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金鍾泌ㆍ1926~2018ㆍ92세)"은 1961년 "5ㆍ16군사정변"을 계획ㆍ실행을 기획했으며, "박정희"와는 인척ㆍ최측근ㆍ박정희 2인자로 불렸으나, "박정희 장기집권"을 위해 견제를 당하기도 한 미묘한 사이다. "박정희 정부ㆍ김대중 정부"에서 "권력의 2인자인 국무총리"로서 장기간 재임하면서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10.26ㆍ사건"으로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해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7년 "민주화 선언" 이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김영삼ㆍ김대중"과 함께, "3김(三金)"으로 불리며 주요 정치인으로서 활동하였다.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다.
1. 김종필 (金鍾泌ㆍ1926~2018ㆍ향년 92세)
초대 중앙정보부장ㆍ국무총리 2회(71~75ㆍ98~2000)ㆍ9선 국회의원(최다선- 김영삼ㆍ박준규ㆍ(6~10ㆍ13~16))ㆍ박정희 정권의 2인자ㆍ박정희가 5ㆍ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중령으로 정변에 참여ㆍ박상희(박정희 3째 형ㆍ朴相熙ㆍ1906~1946))의 딸 박영옥(朴榮玉ㆍ1929~2015ㆍ86세)과 결혼
• 출 생 : 충남 부여군 외산면 • 거 주 : 서울 중구 신당동 • 본 관 : 김해 • 종 교 : 불교→ 개신교
• 호 : 운정 (雲庭) • 별 칭 : J P • 좌우명 :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ㆍ상선여수(上善如水ㆍ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 학 력 : 1944 : 공주고등보통학교ㆍ주오대학교 법학과 중퇴 → 1945 : 대전사범학교ㆍ보령군 소학교 교사(2개월) → 1946 : 경성사범학교(사회교육과)ㆍ8월 서울대 사범대학으로 통합 → 1948 : 서울대학교(교육학과) 3년 수료 → 1949 :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준장)
• 자 녀 : 1남 1녀ㆍ딸 : 김예리(金禮利ㆍ1951) / 아들 : 김진 (金進ㆍ1961) 환경무역업 경영ㆍ처- 리디아(1962ㆍ미국 국적 과테말라 출신)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타대학교에 유학 중, 만난 과테말라 여성 리디아와 결혼했는데, 당시 측근의 진술로는 "김 총리가 미처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진씨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다음이라, 김 총리도 속수무책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가 족 : 부 : 김상배(1887~1962ㆍ토지측량사ㆍ규암면장ㆍ부여면장)ㆍ모 : 이정훈(1899~1978) 7형제 중 5남 / 형 : 김종호(1917~1998) 종로구청 주사ㆍ중앙곡물협회 회장 / 김종익(1918~2000) 5ㆍ16군사정변 참여ㆍ민주공화당 의원ㆍ3선 국회의원(6ㆍ7ㆍ8대) / 김종락(1920~2013) 대한야구협회 상임고문 역임
• 장 인 : 박상희(1905~1946) 독립운동가ㆍ기자ㆍ조선일보 지국장ㆍ동아일보 구미지국장 / 처숙부 : 박정희 / 1917~1979) 대통령 / 사촌 처제- 박재옥ㆍ박근혜ㆍ박근령 / 사촌 처남- 박지만
• 수 상 : 은성 충무무공 훈장(1955)ㆍ일등보국훈장 통일장(1963)ㆍ청조근정 훈장(1971)ㆍ수교훈장 광화대장(1974)ㆍ적십자대장 태극장(1975) • 저 서 : JP 칼럼ㆍJP 화첩ㆍ새 역사의 고동
"박정희"가 "5ㆍ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제2공화국(장면 내각)"시절,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 운동"을 벌이다가,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되었고,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ㆍ16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하고, 35세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9선 국회의원"으로 최다선 국회의원 출신이며, 제11대ㆍ31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제3ㆍ제4공화국" 당시 "2인자"였으며, "김영삼ㆍ김대중ㆍ이철승"과 함께, "박정희의 후계자ㆍ잠재적 대안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김영삼ㆍ김대중"과 함께 "3김"이라 불리며, 한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ㆍ자유민주연합" 등의 총재를 지냈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의 중심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해 활약했지만,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했다. 1979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년, "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95년 탈당하고, "자유민주 연합"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2. 평 가
① 긍정적 평가
"3김" 중 1인으로로 "대한민국의 2인자"로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비록 헌정을 붕괴시킨 사건이었지만, "5ㆍ16군사정변"의 시스템을 설계하여, 안정적으로 관리하였고, 훗날 "국가정보원"이 되는 "중앙정보부"를 설립하여, "공안 정보기관"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고, 이런 "김종필 시스템"으로 독재정권이기는 하나 "박정희 정권"을 안정시켜, 안정적 경제발전을 기여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② 부정적 평가
"5ㆍ16 군사정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군사정권" 출신이며, "박정희 정권에 부역하였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 진영"에서는 1998년 "DㆍJP 연합"으로 정권교체에 기여한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밖에 "김영삼ㆍ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며, "충청권의 맹주"를 자임하며, "지역갈등ㆍ지역정치를 조장했다"는 점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3. 1965년, 한일협정ㆍ한일기본조약 : "김- 오히라 메모" 합의
