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미인 (四大美人)"을 논할 때, "중국 고대 소설" 중에서는, 자주 "침어낙안 (浸魚落雁)의 용모, 폐월수화 (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고대의 4대 미인은 "침어 (浸魚 = 서시 (西施))ㆍ낙안 (落雁 = 왕소군 (王昭君))ㆍ폐월 (閉月 = 초선 (貂蟬))ㆍ수화 (羞花 =양귀비 (楊貴妃))"를 일컫는다.
1. 중국 4대 미인 (四大美人)
① 서시 (西施ㆍBC 5Cㆍ생몰년 미상) : 춘추전국시대 말기, 월나라의 침어
• 별칭 : 침어 (浸魚) :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먹다.
"월(越)나라"의 여인, "월 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范蠡)"가 "오왕 부차(夫差)"에게 선물 →"오(吳)나라" 패망 → "범려"를 따랐다? ㆍ "오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강에 빠뜨려 죽였다?
② 왕소군 (王昭君ㆍBC 1Cㆍ향년 72세) : 전한의 낙안
• 별칭 : 낙안 (落雁) :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전한(前漢)"의 여인ㆍ11대 "원제"의 궁녀→ "원제"가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에게 선물 → "호한야 선우"의 부인이 됨.
③ 초선 (貂蟬ㆍ175~199ㆍ향년 24세 (소설 상의 나이)) : 삼국시대ㆍ한나라의 폐월
• 별칭 : 폐월 (閉月) :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한나라"의 여인ㆍ"한나라 대신 왕윤(王允)"을 따라, 간신"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킴→ 동탁 사망 →"여포"의 첩→ "여포"가 "조조"에게 살해→ "비구니"가 됨→ "관우"를 끝까지 모심
④ 양귀비 (楊貴妃ㆍ719~756ㆍ향년 37세ㆍ150cm- 80kgㆍ160cm- 69kg) : 당나라 현종의 수화
• 별칭 : 수화 (羞花)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ㆍ절대가인(絶對佳人)
"당나라"의 여인ㆍ"수왕(현종 18번째 아들)"의 비→ "현종"의 비→ 안사의 난 발생(안녹사 + 사사명ㆍ안녹사- 양귀비의 양자ㆍ돌궐족 출신)→ "환관 고력사"의 진언으로 현종이 자진 명령→ 목 메달아 자진
※ 사진 좌로부터 : 서시 (BC 5C)ㆍ왕소군 (BC 1C)ㆍ초선 (175~199)ㆍ양귀비 (719~756)
⑤ 한무제 (漢武帝)의 여인들 : BC 156~87ㆍ향년 69세ㆍ전한의 7대 황제
황후 진아교 (관도장공주(한무제의 고모)의 딸)ㆍ황후 위자부 (친누나의 노비 가수)ㆍ왕부인 (제회왕 모친)ㆍ이희 (연자왕 모친)ㆍ이부인 (경국지색ㆍ왕부인ㆍ이희)ㆍ구익부인 조첩여 (鉤翊夫人 趙捷予)
2. 서시 (西施ㆍBC 5Cㆍ생몰년 미상) : 춘추전국시대 말기, 월나라의 침어
① 별칭 : 침어 (浸魚) :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먹다.
"월(越)나라"의 여인, "월 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范蠡)"가 "오왕 부차(夫差)"에게 선물 →"오(吳)나라" 패망 → "범려"를 따랐다? ㆍ "오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강에 빠뜨려 죽였다?
• 본 명 : 시이광(스이광ㆍ施夷光ㆍ중국에서는 서자(시쯔ㆍ西子)) • 출 신 : 저장 성 사오싱 주지 시 출신
②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越)나라"의 여인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월나라 구천"의 참모 "범려"의 전략에 따라 패전의 처리에 대한 공물로 "오나라 부차"의 여인이 된다. "서시"가 "부차"에게 총애를 받자, "부차"의 후궁 "위희 부인"이 "서시"를 질투하여, "서시"를 비밀리에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된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 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 당한다.
③ 중국 사가들은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 일생에 대하여 많은 설들을 만들었다.
