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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3대 악녀 ① 서태후 (西太后ㆍ1835~1908ㆍ73세)ㆍ여태후ㆍ측천무후

by 당대 제일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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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西太后ㆍ1835~1908ㆍ73세)"의 죽음은 73세 생일에 몇날 몇일간 계속된 파티에서서 너무 많이 먹어, "이질"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했으나, 청말 중국에서 생활했던 "에드먼드 트렐로니 백하우스"의 책에서 당시 군부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 (원세개 (袁世凱)ㆍ1859~1916ㆍ57세)"의 총격에 의해 죽었다고 기술하여화제가 되었다.

 

1. 중국 3대 악녀

서태후(청나라ㆍ1835)ㆍ여태후(전한ㆍ여씨ㆍBC 241)ㆍ측천무후(당나라ㆍ624ㆍ음탕ㆍ간악)

① 서태후 (청나라ㆍ西太后ㆍ1835~1908ㆍ향년 73세)

청나라 말기 독재 권력자ㆍ함풍제의 3번째 황후ㆍ동치제의 생모ㆍ광서제의 이모ㆍ26세부터 수렴청정

• 47년 간 정치의 실권을 쥐었고,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부의"를 옹립하고는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이튿날인 11.15일 죽었다.

•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장례에 동원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02.12일 종말을 고했다.

• "서태후"의 죽음은 73세 생일에 몇날 몇일간 계속된 파티에서서 너무 많이 먹어, "이질"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했으나, 청말 중국에서 생활했던 "에드먼드 트렐로니 백하우스"의 책에서 당시 군부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총격에 의해 죽었다고 기술하여, 화제가 되었다.

< 살해? >

•  동태후 (함풍제의 2번째 황후): 독이 든 떡을 건네주었다?             

•  동치제 (10대): "황제ㆍ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여, 몰래 "기생집ㆍ사창가"를 드나들었고, 매독에 걸려 죽었다.

•  동치제 황후 : 동치제 사후,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해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살해

•  광서제 (11대): 1898.09.21일, "서태후"가 일으킨 "수구파의 정변(무술정변)"으로 유폐→  10년간 갇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서태후"에 의해 살해

•  광서제 후궁(진비): 우물에 빠뜨려 살해

② 여태후ㆍ여후 (전한시대ㆍ폐후 여씨(廢后 呂氏)ㆍ여치ㆍBC 241~ 180ㆍ향년 61세)

• 전한 황후ㆍ전한 "고조 (유방- 한고조)"의 황후ㆍ전한 "혜제"의 어머니

• 인간 돼지 (척부인 사건)ㆍ"한신" 척살

• 중국사상 최초 정식 황후ㆍ중국 최초 "황태후ㆍ태황태후"이다.

③ 측천무후 (당나라ㆍ則天武后ㆍ무측천(武則天)ㆍ624?~ 705ㆍ향년 81세)

•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ㆍ"무주(武周)"의 초대 황제(당나라 7대 황제)ㆍ최초의 "여성 태상황"

• 중국 역사 2번째 여성 군주ㆍ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 일생동안 살해한 사람(93명): 직계 가족(23명)ㆍ왕족(34명)ㆍ대신(36명)

• 성욕이 넘쳐, 무려 3,000명의 "남첩"을 두고, 77세도 식지 않는 성욕을 유지하며, 미소년들ㆍ신하ㆍ심지어 길거리 고약장수까지 침대로 불러들여, 성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커널링구스 (구강성교)"를 좋아해서, 신하ㆍ고관들의 알현을 받을 때, "커널링구스"를 시켰다고 함.

2. 기타 : 달기포사효성황후 조비연

① 달기 (妲己ㆍ상(商/殷)왕조 말기ㆍBC 11C 경ㆍ주왕(紂王)의 비(妃))

주왕과 달기ㆍ요녀 달기ㆍ주지육림(酒池肉林)ㆍ포락지형(炮烙之刑)ㆍ구미호의 화신이었다

② 포사 (褒姒ㆍ주(周) 왕조 말기ㆍBC 8C 경ㆍ유왕(幽王)의 비(妃)

경국지색 포사ㆍ"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자 이따금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다.