1961.11.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총리"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박정희"의 협조 요청에 따라,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 한국에 입국했다. 1962년,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내용은 "김- 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1962.10.20(1차 회담ㆍ서울)ㆍ1962.11.12(2차 회담ㆍ일본),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ㆍ약탈 문화재 반환ㆍ재일동포 지위ㆍ동해어업권ㆍ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ㆍ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ㆍ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 버렸다. 이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문제점과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① 1962년, "김-오히라 메모" (김종필- 오히라 마사요시) : "6ㆍ3 학생운동사"중에서
김종필과 오히라의 회동 이후에도 1962년 케네디-요시다의 회담, 1963.11월 존슨-박정희의 회담 등을 통하여 한일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회담 타결이 막바지에 이른 1964년 미국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극동문제담당차관 등이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과 한국의 조속한 수교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② 김종필 메모
청구권은 3억 $(무상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 장기 저리 차관도 3억 $로 한다 • 한국의 대일무역 청산계정 4,600만 $는 청구권 3억 $에 포함하지 않는다.
③ 오히라 메모
청구권은 3억 $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 무역 계정 4,600만 $는 청구권 3억 $에 포함한다 •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④ 합의 사항
무상공여 3억 $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는 3억 $ 중에서 상쇄한다 •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ㆍ20년 분할 상환ㆍ연리 3푼 5리 (정부 차관) •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 (민간 차관)
⑤ 6ㆍ3 학생운동 (1964년, 한일협정반대 학생시위): 한일기본조약 비준
1964.01월부터,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월에는 "5ㆍ16" 이후 없었던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 시위는 1964.06.03일에 절정을 이루어, "6ㆍ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하여, 1965.02월에는 "기본조약"이,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었다.
1965.06.22일,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08.14일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하였다. 1965.12.18일 오전10:30분,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4. 어 록
• 김종필 사망 : "이건희"가 "큰 형님이셨는데, 마음이 아프다"며, 울었다고 한다.
•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 上善若水ㆍ김종필의 좌우명
•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 : 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자
• 자의 반 타의 반 : 1963.02.25, "4대 의혹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 5ㆍ16이 형님이고, 5ㆍ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 : 1987.11.03, 관훈토론회
•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ㆍ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 : 1987년 저서 "새 역사의 고동"
•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중략)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 신임 보안사령관이 前 정권부정부패의 책임을 진 김종필을 위로차 방문한 자리에서 조언을 구하자 건넨 말
•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ㆍ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ㆍ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 : 1993.05.16. 5ㆍ16 민족상 시상식
•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 1990.10월, 노태우 민주자유당 총재 후보로 추대하며
•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 : 1995.01.01, 민자당 대표시절, 민주계의 대표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덕담하자
• 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 사람들은 핫바지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 이런 뜻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평한 겁니다 : 1995.06.13,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유세