그 중 "서시"는 "범려"의 연인으로 "오나라"가 망한 후, 그가 "월나라"를 떠날 때 비밀리에 데리고 갔다는 설이 사가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았다. 다른 설로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한 후, "월의 구천"이 "서시"를 궁으로 부르지만, "범려"가 그녀와 강에서 만나 그녀를 설득하고, "서시"가 강에 자살했다는 것이나, "오나라"가 망할 때 분노한 백성들이 "서시"를 죽였다는 설도 있지만, 모두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④ "서시"와 관련한 여러 고사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침어(沈魚)"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부러움을 샀는데, 하루는 강가에서 빨래하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현재 "서시"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저장 성의 제기 시"에는 "서시"가 빨래하던 전설의 장소를 "완사(浣紗)"라 하여 관광지로 조성하였다. "저장 성 항저우"의 중심에 "서호"가 있는데, "서시"처럼 아름다운 호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⑤ "장자"에는 "효빈 (效嚬)"이라는 고사가 있다.
속병이 있던 "서시"가 이마를 찌푸리고 걷고 있었는데, 이 마을의 "추녀"가 그래야 아름다운 줄 알고 자기도 역시 가슴에 두 손을 얹고서 남이 보는 데서 얼굴을 찌푸렸다. "추녀"의 그 모습을 보고, 마을의 "부자"는 문을 굳게 닫아걸고서 나가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처자를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3. 왕소군 (王昭君ㆍBC 1Cㆍ향년 72세) : 전한의 낙안
① 별칭 : 낙안 (落雁) :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전한(前漢)"의 여인ㆍ11대 "원제"의 궁녀→ "원제"가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에게 선물 → "호한야 선우"의 부인이 됨.
•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ㆍ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單于)의 연지(선우의 처) • 본 명 : 장(?ㆍ출전은 한서)ㆍ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ㆍ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 출 신 : 형주 남군(현, 호북성 사시) 출신
② "왕소군"은 "전한 (前漢)"의 11대 "원제" 때, 재주ㆍ용모를 갖춘 미인이었다.
16세 때, 절색미인 "왕소군"이 궁녀가 되어, 궁에 입궁하였다. 당시 "원제"가 화공(畵工)이 그린 화첩에서 궁녀를 골라 불러들이자, 궁녀들이 "화공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쳤으나,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았다. 이를 괘씸히 여긴 "모연수"는 "왕소군"을 "추녀"로 그린 후에, 얼굴에 검은 점도 그려 넣었다.
어느 날 "전한"의 "원제"시대, "한나라"를 많이 괴롭혀 왔던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와 화친의 뜻으로 "한나라" 여성을 "연지(처)"로 달라고 하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변방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보냈다는 설도 있다)
"서경잡기"에 따르면, "원제"는 "흉노"에게 보내는 여성으로, 후궁 중 가장 추한 여성으로 선택하기 위해 초상화에 그려진 가장 보기 흉한 여성을 선택한 것인데, 초상화를 그리던 장인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던, "왕소군"은 가장 보기 흉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왕소군"이 선택된 것이다. 황제에게 이별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원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겼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고 말았고, 격노한 "원제"는 "화공 모연수"의 목을 쳤다고 한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하늘멀리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 나서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③ "흉노"의 "호한야 선우"의 "연지(처)"가 된 "왕소군"은 그의 장남을 낳았다.
이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아들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후한 시대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실렸던 것이, "진나라" 때 "왕명군사(王明君辭)", "원"의 "마치원"의 잡극 "한궁추(漢宮秋)" 등으로 작품화 되었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을 그리며, 느꼈을 "왕소군"의 감정을 당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그 시구 중에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 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 소군원(昭君怨) >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자연의대완(自然依帶緩), 비시위요신(非是爲腰身) : 소군원 -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이 옷의 혁대가 느슨해지니(야위었다는 뜻),이는 허리와 몸매를 위함이 아니었도다.
4. 초선 (貂蟬ㆍ175~199ㆍ향년 24세 (소설 상의 나이)) : 삼국시대ㆍ한나라의 폐월
① 별칭 : 폐월 (閉月) :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한나라"의 여인ㆍ"한나라 대신 왕윤(王允)"을 따라, 간신"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킴→ 동탁 사망 →"여포"의 첩→ "여포"가 "조조"에게 살해→ "비구니"가 됨→ "관우"를 끝까지 모심
• 본 명 : 원래 "초선"이라는 이름 역시 각색된("나관중"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것이고, 그 본명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출 신 : "삼국시대"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의 양녀
② "초선"의 무덤
2000.06월 "서천(西川)기자역" 근처에서 "한나라"시대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 사람의 다리뼈와 머리카락 외에 "여인은 초선의 장녀로 어미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라는 글과 "초선은 왕윤의 가기(노래와 연주를 하는 종)로 염제를 따라 촉으로 들어왔다."라는 글이 새겨진 묘비가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이 "초선"의 것인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묘비에 새겨진 글을 통해 사람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은 "초선"이며, 그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③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여포"가 "동탁"의 이름 없는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이다.