③ 효성황후 조비연 (孝成皇后 趙飛燕ㆍ전한ㆍ ~ BC 1ㆍ성제의 황후)

작장중무 (作掌中舞): 날씬한 몸매의 여인으로,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다는 뜻

3. 서태후 (청나라ㆍ西太后ㆍ1835~ 1908.11.15ㆍ향년 73세)

청나라 말기 독재 권력자ㆍ함풍제의 3번째 황후ㆍ동치제의 생모ㆍ광서제의 이모ㆍ26세부터 수렴청정

47년 간 정치의 실권을 쥐었고,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부의"를 옹립하고는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이튿날인 11.15일 죽었다.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장례에 동원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02.12일 종말을 고했다.

• 재 위 : 1861~1908 (47년)         • 출 생 : 안후이성 우후 설ㆍ네이멍구 후허하오터 설ㆍ산시성 창즈 설 등          본 명 : - 예허나라(葉赫那拉엽혁나랍)          배우자 : 청나라 황제 함풍제 (9)

• 별 칭 : 서태후(西太后)ㆍ나랍태후(那拉太后)ㆍ자희태후(慈禧太后)ㆍ노불야(老佛爺)

• 자 녀 : 1남 1녀 - 동치제 (1861에 등극ㆍ20살에 급사)ㆍ양녀- 영수고륜공주          가 족 : 광서제 (조카) - "순현친왕"과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동치제" 승하 후, 권력유지를 위해, "동치제"와 같은 항렬 가운데, 가장 어린 황족   /  부의 (마지막 황제): "광서제"의 이복동생 "재풍"의 아들 (1908)"광서제" 승하 후, "서태후"가 죽기 직전에 옹립

서태후

"함풍제" 사후, "동치제(아들)"이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동태후(東太后ㆍ함풍제의 2번째 황후)"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 동생의 3세의 아들을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무신변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ㆍ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ㆍ실업(實業)ㆍ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 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 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ㆍ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 죽 음 >

평소 기름진 음식, 특히 "오리고기"를 매우 즐긴 "서태후"는 복부 팽창과 위 기능 저하로 "이질"에 시달렸다. 게다가 매일 연회를 하면서, 과식을 한 탓에 더욱 심했으며, 결국 그로인해 죽게 되었다. 1908.10.23일 정오, "서태후"는 점심 식사를 받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을 남기고,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 하오. 특히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명나라 말기에 내시가 전횡하였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오."

역사에 의하면, "함풍제" 생전에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7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황제의 권력ㆍ부귀를 누리고자 했으며, 죽어서까지 그러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신의 묘"를 "황제의 능묘인 동릉에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황제"가 지녀야 할 통치의 책임ㆍ백성의 안위에 대한 의무는 철저히 무시했다. "서태후"가 집정한 40여 년간, "청나라"에서는 독재가 강화되고, 부패가 만연했다.

"서태후"는 "청나라"를 깊은 혼란에 빠트리고, "망국의 길"로 인도한 안내자가 되었다. 그녀 생애에서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오문의 중간문(자금성 정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서태후"가 비록 47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① 악 행

• 청일전쟁(1894.07~1895.04) 동안, 유린당하는 "청나라"를 걱정하기보다는 "이화원"에서 자신의 60세 생일 연회를 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 이화원 (頤和園): 북경 서북부의 하이뎬 구에 위치한 정원 공원ㆍ궁전ㆍ서태후의 여름 피서지ㆍ1750년(건륭제15)에 공사를 개시하였고, 1860년(제2차 아편전쟁)때, 모조리 약탈당했다.  1900년(의화단 운동) 때도 공격당하였다. 서태후에 의해, 1886년ㆍ1902에 재건되었다. 서태후는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 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 부었다고 한다.

• 1890년, 중국에서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인 "의화단 운동(1899.11~1901.09)"이 발생했다.  "서태후ㆍ광서제"는 평복 차림으로 "서안"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ㆍ혁광"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1901.09월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

• 그녀는 매일 저녁, "아기 엄마의 젖"을 먹었다. 2명의 "아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붉은 천으로 젖만 내놓고 온몸을 다 감싼 후, "서태후"가 침대에 누운 후, "아기 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이도록 했다. (중국에 여인들이 남자한데 "쎈양"하는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한데서 전해졌는가 보다. 쎈 양 : 중국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유를 먹는 풍습)

• 사진 속 그녀의 손톱은 매우 긴데, 이 손톱은 "은"으로 만든 인조손톱이고, 귀족 권위ㆍ부를 상징한다.  (즉,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 이 손톱은 음식에 독을 탔는지, 감별하는 데에도 쓰였다고 한다.

