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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중국 역사 ③ 격동시기 : 아편전쟁 (1840)~신해혁명 (1911)까지

by 당대 제일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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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청나라"와 무역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아편"은 빠른 속도로 퍼졌고, 중독자 수가 2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청나라"의 사회ㆍ경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임칙서""아편 몰수수입 금지"라는 강경책을 쓰자, 양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영국"은 전쟁을 시작했다.

 

1. 1780 (중국의 차 (茶) 판매) → 아편전쟁 (1840) ㆍ원명원 파괴

① 1780 : 중국의 "차(茶)ㆍ도자기(China)"가 잘 팔림 ⇌ 영국은 "은ㆍ시계"를 수출 (과도한 적자 발생)

영국은 식민지인 "인도의 아편"을 팔기로 결정 → "차ㆍ은"을 얻는 "3자 무역" 시작   /   인도가 "아편" 수출 → 인도로 "은"을 대금으로 주면 → 영국은 인도에게 "면제품" 판매

② 영국 상인들은 육체노동으로 지친 중국 하층민을 대상으로 팔기 시작

모든 계층으로 전파 → 약 3.5억 명(14억 인구의 25%)이 이용 → 부패ㆍ전투능력 상실ㆍ국가기강 해이ㆍ농촌경제 파탄ㆍ재정 타격 등 발생 → 아편 수입대금을 "은"으로 결재 → 재정 타격 발생 → "임칙서(청나라 정치가)"가 외국상점 봉쇄

"임칙서"는 1839.06.03일~ 23일에 걸쳐, 외국상인들의 아편 20,000상자를 모두 녹여버림 → 마약상들 "홍콩"으로 철수 → 영국은 전쟁파ㆍ반대파로 나뉨 → 투표 271:262로 전쟁파 승리 → 1840년, 아편전쟁 개시 (중국이 너무 약해서, 거의 일방적인 학살수준) → 난징조약(항구를 개항하여, 영국의 물건을 더 팔아넘기고, 독점상인을 없애어 관세를 덜 내게 함) → 홍콩 영구 양도(홍콩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옴)

③ 내 용 (장소 :  중국 청나라 동부해안)

• 결과 : 영 (홍콩, 주룽 반도)ㆍ프 (광저우만)ㆍ러 (연해주) 획득ㆍ아편무역 합법화기독교 포교텐진 개항

• 1차 (아편 전쟁) : 1840~1842 → 난징 조약 → 홍콩 영구 양도  /  2차 (애로호 전쟁): 1856~1860 → 톈진 조약ㆍ베이징 조약

아편

④ 아편 (阿片Opium)

마약의 일종, 양귀비의 덜 익은 꼬투리에 상처를 내어, 뽑아낸 유액을 채취하는데, 이 유액이 말라 황색 잔존물이 생기면, 긁어서 떼어낸 다음, 특별한 곰방대를 사용하여 잔존물을 작은 램프의 불로 발연시켜 흡입한다.

원래 "아편"은 "본초강목(이시진 저)"에 수록되어 있는 약초지만, 이것을 "담배"와 섞어 피우거나 "담뱃대"에 담아 피우면, "마약"이 된다. "중국"에서 "아편"이 "마약용"으로 사용된 것은 17C 초부터였으나, "영국"이 "아편"을 본격적으로 밀수출한 후부터, 중국의 모든 계층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편"은 빠른 속도로 "중국" 전역에 퍼져, 약 3.5억 명(14억 인구의 25%)이 이용하게 되었다.

⑤ "1차 아편전쟁" 후, 14년 경과 → 영국은 "면제품"을 주력으로 팔고 싶어 함.

중국제의 가성비가 좋아, 굳이 살 필요가 없었음 → 중국에게 판매 지역을 넓혀달라고 요청 → 중국 거부 → 영국 해적선 "애로호"가 검거를 받던 중, 영국 국기가 훼손 → 빌미로 영국이 전쟁 선포 → 프랑스 선교사 1명이 처형당하자, 프랑스도 개입 (러시아ㆍ미국도 개입)

⑥ "영ㆍ프"는 "광저우"를 점령하고, "텐진 (베이징의 관문)"까지 점령 → 톈진 조약 체결

텐진조약 : 외교관 베이징 상주 + 10개 항구 추가 개방 + 배상금 지불(은 지불- 영(400만)ㆍ프(200만))

