이라하는 작곡가도 "평양공주"의 천거로 궁정에 입궁했다. 그는 단조롭던 궁중의 음악을 특이하게 바꾸어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음악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위황후"의 얼굴도 일그러지자, "무제"는 후궁에서 미인을 구했지만, "이거다"하고 마음이 내키는 미인은 없었다. "무제"의 중얼거림을 듣고, "평양공주"는 "이연년"의 누이동생을 추천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이부인"이다.
"이부인"은 부름을 받았고, "황제"는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이부인"은 맑고 귀여운 미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못했는데, 아들을 낳고 난 후에 병이 들었다. "이부인"의 임종 때, "무제"가 찾아간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부인"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창읍왕(이부인이 낳은 아들)"과 그녀의 형제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할 뿐이었다.
"무제"는 사랑하는 "이부인"의 얼굴을 단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팠다. 그러나 "이부인"은 아무리 해도 얼굴을 내놓지 않았다. "부인은 얼굴에 화장하지 않고서는 군부(君夫)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랜 병고로 소첩은 화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부인은 아무리 해도 얼굴을 내놓지 않았는데, 이것이 이불을 점점 더 깊숙이 뒤집어쓰는 이유였다. "무제"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이부인"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무제"는 기분 나쁘게 병실을 나가버렸다. 그 뒤, "이부인"의 여자 친척들은 그녀에게 원망스러운 말만 했다. 후궁에는 "황제"외의 남자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이부인"의 자녀와 형제들의 아내들뿐이었다.
"잠깐 얼굴을 보여주고, 친척들의 일을 부탁해도 좋았을 터인데 황제께서는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에요." "이부인"은 완전히 쇠진해 있었지만, 젖 먹던 힘을 다해 말을 했다. "친척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폐하에게 이 얼굴을 보이지 않은 거예요. 나는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만으로, 천한 신분으로 폐하께 사랑을 받았어요.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랑을 받던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없으면, 사랑도 사라지는 법이에요. 폐하께서 그처럼 열심히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옛날의 나의 얼굴이에요. 나는 지금 병으로 이처럼 보기 싫은 얼굴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요. 이 얼굴을 보셨다면, 폐하께서는 분명히 기분이 상해버리셔서 형제들을 돌봐줄 마음이 없어지실 거예요."
"이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모여 있던 여자들은 통곡했다. "이부인"이 죽자, "무제"는 그녀를 좋은 곳이 장사지냈다. 이런 "이부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부인"의 오빠였던 "이연년"(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름을 이광리(李廣利)로 고쳤다)은 나중에 "무제"의 명에 의해 죽게 된다.
"이연년"은 자신이 가수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누이동생이었던 "이부인"의 위세만 믿고, 장군까지 되어 온갖 위세를 다 부리다가 "흉노 전쟁"에서 참패하였는데,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니, "무제"는 "이부인"의 체면도 있고 해서 "이연년"을 감싸주었다. 대신 "이연년"의 작전 실패로 흉노의 포로가 된 "이릉(李陵)"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에 저 유명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을 받아 "고자(?)"가 된 것은 또 유명한 이야기이다.
⑦ 제2차 무고의 화 (巫蠱禍) : "위자부"의 아들인 "황태자 거(據)"의 거병
어쨌든, "이부인"도 죽었는데, 또 "무제"의 집안이 조용할 일이 있을까? 이번의 문제는 "황후 위자부"의 아들인 "황태자 거(據)"에게서 튀어나왔다. 애당초 "황태자 거"는 "무제"의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과는 달리 유순하고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이러한 "황태자"를 "무제"는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하여, 썩 좋아하고 있지 않았다. 마침 "승상인 공손하(위자부의 형부)"는 "무제"와의 정책 대립으로 위기에 빠져있었는데, "주안세(周安世)"라는 "대 도둑"을 검거함으로써 그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다. 마침내 "주안세"를 검거하기는 했는데, 그만 "주안세"라는 놈이 "국문장"에서 "무제"에게 "양석공주(황후 위자부의 딸)"와 "공손경성(公孫慶聲: 황후 위자부의 형부인 공손하의 아들)"이 서로 불륜관계라고 폭로해 버렸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양석공주ㆍ제읍공주ㆍ위청(황후 위자부의 오빠)의 아들이었던 위항(衛抗)ㆍ공손하ㆍ공손경성 부자"가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권력투쟁에서 "황후 위자부"와 "태자 거"의 보호막이 되어줄 방패가 모두 제거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때, "무제"의 근거리에서 모시는 "강충(江充)"이라는 간신이 있었는데, "강충"은 아주 사소한 일로 "황태자"와 틀어지게 되었다. 그 사소한 일이란, "황태자"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황제의 사신"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를 고자질한 "강충"은 "무제"로부터 관리들의 감찰을 잘 한다고 큰 상을 받았으며, "황태자의 스승"은 코가 잘리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황태자"는 "강충"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무제"는 70이 넘은 노인이고,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에 불안해진 "강충"은 "황태자"를 제거할 모략을 꾸미게 되었다.
그는 우선 "무제"가 다니는 길과 "침소"에 저주가 씌어진 물건과 인형을 마구 파묻고, 이를 "황태자"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버렸다. 이런 "강충"의 행동에 분개한 "황태자"는 먼저 선수를 쳐서, 강충을 죽여 버리고, 군사를 일으킨다.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무제"는 명령을 내려, "황태자"의 군사를 진압하도록 명령하고, 황태자를 죽여 버린다.
그리고 "황후 위자부" 또한 자결을 명함으로써, 화려했던 "황후 위자부"의 생애도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곧이어, "황태자"의 두 아들도 죽여 버리고, 젖먹이 손자만 살아남는데, 그가 곧 나중에 "황제"가 되는 "선제(宣帝)"이다. 이후, "강충"의 모함으로 "황태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제"는 "위자부"와 "황태자"를 복권시켜준다. 이것이 "제2차 무고의 화(巫蠱禍)"의 전말이다.
⑧ 구익부인 조첩여 (鉤翊夫人 趙捷予) : "무제"를 위한 마지막 여인
"조첩여"는 태어나자마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는데, 주위사람들이 아무리 손을 펴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제"가 와서 손을 펴주니, 손이 펴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있다.
어쨌든 "조첩여"는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불릉(弗陵: 후일의 소제)"이라는 아이까지 두었는데, "무제"는 "불릉"이 "요 임금과 같이 13개월 만에 낳았다"하여 매우 총애하였으며, "불릉이 항상 자신을 닮았다"하여 좋아하였다.
"무제"가 드디어 병석에 눕게 되고 죽음이 가까워오자, "불릉"을 "황태자"로 세웠다. "불릉"이 8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그 어머니인 "조첩여"가 뒤에서 정사에 간여할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불릉"을 "황제"로 세우되, 어머니인 "조첩여"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아들은 부귀를 누리는 "황제"가 될 것이나, 그렇기에 어머니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첩여"는 "무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무제"는 냉혹하였다. 결국 "조첩여"는 죽었고, "무제"도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남기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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