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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중국 역사 ④ 인물 : 서태후ㆍ동태후ㆍ함풍제ㆍ푸이(선통제ㆍ12대)

by 당대 제일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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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청나라ㆍ西太后ㆍ1835~1908ㆍ향년 73세)"는 47년 간 정치의 실권을 쥐었고,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부의(溥儀)ㆍ선통제(宣統帝ㆍ1906~1967ㆍ향년 61세ㆍ마지막 12대 황제(1908~1912))"를 옹립하고는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이튿날인 11.15일 죽었다.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장례에 동원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02.12일 종말을 고했다.

 

1. 서태후 (청나라西太后1835~1908향년 73)

 청나라 말기의 독재 권력자함풍제의 3번째 황후동치제의 생모광서제의 이모26세부터 수렴청정

② 살해?

•  동태후 (함풍제의 2번째 황후): 독이 든 떡을 건네주었다?

•  동치제 (10): "황제"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여, 몰래 "기생집사창가"를 드나들었고, 매독에 걸려 죽었다.

•  동치제 황후 : 동치제 사후,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해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살해

•  광서제 (11): 1898.09.21, "서태후"가 일으킨 "수구파의 정변(무술정변)"으로 유폐→  10년간 갇혀 있었으며, 1908"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서태후" 의해 살해

•  광서제 후궁(진비): 우물에 빠뜨려 살해

 서태후 시대의 개막 : 신유정변 (辛酉政變기상정변북경정변)

1861.11.02., "청나라 북경"에서 "서태후공친왕(함풍제 동생)" 등이 일으킨 궁정 쿠데타

"함풍제""열하"에서 사망하자,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북경파""숙순"을 대표로 한 "열하파"가 권력 대결을 벌였는데, 결국 "서태후공친왕"이 함께 정권을 장악하였다 "함풍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동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마마나 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것입니다 재원과 단화, 숙순 등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라곤 없을 것이니, 공친왕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시렵니까?"  "태후""서태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서태후""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서태후

2. 동태후 (청나라東太后1837~1881향년 43ㆍ사진 우측)

 청나라 말기"함풍제" 2번째 황후자안태후 (慈安太后)

재위 : 1852~ 1861 (9)  배우자 : 청나라 황제 함풍제 (9)  자녀 : 없음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 서쪽에 거주한 "서태후"와 대비되어, "동태후"로 불렸다.

 일설에는 "서태후""동태후"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태후""동태후에게 독이 든 전병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크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누웠다. "동태후""서태후"를 보러 몇 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몸져누운 "서태후""동태후"에게 "전병"을 보내왔는데, "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81, "동태후"가 며칠 앓지도 않고, 돌연히 사망하였다.

"동태후"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서태후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설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1852(함풍2) 16세의 나이에 "정빈"으로 책봉되었고, "정귀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다.

1861"동치제"가 즉위하자, "동태후""서태후"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동태후"는 문맹이었으며, 나랏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정계에 나설 만한 성격이 아니어서, 정치에 관한 것은 "서태후"에게 일임하고 조용히 지냈다 "동태후""광서제"가 즉위한 뒤, 7년만인 1881.04.08일 갑자기 사망했다.

 자식이 없었던 "동태후""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를 어려서부터 키웠다.

조금만 잘못해도 야단을 치는 "서태후"와는 달리 "동태후"는 감싸 주었기 때문에, "동치제"는 생모인 "서태후"보다 자애로운 "동태후"를 친어머니처럼 여기고 따랐다 어머니를 싫어했던 "동치제"가 일부러 "동태후와 모자지간처럼 지냈다"는 의견도 있다.

"서태후ㆍ동치제"의 사이가 벌어진 이유

이후 "동치제""동태후"가 간택한 "아로특씨"를 황후로 삼고, "서태후"가 고른 여인을 후궁으로 삼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태후""동치제"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다 "동치제""동태후(양모)"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 사이의 관계가 벌어진다고 생각하여,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서태후ㆍ동태후"의 사이가 벌어진 이유

어느 해 추석날, "동태후서태후"는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를 지낼 때, "동태후""서태후"에게 "한 발자국 뒤에 서라"고 하였다 이유는 "함풍제" 생전에 "동태후""중궁 태후(1황후)", "서태후""황비"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1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함풍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에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던 "함풍제""서태후가 자기 아들이 황제로 되었다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동태후"를 보러갔다 "동태후""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져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라면서, "함풍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틀려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서태후ㆍ동태후"의 수렴청정 (동치제)