⑦ 중국은 서양군대의 베이징 상주는 거부

→ "영ㆍ프"는 외교관을 수호하겠다는 명목으로 2,200명 + 선박(21척)으로 공격 → 교섭시작 → 1860.10.06일, "원명원(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정원ㆍ건륭제(청6대)가 유럽과 중국의 미학을 집대성한 곳)"을 파괴 → "함풍제(청9대)"는 "베이징"에서 "열하"로 피신, 형제 중 1명인 "공친왕(혁흔, 1833~1898)"을 시켜 연합군과 협상 → 러시아의 중재로 공친왕ㆍ영국의 "베이징 조약" 체결  (베이징조약 : 아편무역 합법화 + 기독교 포교 + 텐진 개항 + 홍콩ㆍ광저우만ㆍ연해주 할양)

⑧ 1년 후, "함풍제 (청9대)" 사망 → "서태후"가 실권ㆍ"공친왕"과 연대

→ 1884년에 "공친왕" 퇴출 → 1889년, "광서제"가 성인이 되자, "서태후"의 섭정 명분 상실 → "광서제" 주변 세력은 단속

※ 함풍제(청 9대ㆍ1831~1861ㆍ30세): 청 최악의 암군ㆍ서태후의 치마폭에 싸여 청을 망침

→ 1번째 황후 : 황태자 때 사망ㆍ자식 없음  2번째 : 동태후(1837~1881, 44) 체순당에 기거자식 없음, 정치를 모르고, 성격온순  3번째 : 서태후(1835~1908, 73) 연희당에 기거동치제 생모광서제 이모47년 정치 실권

※ 동치제 (청10대ㆍ1856~1875ㆍ19세) 서태후보다 동태후를 더 좋아함ㆍ1874년 천연두에 걸림

광서제(청11대ㆍ1871~1908ㆍ37세) 서태후 동생의 아들ㆍ서태후가 간택ㆍ서태후 죽기 1일전에 사망(독살)

2. 양무운동ㆍ북양함대ㆍ이화원 확장ㆍ변법자강운동

 양무운동 (1861~1894ㆍ서양의 신식기술만 도입ㆍ제도는 X (서태후 + 공친왕의 구제도는 존속))

광서제(청9대)의 오더로, "북양함대(78척)"라고 불리는 신식배 건조(1800년대 후반 최고 수준의 독일 선박기술)→ 신식 군대화 성공 → 청불전쟁(1884.08~1885.04)으로 베트남 상실 → 청일전쟁(1894.08~1895.04)으로 조선 상실 → "광서제ㆍ북양대신 이홍장"은 "청일전쟁"으로 "조선"은 확보할 것이라 판단

※ 이홍장 : 1823~1901(78세)ㆍ후에 권력은 "원세개"가 세습ㆍ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주도

여러 한족계 민병단(회군)을 이끌고 있던 중, "태평천국의 난"에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ㆍ조정에 등용 → 증국번 사후,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 위치 → 북양대신이 되면서 그의 회군은 북양군이라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때 "서태후"의 문제 발생

자신의 별장으로 쓰려고, "이화원(1750년 건륭제(청6대)가 건립)"을 확장"서태후"가 더 이상 해군 국방비에 돈을 투자하지 못하게 중단하고, 그 국방비로 "이화원" 확장 → 돈이 없던 "청"은 대포알ㆍ석유를 구입 못함 → "청일전쟁" 패배(대만ㆍ조선ㆍ랴오둥반도 상실) → 1897년, "독일"이 "청"에게 빌렸던 "칭따오"를 강제점령

1898년, "광서제"가 "서태후"에게서 벗어나고자, "변법자강운동" 실시

"변법자강운동(189년ㆍ무술변법ㆍ100일 변법)" 실시 → 강유위(캉유웨이)가 광서제에게 제안 : "양무운동"으로 아무리 신식군대를 키워도, "수구세력ㆍ서태후" 때문에 안 되니, 서양의 법제도를 받아 들여, 정치전반ㆍ법제도까지 싹 다 갈아엎어야 한다.  → "서태후 세력(수구정치인)"을 제거  → "광서제ㆍ강유위"는 "원세개(당시 청 군대를 거의 통솔)"에게 협조 요청  → "서태후"와 소통하고 있던 "원세개"는 군대를 일으켜, "자금성" 공격하여, "광서제" 세력들을 체포 → "서태후"가 재집권  → "부준(1885~1942ㆍ13세ㆍ광서제 6촌 형의 아들)"을 황제로 앉히려고 하자, 열강들이 "광서제"를 복귀시키라고 요구

3. 의화단 등장ㆍ신축조약ㆍ신정운동

 "의화단" 출몰 → 무작정 보이는 서양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파괴하면서, "베이징"으로 진격