•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다 :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
•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 : 1997.05.29,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 이인제 후보가 우리를 늙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씨름 한 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코 이 후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젊다 : 1997.12.03, 충북 괴산 정당연설회에서
•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 1998.06.27, 총리서리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덜어질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 43년 동안 정계에 몸담으며 나름 재가 되도록 탔습니다. 일찌감치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세워놓고 떠나려고 욕심을 부렸던 건 뿐이지요. 노병은 죽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겁니다 : 2004.04.19, 17대 총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5. 경 력
1945 : 대전사범학교 졸업 후, 보령군 소학교 교사 발령ㆍ교편 잡은 지 2개월 만에 사직ㆍ경성제국대학 재학 중 광복, 아버지가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회사 운영ㆍ재력 축재 → 1948 : 서울대 교육학과 수료 후, 군 입대→ 1주일 만에 탈영(구타ㆍ굶주림)→ 육사 교도대와 만나 자수→ 육사 기간병으로 재입대→ 육사 8기생으로 입학→ 2개월 후, 소위로 임관→ 1949 : 육군본부 정보국 중위→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 무너지는 전선 시찰ㆍ전세를 정확히 보고→ 1계급 특별 승진하여 육군 대위
1951 : 박영옥 (박상희 (박정희 대통령형) 딸)과 결혼 → 1958 :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 소령→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중령→ 육군 본부 정보처장 (8기의 불만 : 다른 기수보다 소령→ 중령으로 진급이 8년 정도 늦었음, 군 운영체계에 불만)
1960 :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장ㆍ08.24일, "석정선 중령"과 같이 성당 미사 중이던 "장면 총리" 면담→ 서면으로 정군 요구→서면은 미전달→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 장면 내각은 숙군 단행의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하는 것으로 파동 마무리→ 육군 중령으로 예편→ 1960 :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 → 1961 : 04.19일, "4ㆍ19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 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거사 실패
05.16일, "5ㆍ16 군사정변" 준비→ 성공 후, 육군 중령으로 현역 복귀→ 대령→ 준장 → 1961.05~63.01 : 중앙정보부장 (초대)ㆍ1년9개월 → 1962 : 일본 외무상 "오히라"와 한일협정 회담ㆍ10.20(1차 회담ㆍ서울)ㆍ11.12(2차 회담ㆍ일본) → 1963.12~67.06 : 국회의원(6대ㆍ부여군)ㆍ민주공화당 → 1967.07~68.06 : 국회의원(7대ㆍ부여군)ㆍ민주공화당 → 1971.05~72.10 : 국회의원(8대ㆍ비례대표)ㆍ민주공화당→ 국회해산(72.10)
1971.06~75.12 : 국무총리(11대) 4년6개월ㆍ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정희와 갈등 → 1975.12 : 국무총리 직에서 경질 → 1973.03~79.03 : 국회의원(9대ㆍ국민회의)ㆍ유신정우회 간선대표 제1ㆍ2기→ 임기 6년 → 1979.03~80.07 : 국회의원(10대ㆍ부여/서천/보령군)ㆍ민주공화당 → 1979.11 : 박정희 사망 후, 민주공화당 총재ㆍ"5ㆍ16 민족상" 재단 총재
1980.05~05.18일 새벽 : "5ㆍ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보안사에 체포ㆍ감금 → 신군부에 의해 정계 강제 은퇴ㆍ"운정재단"을 운영하며 사회사업에 종사 → 1980.05~87 : "5ㆍ17 쿠데타" 이후 정치활동 정지ㆍ야인생활 → 1987.10 : 정계 복귀ㆍ신민주공화당 창당ㆍ총재ㆍ구 민주공화당 + 국민당(유정회 후신)을 흡수 → 1988.05~92.05 :국회의원(13대ㆍ부여군)ㆍ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1990~1995 : 3당 합당 : 김영삼(통일민주당)+ 노태우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통합→ 민주자유당 → 1992.05~96.05 : 국회의원(14대ㆍ부여군)ㆍ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 1995 : 민자당 총재 사퇴ㆍ탈당ㆍ"자유민주연합" 창당 → 1996.05~2000.05 : 국회의원(15대ㆍ부여군)ㆍ자유민주연합 → 1997~2001 :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 차이가 있는 "김대중"과 손잡고, "DㆍJP연합" 결성
1998.03~2000.01 : 국무총리 (31대) 대통령 김대중ㆍ전임-고건ㆍ후임-박태준 → 1998.03~98.08 : 국무총리 서리 5개월 → 1998.08~2000.01 : 국무총리(31대)ㆍ김대중 정부(1998~2003ㆍ국민의 정부) 1년5개월 → 2000.05~2004.05 : 국회의원(16대ㆍ비례대표)ㆍ자유민주연합 → 2004 : 한나라당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권한"이 발의되자, 탄핵에 동의 → "자민련" 비례대표 1번 낙선→ 총재직 사퇴→ 정계은퇴 → 2005 이후 :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ㆍ자유선진당" 등이 창당되었으나, 불참 → 2007 : 대선에서 "이명박(한나라당 후보)"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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