• "궁녀ㆍ내시ㆍ대신들"은 그녀를 무척 무서워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린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녀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하여,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 내시들이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일반인이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 건 정상)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길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 한 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ㆍ작은 빵이 30가지ㆍ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 kg이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 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10,000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 옷은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는 사치꾼이었다.

•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태후 시대의 개막 : 신유정변 (辛酉政變ㆍ기상정변ㆍ북경정변)

1861.11.02.일, "청나라 북경"에서 "서태후ㆍ공친왕(함풍제 동생)" 등이 일으킨 궁정 쿠데타

"함풍제"가 "열하"에서 사망하자,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북경파"와 "숙순"을 대표로 한 "열하파"가 권력 대결을 벌였는데, 결국 "서태후ㆍ공친왕"이 함께 정권을 장악하였다.  "함풍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동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마마나 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것입니다.  재원과 단화, 숙순 등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라곤 없을 것이니, 공친왕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시렵니까?"  "동태후"는 "서태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 공친왕 혁흔 (恭親王 奕訢ㆍ공충친왕(恭忠親王)ㆍ1833~1898ㆍ향년 65세) : "도광제(道光帝)"의 6남ㆍ함풍제의 이복동생ㆍ청제국 황족종실ㆍ군인ㆍ정치가 (동치제의 섭정)  "2차 아편전쟁" 시, "함풍제"의 명으로 사태수습→ "베이징 조약" 체결ㆍ 연합군 요구를 거의 수용.  "의정왕(議政王)ㆍ군기대신(軍機大臣)ㆍ총리아문의 장관"으로, 구미외교 전담→ 1884년 "청불전쟁"의 발발과 함께, 탄핵을 받아 사임

③ 생 애

"청나라""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8기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35"로 나누는데, "서태후" 가정은 "3"에 속하는 귀족 집안이었다1835,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엽혁나랍 혜징"이라는 말단 관리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소겸(王小謙)"이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부친이 누명을 쓰고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4세 때, "장치현 상진촌""송사원"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로 바꾸었고, 12세 때, 다시 "노안부 지부 혜징"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난아(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1851(16), "예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1852.05.09.(17)의 나이로, 수려한 외모로, "예허나라 혜징의 "이라는 신분으로 "함풍제의 수녀(궁녀)"선발되어 "황궁"에 입궁하였다.

17세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1년 동안 노력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황제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다"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 소리를 따라 가보니, 웬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왕자를 출산했다(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1856.03, 아들 "재순(동치황제)"을 출산하여, "의비", "()"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의귀비",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궁녀"에서 "귀인"을 거쳐,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도 점점 커져 갔다.

섭정 체제 (신유정변)

1860"2차 아편전쟁"으로, "-프 연합군""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태후""함풍제동태" 함께, "열하(熱河지금의 하북성 승덕) 피서산장"으로 피난을 갔다"영국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하게 된 "함풍제"는 북쪽 지방을 "러시아" 점령당하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함풍제""서태후"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정을 어지럽히면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861.08"함풍제""피서산장"에서 병사하고, 6세의 어린 "동치제" 황위를 계승하였다"동태후""동치제"의 양모였고, "서태후"생모였다"동치제"가 즉위하자, "서태후""황후 뉴호록씨(동태후)"와 함께 "태후"가 되었고, 각각 "자희(慈禧)" "자안(慈安)"이라는 휘호를 받았다.

1861"서태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숙순" 등의 대신들을 숙청하였고, 연호를 "기상()"에서 "동치(同治)"로 고치고, "동태후"와 함께 섭정에 나섰다(신유정변). 두 태후의 섭정 외에도 "동치제"의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당시 정국에는 혼란이 가중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어 하는 "동치제" 간에는 알력이 생겼다. "동치제"20세의 나이에 급사했다.