 의화단 (義和團)

농민이 주체인 반청세력(반청복명)의 한족 민족주의 비밀결사 조직ㆍ청나라의 전복 + 외세 배척 목표로 무장 봉기→ 부청멸양(청나라를 도와, 서양 것들을 멸하자)  손오공ㆍ저팔계 따위를 신으로 숭배하면서, 칼에도 피나 부상을 입지 않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열강들은 자국 국민의 안위가 걱정

청나라에게 진압 요구 → "서태후"는 "의화단"을 그냥 두는 게 낫다고 판단

 1900.06.16일, "서태후"는 "의화단"을 믿고, 열강에 선전포고 (청나라 육군 + 의화단원)

08월, 34,000명의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입 →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도망 → 신축조약  (신축조약 : 4억5000만 냥 배상ㆍ의화단 주동자 처형ㆍ외국군의 베이징 주둔ㆍ베이징 주변 청군 철폐)

 1901년, 신정(新政)운동 : "서태후" 주도의 정치 개혁운동ㆍ1906년 예비입헌을 통해 정치개혁 실시

4. 신해혁명 (쑨원, 위안스카이)ㆍ칭따오 일본 점령

 1905년,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결성ㆍ삼민주의 제창ㆍ반청(反淸) 무장투쟁 전개

※ 쑨원손문 (孫文)ㆍ중산ㆍSun Wenㆍ1866~1925ㆍ향년 59세

삼민주의ㆍ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ㆍ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립자ㆍ중국 외과 의사ㆍ정치가중화민국 : 국부로 추앙 (1911~12: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 1923~25: 중국 실질적인 통치자)중화인민공화국 : "마오쩌둥" 보다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

※ 원세개ㆍ위안스카이 (袁世凱ㆍ1859~1916ㆍ향년 57세)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ㆍ중화제국 제1대 황제ㆍ북양군(청나라 정규군)창설ㆍ군인ㆍ정치가배신의 귀재중화민국 제2대 대총통(1- 쑨원3- 리위안훙(려원홍1~2대 부총통)

1898 : "서태후" 편을 들면서, "황제 광서제(청11대)"를 배신 1912 : "쑨원"과 합세하여, "청나라"를 버리고, "중화민국 대총통(2)"가 됨 1915 : "중화민국"까지 배신 "중화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됨.

1911년, 신해혁명

청나라가 철도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발전 → 10.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1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

1912.0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 "선통제(푸이ㆍ청12대ㆍ1908~1912 재위ㆍ1906~1967ㆍ61세)"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 → "쑨원(45세)" 세력은 군사력이 딸리자, "위안스카이(52세)" 힘을 빌려, "청"을 몰락시킴 → 1913.07월, "쑨원"은 일본으로 도망 → "위안스카이" 독재 시작 → 초급 총통제(중화민국의 총통을 황제 급으로 격상하는 법) 통과

1914년 당시, "1차 대전" 중으로, "칭따오"는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상황

→ 일본은 "영일동맹"의 일원으로, "영국"의 적인 "독일"을 자신들이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다  : 당시 일본은 "독일"이 점령한 "칭따오" 뿐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를 만주를 시작으로 먹고 있던 중이었다 → 일본은 "칭따오"를 쳐들어간다고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에게 통보안 들어 주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고, "청일전쟁"도 졌는데, 해볼 것이냐고 협박당시 중국은 일본과 싸움 힘이 없었음 (칭따오 헌납 + 만주까지 약속) →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칭따오"가 일본 영토가 됨 (열강들은 1차 대전 중이라 정신없었음)

5. 한족 민심이탈ㆍ공산주의 여건 형성

 "위안스카이"는 한족의 민심을 상실

1915.12.12일, "중화민국"을 접고, "중화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됨 → 13일 뒤, 전국적으로 "반란" 발생 → "반란"을 막아달라고, "일본"에게 요청 → 일본 거부 → 6개월 뒤, 1916.06.06일 "화병"으로 사망 → "대총통" 자리를 두고, 수많은 군벌(직예군벌ㆍ안휘군벌ㆍ봉천군벌 등)이 싸움 → "공산주의" 여건 형성

 1917.10월, "소련"에서 "볼셰비키 러시아 혁명" 발생

"이대쇠(리다자오ㆍ1888~1927ㆍ베이징대 도서관장)"가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책을 공부하고, 많은 공산주의 관련 책을 구매하여,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에 구비 → "모택동(마오쩌둥ㆍ1893~1976)"이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로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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