"삼국지"에는 "초선"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저 동탁의 "시비"라고만 하고 있다. 원문 "布與卓侍婢私通"의 해석 :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④ "초선"은 삼국시대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의 양녀이다.
용모가 뛰어나, 마치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도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王允)"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가상 인물이기 때문에, 여러 작품과 야사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다. "동탁"이 죽은 직후, 곧바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연의"에서는 "초선"이라는 이름도, 외모도 똑같은 다른 여인을 "여포"의 부인으로 다시 나타나게 해야만 했다. "여포" 사후, "비구니"가 되었다가, 이전에 본 "관우"에게 반하여 "관우"를 끝까지 모셨다는 얘기도 있다. "관우"를 처음 봤을 때, 서로 반했으며, "관우"의 연인이 되었지만, "관우"의 손에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⑤ "삼국지연의" 이전의 "초선"
"초선"은 "삼국지연의"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며, 그 이전에도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였다. "원나라" 때의 잡극인 "연환계"에서 "초선"은 "흔주 목이촌 임앙"의 딸인 "임홍창(林紅昌)"으로 "영제" 때 궁녀로 선발되었다가, "정건양(丁建陽=정원)"에게 하사되었다고 나온다. 그때 "여포"를 만나 그 아내가 되었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헤어졌다가, 나중에 "왕윤"으로 말미암아 "여포"와 재회하는데, 또한 이 잡극에서는 "초선"의 뜻을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라고 풀고 있다.
"원나라" 때의 소설인 "삼국지평화"에서 "초선"은 본래 "임씨"이고, 어릴 때의 이름이 "초선"이며, 남편은 "여포"라고 하였다. "임조부"에 있을 때부터 "여포"와 떨어지게 되었다고 나온다. 이 소설에서는 "왕윤"이 "동탁"을 청해, "초선"을 바치겠다고 한 뒤, "여포"를 초대하여 부부를 만나게 하여 갈등을 일으킨다. 대체로 "삼국지연의"이전의 작품에서는 "초선"은 "동탁"이나 "왕윤"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여포"의 아내였다는 설정이 주류를 이룬다.
⑥ "삼국지연의"에서의 "초선"
"초선"과 관련하여, "삼국지연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기"이다. 일설에는 "양녀"라고도 한다. 당시 "한"의 수도 "낙양"을 불 지르고, 황제를 데리고 옛 도읍지 "장안"으로 옮긴 "동탁(童卓)"이 폭정을 할 당시, "왕윤"은 "조조(曹操)"에게 "칠성검(七星劍)"을 주며, "동탁" 암살을 꾀했지만 실패를 하였다. "초선"의 제의로(또는 "왕윤의 명"으로) "동탁"과 "여포(呂布)"를 이간질시키는 "연환계"를 펼쳐 "동탁"을 죽인다.
이 "삼국지연의"에 나타나는 "초선"의 모습은 크게 두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충의지사"이며, 다른 하나는 "남편(동탁)"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인(또는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대사를 그르치는 남편의 아내)라는 모습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초선"은 "여포"와 정을 통한 "동탁"의 개인 "시녀"를 기본 베이스로 만들어진 인물로 "나관중"은 이 여인에게 "초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후, "동탁의 시녀"가 아닌 "왕윤의 양녀"로 묘사했다.
⑦ 충의지사
"충의지사"인 "초선"의 모습에는 유약한 여인이 모습과 마음이 강직한 지사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왕윤"이 "동탁"을 제거하지 못하고 애를 태울 때, "소용이 된다면,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왕윤"이 "초선"의 말에 답하자, "초선"은 다시 말하기를 "어찌 대감의 일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동탁"이 죽은 뒤, "여포"가 "미오 성"을 공격하고, "초선"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삼국지연의"에서 "이유"가 "여포"에게 작은 칼을 던져 죽이려 했으나, 결국 "초선"이 죽었다고 한다.
⑧ 남편의 대사를 그르치는 여인
"초선"은 남편의 대사를 그르치는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초선"보다는 "여포"가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대사를 그르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문학적 장치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한편으로는 "초선"이 실존 인물이 아니기에,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선"은 철저히 연약하고, 이기적인 여자로서 그려진다. 이 때문에 일부 삼국지의 저자들은 이 부분의 "초선"이 "여포"가 "동탁"을 죽일 무렵에 등장한 "초선"과 별개의 인물이며, "가짜 초선"이라고 묘사하기까지도 한다.