즉위한 "동치제"의 나이는 겨우 6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흥취를 가졌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에 밝은 "동태후"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서태후""동태후"를 미워하게 되고, "동치제"18(1874)이 되자,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제" 자신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로웠다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만 관심을 가지고, 무슨 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대로 정을 못하게 하니 충돌이 많았고, 동태후는 조용했다 그러하니 "동치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3. 함풍제 (咸豊帝1831~1861향년 30청나라 9대 황제(1850~1861))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1850.12~ 1864.08(14년 간))제2차 아편전쟁 발발

재위기간 중,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1850.12~ 1864.08(14년 간))"이 일어나, 중국 대륙이 휘청거렸다. "2차 아편전쟁(일명 애로호 전쟁1856.10~ 1860.10)이 발발하였다 1860"2차 아편전쟁"으로, "-프 연합군""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태후""함풍제동태후" 함께, "열하(熱河지금의 하북성 승덕) 피서산장"으로 피난을 갔다.

그 사이 "-프 연합군"의 공세가 북경까지 이르러, "이궁(離宮) 원명원"이 전소되었다 이후 "영국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하게 된 "함풍제"는 북쪽 지방을 "러시아" 점령당하자, 병을 얻어, "피서산장"에서 1861년에 세상을 떠났다 "함풍제""서태후"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정을 어지럽히면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피서산장 (避暑山莊)이궁(離宮)피서별궁열하행궁 : 중국에서 가장 큰 황실 정원중국 4대 정원 중의 하나주위 성벽만 10km.  중국 허베이 성, 청더(承德市)에 위치여름에는 이곳에서 황제가 집무를 보았다.

서태후 시대의 개막 : 신유정변 (辛酉政變기상정변북경정변)

1861.11.02., "청나라 북경"에서 "서태후공친왕(함풍제 동생)" 등이 일으킨 궁정 쿠데타로,  "함풍제" "열하"에서 사망하자,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북경파" "숙순"을 대표로 한 "열하파"가 권력 대결을 벌였는데, 결국 "서태후ㆍ공친왕"이 함께 정권을 장악하였다.  "함풍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동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4. 동치제 (同治帝1856~1875향년 19청나라 10대 황제(1861~1874))

 "청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장남"으로 황위를 물려받은 황제

즉위 당시, "동치제"의 나이가 5세였기에, "숙부 공충친왕(恭忠親王)생모 서태후(西太后)적모(嫡母) 동태후(東太后)"가 번갈아 가며, 섭정하였다.

 식적인 사인은 "천연두"였으나, 민간에서는 "매독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황후 아로특씨"와 사이가 좋았음에도, "동치제"가 황후를 택할 때,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았다하여 "황제"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였으며, "동치제의 황후"를 핍박했다 "서태후"의 엄중한 감시 속에 그녀와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던 "동치제"는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환관의 권유로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사창가를 드나들었고, 매독에 걸렸는데, 이를 증상이 비슷한 "천연두로 속였다"는 것이다.

"동치제"는 얼굴을 비롯한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겼고, 이를 짜내자, 악취와 함께 붉은 종기가 났는데, "서태후""동치제"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거울을 치워버렸다고 한다 아들 "동치제"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으로 "동치제의 황후"를 죽인다.

 "서태후ㆍ동치제"의 관계

1856, "서태후"가 아들 "재순 (載淳, 훗날의 동치제)"을 낳자, 처음으로 얻은 아들의 탄생에 "함풍제" 크게 기뻐하며, "서태후""의귀비(懿貴妃)"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당시 "" 안에서의 지위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았던 "서태후""함풍제"의 총애를 유지하는데 전력을 쏟기 위해, "재순(동치제)"의 양육을 포기했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동치제"는 훗날 "서태후"를 두려워했으며, 공공연히 그녀와 맞서게 되었다.