1874.12, "서태후"는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4살 밖에 안된 여동생의 아들 "재첨"을 양자로 삼고, "황제(광서제)"로 옹립한 다음,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했다이로부터 "청 왕조""황위의 부계" 세습 전통이 끊어지게 되었다(광서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관례상 차기 황제는 "동치제"의 다음 항렬에서 간택해야 했지만, 그 경우 "황태후"의 자격으로 "섭정" 할 수 있는 것은 "동치제"의 황후인 "효철의황후"가 되기 때문에, "서태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치제"와 같은 항렬 가운데, 가장 어린 "황족"을 고르기로 했다그리하여 "서태후""순현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 "재첨(광서제)"을 황제로 삼고, "수렴청정"이라는 명분하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서태후""광서제"를 엄격히 교육하는 한편,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신경을 쓰며, 돈독한 모자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스승 "옹동화"에게 "광서제"가 학문을 배울 때에는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으며, 업을 마친 "광서제"가장 먼저 "서태후" 앞에서 그날 공부한 내용을 암기했다또한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황제의 결혼"에 간섭하기 위하여, 자신의 또 다른 조카인 "정분" "광서제 황후"로 간택했으며, 두 후궁인 "근비진비"도 직접 골랐다

이처럼 "서태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광서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서태후"가 사사건건 정무에 간섭하고, 권력을 완전히 넘겨주지 않자, "광서제"는 점차 그녀에게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1886, "서태후""" 연합군에 의해 불탄 "청의원(, 이화원)"을 재건하고, 그 이듬해에 "수렴청정" "훈정(訓政)"으로 고쳤다1889, 명분상으로는 "광서제"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으나, 실제로는 내정외교의 대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과 치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양무운동변법자강 운동무술변법무술정변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을 무렵, "청나라"는 외세의 압력과 봉건 질서의 붕괴로 근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증국번이홍장" 등 한인 출신 관료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꾀하려 하였고, "서태후"를 비롯한 "만주족 지배층" 또한 이를 지지하였다그러나 "일 전쟁"의 패배 등으로 인해 "양무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도 세력들도 몰락했다.

한편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1889"캉유웨이""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에 관심을 보였고, "서태후"에게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캉유웨이"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다1898"광서제""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서를 내려, "캉유웨이"의 개혁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무술변법). 

"서태후"도 초반에는 "변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광서제"의 목적이 권력을 이양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변법"을 지지하는 "유신파"를 제거하려 했다"유신파"의 핵심이었던 "담사동""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서태후"를 감금하라고 부탁했고, 상황이 "유신파"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안 스카이(원세개)"는 이 사실을 "서태후"의 심복 "영록"에게 고했다.

"서태후""자금성"으로 돌아와,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켰고, 황제의 병을 이유로 다시 "섭정"이 시작되었으며, "진비(광서제의 후궁)"는 매관매직을 했다는 이유로 "북삼소"에 가두었다또한 "담사동양예"를 비롯한 "유신파"의 핵심 인물들을 죽이고, "변법조치"들도 취소했다이로써, 변법은 103일 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의화단"의 난신축조약

"서태후""광서제" 대신 "단친왕(端親王) 재의"의 아들 "부준(溥儁)"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다각국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열강의 공사들은 "부준(溥儁)""대아가(大阿哥: 황태자) 책봉"에도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

"서태후단친왕(端親王)"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러시아일본영국프랑스미국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도록 하였다1890, 중국에서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 "의화단 운동(1899.11~1901.09)"이 발생했다"의화단"에 의해, 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1900.08, "서태후""광서제"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그 과정에서 "서태후""진비(광서제 후궁)" 우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서태후광서제"는 평복 차림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혁광"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이로 인해 1901.09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1902.01, "서태후""광서제"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를 "영대"에 구금하였다"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오만하고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고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그때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사치를 다시 일삼았다.

말년죽음"광서제"의 죽음"부의" 황제

북경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감금 상태에 있었던 "광서제"1908년 죽자, "서태후""광서제"의 이복동생 "재풍"의 아들 "부의"를 황제로 정했다1908.10.13, "서태후"74세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다평소 기름진 음식, 특히 오리고기를 매우 즐긴 "서태후"는 복부 팽창과 위 기능 저하로 "이질 (痢疾전염병의 하나로, 배가 아프고, 변에 곱과 피가 섞여 나오며, 뒤가 잦은 병)"에 시달렸다. 게다가 매일 연회를 하면서, 과식을 한 탓에 더욱 심해졌으며, 결국 그로인해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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