"여포"가 "조조"의 공격을 받고 성에 고립되었을 때, 성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자, "진궁"이 나서서 고립되면 더욱 위험하니, 성 밖에 나가서 지친 "조조 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일을 "여포"가 "엄 씨"와 "초선"에게 말하자, "초선"이 "우리를 버리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애원한다.
⑨ "삼국지"에서의 "초선"
"삼국지"상에서는 "초선"은 비록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동탁"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온다. 이를 이용하여, "왕윤"이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나관중"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동탁의 시녀" 대신 "왕윤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5. 양귀비 (楊貴妃ㆍ719~756ㆍ향년 37세 : 당나라 현종의 수화
① 별칭 : 수화 (羞花)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ㆍ절대가인 (絶對佳人)ㆍ150cm- 80kgㆍ160cm- 69kg)
"당나라"의 여인ㆍ"수왕(현종 18번째 아들)"의 비→ "현종"의 비→ 안사의 난 발생(안녹사 + 사사명ㆍ안녹사- 양귀비의 양자ㆍ돌궐족 출신)→ "환관 고력사"의 진언으로 현종이 자진 명령→ 목 메달아 자진
• 본 명 : 양옥환(楊玉環)ㆍ"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 • 출 신 : 쓰촨성 촉주(蜀州)(현 두장옌 시) 출생, 포주(蒲州)의 영락(永樂ㆍ현, 산서성 융지 시)"에서 성장
• 가 족 : "당나라 현종(6대)"의 "후궁"이자, "며느리"ㆍ남편- 당 현종ㆍ양자- 안녹사(안록산)ㆍ양손녀- 안비
• 체 형 : 150cm- 80kgㆍ160cm- 69kg의 건강한 체형ㆍ"당나라 현종(6대)"은 "전족"으로 작아진 "양귀비"의 발을 입에 넣고 놀았다고 한다.
② "양귀비 (양옥환(楊玉環))"은 당나라 6대 "현종" 때의 미인이다.
어느 날 "양귀비"가 화원에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는데,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현종"은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 수화(羞花)"라고 불렀다. "당 현종(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양귀비"는 719년 "당 현종" 집권 초기에 "쓰촨성 촉주(蜀州)(현 두장옌 시)"에서 태어나, "포주(蒲州)의 영락(永樂)(현 산서성 융지 시)"에서 자랐다. "양귀비"의 고조부인 "양왕(楊汪)"은 "수 양제 양광"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이었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 "정나라"의 "왕세충"을 모시고 살았다. 621년 "당나라"에 의해, "왕세충"이 패배할 때, "양왕"도 살해됐다. "양왕"은 원래 "산서성 화현(현 웨이난 시)"출신이었는데, "양왕"일가는 "용락(현 윈청 시)"에 이주해 기반을 다졌다. "양귀비"의 부친 "양현염(楊玄琰)"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하급관리"였고, "양현염"은 가족과"촉주"로 이사하였는데, 아들이 없었고, "양귀비(양옥환)"과 "양귀비"의 언니를 3명을 낳았다.
"양귀비"가 어렸을 때, "양현염"이 사망하여, "양귀비"는 "하남성 낙양"에서 하급관리로서 근무하던 숙부 "양현교" 슬하에서 자랐다. 숙부는 가정교육에 엄격해,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많은 시문을 외우게 했고, 총명했던 "양귀비"는 숙부 집에 있던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호선무(胡旋舞,삼태극춤)"을 몰래 배웠다. 당시 감찰어사를 맡던 "양옥환"의 친척 "양신명(楊愼名)"과 "양신명의 처"는 "양귀비"를 자신들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자주 초청했는데, 연회의 손님들 중에는 "당 중종 이현"의 딸 "장녕공주"도 있었다. "장녕공주"의 첫 번째 남편 "양신교"는 본래 "양옥환"과 같은 "홍농 양씨"출신이었는데, 마침 "장녕공주"와 "양신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회"가 "당 현종(이융기)"가 가장 총애하는 딸인 "함의공주(咸宜公主)"와 혼인하게 되었다.
