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金炯旭ㆍ1925~1979.10.07ㆍ54세)"은 "5ㆍ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3~1969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맡았고,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가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 뒤 "유신" 후반,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며 마찰을 빚다가, 1979.10.07일에 "파리"에서 실종되었고, 1984.10월에 정식으로 사망 신고되었다. 1990년 서울지방법원에서도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2005년, 미국에서 "김형욱의 가묘"가 발견되기도 했다.
1. 김형욱 (金炯旭ㆍ1925~1979.10.07ㆍ향년 54세)
군인(육군 준장ㆍ8기)ㆍ중앙정보부장(63.07~ 69.10월)ㆍ정치가(무소속 국회의원(8대))ㆍ대한사격연맹 회장ㆍ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 출 생 : 일제 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 실 종 : 1979.10.07일, 프랑스 파리 (정확한 사망 장소 불명)
• 별 칭 : 남산 멧돼지 • 호 : 봉산(鳳山)ㆍ산남(山南)
• 학 력 : 1949년 육군사관학교(8기) → 1963년 경희대 정치외교학 학사 → 1967년 경희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 처 : 신영순 • 자 녀 : 아들- 김정한 • 경 력 : 육군 준장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에도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국회의원 이만섭"이 그의 해임건의안을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야당과 주변의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1969.10.20일 그를 해임시킨다. 이후, 그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72.10.17일에 "유신"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자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박정희"에게 깊은 원망을 품게 된다.
1973.04.15일, 그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과 같이 "타이완"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 뉴욕"에 건너가 살았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정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였다. 1973.04월, "김형욱의 미국 망명" 직후, "박정희"는 "정일권ㆍ김종필ㆍ김동조ㆍ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한 바 있다. 계속되는 고위층들의 설득에도 "김형욱"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7.06.02.일에는 "뉴욕 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비리를 폭로했다.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폭로에 나선 이유는 1969.10월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1973.0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이에 따라 "미국"에서 "간첩 김대중 내란범죄 체포사건"을 비롯한 각종 "박정희 정권"을 폄훼하는 나팔수가 됐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를 강력히 비난하고,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했다.
1977년,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그는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이어 "일본"으로 가서 "김경재"가 쓴 회고록의 출판회를 가졌다. 이 책은 1980년대의 밀리언셀러가 된다. 이에 "박정희"도 보복을 위해, 김형욱을 노린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1977. 12.31일에 제정한다. 회고록 출판을 두고, "윤일균(중앙정보부 차장보)"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ㆍ중앙정보부"는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막고자 자주 접촉했고, "김형욱"도 몇 십만 $를 대가로 합의, "회고록 원본"을 "중앙정보부"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겨둔 "회고록 사본"을 "일본 출판사"가 김형욱과 합의 없이 출판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후 1979년 "윤일균(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고, 1979.10.01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10.07일, "파리"에서 "이상열(주 프랑스 공사)"를 잠시 만난 후 헤어졌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2. 육사 8기(중령)ㆍ중앙정보부장(4대)ㆍ국회의원(8대)ㆍ미국 망명 이후, 행방불명
• 황해도 신천군 온천면 출신 → 친분 있는 사람에겐, 이권도 주는 의리의 사나이 → 어린 시절 집안이 매우 빈한하여, "초등학교"만 졸업 → 1943년, "베이징"에서 "일본군 헌병보" 전력 때문에 "공산당"에 혼쭐 → 서울로 남하한 후 군에 입대
• 48.12 : 육사 8기생으로 입교 시 "육군 상사"→ 동기생 1,000명 가운데, 최하위권 성적으로 졸업
• 63.07~ 69.10 (육사8기 핵심ㆍJP와 더불어 3선 개헌 마무리ㆍ3공 정권 기틀장악) : 저돌적인 추진력 : 남산 멧돼지ㆍ돈까스 : JP에게, "정보부장"이 되도록 해달라고, 애걸복걸→ JP 후광으로 "부장"이 됨ㆍ "JP 라인"이지만, "JP 하수인"이길 거부→ JP계 인사 배척 : 박통과 직거래로, 신뢰관계 구축 : 신직수(7대)차장 기용 : 박통 5사단장일 때, "법무관"으로 보좌, "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
• 63.08.08 : "송요찬(전 내각 수반)-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 광고 (동아일보에 광고) "박정희 의장은 물러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 63.08.11 : 살인ㆍ살인 교사혐의 구속, 경무대 앞 발포사건 / 6ㆍ25 당시, 명령 불복종으로 "조영구 중령" 즉결 처분 → 63.09.15 : "송요찬" 기호 2번으로 "자민당" 후보로 옥중 출마
• 63.08 : "김재춘(자민당 최고의원) → 이후락ㆍ정보부 입회하에 기자회견 후, 해외로 추방 → 63.10.07 : "송요찬" 대통령 후보 사퇴 → 11.02 : "송요찬" 자민당 탈당 성명 (옥중) → 11.11 : 육본 보통군법회의(김계원 재판장)→ 병보석 결정 → 63.10.15 : "대통령 선거(5대)"에서 "박정희" 당선
① "김형욱"의 미국 망명
• 71.05 :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 진출 (순번 :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길재호→ 김형욱)
• 72.08.03 : "8ㆍ3 사채" 동결조치 → 김형욱이 자본 이용하여, 상당액을 익명으로 기업체에 빌려주었는데, 채권신고 시 실명이 드러나기 때문에, 돈을 전부 떼이고 만다. "대통령 긴급조치권"에 따라, 기업-채권자의 채무채권 관계를 08.03일자로 무효화 →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하는 충격적인 경제 조치 → 무신고 할 경우, "사채 청구권ㆍ담보권" 모두 소멸
• 73.03 : "유정회" 의원 명단작성 시, "김형욱"을 배제 → 졸지에, 무직자 신세ㆍ1971년 김대중 정치자금ㆍ유신정권의 부정축재자 색출 등에 따른 불안감 (미국으로의 망명 결심) → 73.04.15 : "중화 학술원"의 명예박사 학위수여식 참석을 이유로, "외교관 여권"으로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대만 행" → 73.04.21 : "대만"에서 "도쿄" 경유하여, "뉴욕 행" ("김계원"이 "대만"에서 "김형욱"을 배웅함) → 76년 까지 : 침묵→ 술ㆍ도박으로, 세월 허송
• 77년 : "미 하원"의 "박동선 사건" 청문회 때, "유신체제" 비판, "김경재(재미 반유신세력 핵심인물)와 같이, "박정권 타도"를 위한 회고록 집필 → 유신정권 결정타 : 79.10 (54세): 회고록 완성될 즈음, 파리에서 "영원한 실종"
②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 김형욱의 "김대중 후보" 지원
• 1971년 : 비밀리에 "김대중 후보" 선거자금도 헌금ㆍ자기 사무실도 무상임대. "3억 원을 밀어주었다"고 최고 → "중정부장"으로 컴백하는 것이 꿈 → "김상현(김대중 비서실장)"을 "중정"시절 잘 통한 기업인(특히 이북출신)과 상견례 시키고, 정보 제공 → 박통에 대한 반감ㆍ야당 보복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 / "4인 체제"와 통하는 "유진산 계ㆍ김영삼"을 누르기 위함.