5. 광서제 (光緖帝1871~1908향년 37청나라 11대 황제(1874~1908))

 서태후의 지원으로 즉위"청나라" 역사상, "최초""방계 혈통" 출신 황제

이로써 "청 왕조""황위의 부계" 세습 전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서태후의 여동생과 시동생(순현친왕)이 낳은 아들이다.)  관례상 차기 황제는 "동치제"의 다음 항렬에서 간택해야 했지만, 그 경우, "황태후"의 자격으로 "섭정" 할 수 있는 것은 "동치제"의 황후인 "효철의황후"가 되기 때문에, "서태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치제"와 같은 항렬 가운데, 가장 어린 "황족"을 고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조카 "재첨(광서제)" 황제로 삼고, "수렴청정"이라는 명분하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1898.09.21, "서태후"가 일으킨 "수구파의 정변(무술정변)"으로 유폐

"서태후"는 새로운 "훈정(수렴청정)"을 선포하고, "광서제"의 폐위를 준비하였다 "서태후""광서제" 대신 "단친왕(端親王) 재의"의 아들 "부준(溥儁)"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지방의 총독외국 사신들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고, "광서제"의 칭호만 남겨두었다.

 "광서제"10년간 갇혀 있었으며, 1908"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서태후"에 의해 살해됨.

1908.11.14, "푸이"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 날, "광서제" 세상을 떠났다 "광서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④  "서태후ㆍ광서제"의 관계

 "서태후""광서제"를 엄격히 교육하는 한편,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신경을 쓰며, 돈독한 모자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스승 "옹동화"에게 "광서제"가 학문을 배울 때에는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으며, 업을 마친 "광서제"가장 먼저 "서태후" 앞에서 그날 공부한 내용을 암기했다 또한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황제의 결혼"에 간섭하기 위하여, 자신의 또 다른 조카인 "정분" "광서제 황후"로 간택했으며, 두 후궁인 "근비진비"도 직접 골랐다.

이처럼 "서태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광서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서태후"가 사사건건 정무에 간섭하고, 권력을 완전히 넘겨주지 않자, "광서제"는 점차 그녀에게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1898"무술변법 자강운동" 실시하여, 변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유폐되었다 이로써, 변법은 103일 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녀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동태후 섭정 (1874.12~1881.04)서태후(이모(姨母)서백모(庶伯母)) 섭정 (1881.04~1889.02)

친정(1889.02~1898.08)무술변법 자강운동 실시(1898.06.11.~1898.09.21(103일 간))무술정변(1898.09.21서태후가 일으킨 변)으로 유폐되어, 서태후에게 다시 실권이 박탈1898~1908까지 "허수아비 임금"의 신세를 지냈다.

6. 푸이(溥儀)선통제(宣統帝1906~1967향년 61마지막 12대 황제(1908~1912))

 "선통제 (1906~1967푸이2세에 황제등극)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121908~1912)ㆍ만주국 집정 (대동왕1932~1934)만주국 황제 (강덕제1934~1945)" "황제"로 내세운 괴뢰정권

"광서제(11대 황제)"의 동생 "순친왕 짜이펑""영록(서태후 측근인 대학사군기대신)"의 딸 "유란"의 아들ㆍ"광서제"가 붕어하자, "서태후""푸이""동치제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태어난 지 210개월 만에, 즉위하였다.

 2세의 나이로 "청나라 황제"에 오르지만, "위안스카이쑨원"의 협약에 따라, 곧 퇴위한다.

협약의 내용에 따라, 외국 군주의 대접에 준하여, "청나라의 황제 대우"를 받지만, "자금성" 내에서만 한정(청나라 소조정)될 뿐이었다 "펑위샹의 쿠데타"로 인해, "자금성"에서 쫓겨난 그는 "일본" 도움을 받아, "만주국의 황제"오르지만,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가", 황제로서의 실권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고, "일본"의 패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포로로 잡혀, 수용 생활 이후,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냈다.

 효정경황태후 (광서제 (백부)의 황후서태후 조카딸) 섭정 (1908.12.02.~09)

부친 순친왕 섭정 1908.12~1912.02)신해혁명(1911.10.10) 여파로, 쑨원이 중화민국 대통령 취임(1912.01.01)청나라 황실 위협 청나라 멸망(1912.02.12)과 함께 퇴위청나라 소조정 수장(1912.02.12~ 1924.11)으로 재위보국공 푸쥔(8촌 형청나라 천립 군주) 섭정(1912.02.12.~1917.07) 장쉰(중화민국 안후이 제독) 섭정(1917.07.01.~12)여허나라 나둥(청나라 소조정 명예총리대신) 섭정(1917.07.12.~1924.11.05) 만주국 황제 치세 시절(1934.03~1945.08)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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