"장녕공주"는 이 혼례에서 빼어난 미모로 소문난 "양귀비"에게 들러리를 부탁했고, "양귀비"는 "함의공주"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함의공주"처럼 "혜비 무씨(惠妃 武氏)"의 소생이었던 "제18 황자 이모(李瑁)"는 "양귀비"의 미모에 매료됐고, "함의공주"의 주선으로 "혜비 무씨"도 "양귀비"를 마음에 들어하여, "당 현종"에게 "양귀비"를 "황자 이모(李瑁)"의 "비"로 달라고 청했다. "혜비 무씨"는 "측천무후 무조"의 조카라는 이유로 "황후"에는 봉해지지 못했지만, "당 현종"에게 가장 큰 총애 받는 "후궁"이었기에, "당 현종"은 "혜비 무씨"가 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③ 733년(개원 23년) 16세의 "양귀비"는 "제18 황자 이모(李瑁)"와 혼인했다.
"황자 이모(李瑁)"는 "혜비 무씨"와 "이임보"의 후원으로 "황태자"에 추천됐으나, "혜비 무씨" 사망 후 익년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추천으로, "이여(李璵)"가 황태자로 책봉됐다. "혜비 무씨" 사망 후, 실의에 빠진 "당 현종" 위로하고자, "환관 고력사"는 "혜비 무씨"와 닮은 "양귀비"가 이모와 "황자 이모(李瑁)"와 "화청지(華淸池)"로 피서한다는 사실을 알고, "당 현종"에게 "화청지(華淸池)"로 가라고 권했다.
그 날 이후, "혜비 무씨"를 닮은 미모에 시ㆍ노래까지 능한 "양귀비"에게 감정이 생긴 "당 현종"은 "환관 고력사"와 일을 상의했다. "환관 고력사"는 "양귀비"를 만나 "당 현종"의 의중을 암시했고, "당 현종"은 "양귀비"가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인 "황자 이모(李瑁)"에게서 떼어놓았다. 궁내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양귀비"를 다시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서 불러들였는데, 이때 "양귀비는 22세, "당 현종(이융기)"는 57세였다.
④ 745년 "양옥환"이 27세에 "귀비"가 되면서, "당나라"는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당 현종"이 재위한 초기에는 "개원의 치"를 이룩할 정도로 어질게 정치했지만, "양귀비"가 등장한 후에 "양귀비" 일가의 전횡이 시작되면서, "당나라"는 힘을 점점 잃게 된다. "양귀비"의 3명의 오빠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고, 언니 3명을 "국부인"에 책명할 정도로 "당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했다. 그중 "양귀비"의 사촌 오빠인 "양소"는 "당 현종"에게 이름으로 "국충"을 하사받고, "승상"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한 인물로, "환관 고력사"와 담합해 "당 현종"을 정치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양귀비"의 3째 언니로 "괵국부인 양옥쟁"이 있었는데, 미모가 아름다웠다. "당 현종"은 "괵국부인 양옥쟁"을 보고 반해서, "양귀비"에게 입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양귀비"는 질투하여 이 명령을 거절했고,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당 현종"은 "양귀비"를 퇴궁하게 하였다. 그때, "환관 고력사"와 "양국충"이 두 사람을 화해하게끔 하여, 두 사람은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
⑤ 747년 절도사 "안녹사(안록산)"이 등장하였는데, "양귀비"는 "안녹사"와 친해진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양국충"은 견제하는데, 이것으로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756년(지덕 원년) "가서한"은 "안녹사"에게 대패하면서 잡혔고, "동관"도 함락되었다. "당 현종"은 수도 "장안"을 빠져 나가, "촉(현 쓰촨성)"으로 피난했고, "양귀비ㆍ양국충ㆍ환관 고력사ㆍ 이형(李亨)"도 동행했다.
756.07.15일 "섬서성 마외(馬嵬)"에 이르러, 전란의 원인이 된 "양귀비"를 증오하던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양국충"과 "국부인"들을 처형했으며, "당 현종"에게 "도적의 근본"인 "양귀비"를 죽이라고 요구했다. "당 현종"은 ""양귀비"는 심궁에 있었고, "양국충"의 모반과 무관하다"고 옹호했지만, "환관 고력사"의 진언에 따라, "양귀비"에게 부득이 자살을 명했다.
⑥ "환관 고력사"에 의해, "양귀비"는 비단 천으로 목매달아 죽었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안장하고, "장안"에 돌아간 후 이장을 명했지만, "예부시랑 이규"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당 현종"은 "환관"에게 은밀히 이장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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