• 1973.04월, 미국에 망명하는 계기 → "김상현"이 "유신선포" 후, "중정"에서 사경에 이르게 맞으면서, "대통령 선거자금 출처 추궁"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됨.
③ 7대 대통령 선거 (직선제) : 1971.04.27
• 박정희(634) ⇌ 김대중(540만) → 94만표 차 → 박정희 3선 성공 / 박정희 : 경북(92만 차)ㆍ경남(58만 차)→ 계 : 150만 차
• 박정희 : 대선자금으로 700억 사용 (국가예산 5,240억(예산의 13% 사용))
• 유권자- 15,552,236명 (투표율 80%)- 박정희(6,342,828)ㆍ김대중(5,395,900)ㆍ진복기
• 1969년 : 박정희는 "대통령 3선연임 허용"을 골자로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토대 마련ㆍ자신들이 만든 "3공화국 헌법"에 대통령 임기는 "1공화국 헌법"과 같이 "재선"으로 제한을 했는데 "3선 개헌"을 꿈꾸고 있었고, "3선 개헌"을 위해 "중정"을 비롯한 기관에서 비밀리에 공작을 했으나, 당시 "김종필" 등 다수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회유에 그만 찬성하고 말았다. "3선 개헌" 국회 표결도 야밤에 불법으로 결행하여, 헌법에 오점을 남겼다.
• 김대중(신민당) 패인 : 김종필의 유세가담ㆍ박정희의 마지막 출마공약ㆍ신민당 중진들의 태업ㆍ엄창록의 막판 배신
3. 과잉충성 : 김형욱 (정보부장)ㆍ윤필용 (방첩부대장)
• 1964년 : "정승화"로부터 "방첩대장(자유당시절 "김창룡 특무대장"→ 정권의 하수기구로 운영) "인수→ 정부 전복 음모 적발 (보안사ㆍ기무사의 전신)
• 65.05 : 원충연 대령(정훈학교 부교장)ㆍ박인도 대령(2군단 포병사령관)ㆍ이모 소령(결의사항을 녹음기로 채록→ "방첩부대"에 밀고)
• 65.09 : 고다마 사건 (박종규 실장 : "사설 정보대" 두고, 첩보수집) JP계 "김용태ㆍ석정선"이 일본 정상 "고다마"와 만나, "한국에서 뭘 하려면 실권자 JP와 손잡아야한다. JP가 있으니 박통이 있다."는 내용을 "박종규 실장"이 도청 ※ 고다마 요시오(1911~1984): 극우 운동가ㆍCIA 요원ㆍ폭력조직 금정회(후의 도천회) 고문ㆍ정재계의 흑막ㆍ해결사ㆍ우익의 거괴
• 67.07 : "정보 보고"에 따른 "김형욱ㆍ박종규" 갈등 시작→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김옥희(박종규 여비서)"구속→ "박종규 실장"이 "김형욱 부장"에게 석방요구
• 67.07.08 : 동백림 간첩단 사건, 동베를린 사건 (동베를린 간첩단ㆍ동베를린 거점 대남간첩단) • 발생 : 1967.07.08~ 1969.03.31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 (간첩단 사건)) • 장소 : 동 베를린 (동독)
• 관련 : 천상병(시인)ㆍ윤이상(50ㆍ재서독음악가ㆍ전 서독한인회장)ㆍ이응로(63ㆍ재불 화가)ㆍ민족주의비교연구회(서울대 문리대)학생 등 104명 구속 / 천상병-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심한 고문ㆍ옥고로 몸ㆍ마음이 깊이 상해, 가난ㆍ방탕ㆍ주벽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6개월 구금(전기고문 등)ㆍ행려병자로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유치. 생사를 몰라, 친구 시인들이 "새" 라는 유고시집 발간
• 68년 : 총선(6대) 당시, "경호실 간부(7명)ㆍ비서실 비서관(10명) 등 "청와대 요원(20명)"이 입후보할 궁리만 한다고 박통에게 보고→ 실제는 2명 (박종규 실장ㆍ이후락 비서실장 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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