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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암살 • 학살 • 수용 • 살인

학살- 1948.04 : 제주 4ㆍ3사건 (3만 명 사망ㆍ제주인구 10%)

by 당대 제일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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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ㆍ3 사건"은 1948.04~ 1954.09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ㆍ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이후 1948.10.19일 "여수ㆍ순천사건"을 발생하게 한다.

 

1. 제주43사건 (제주도 민중항쟁)여수순천사건(1948.10.19) 발생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남한단독 정부수립""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처형됐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일 시 : 1948.04.03 ~ 1954.09.21.

주 도 : 남로당 제주도당(좌익세력)총책임자 : 김달삼

피 해 : 25,000~ 30,000여 명 (민간인 학살, 당시 제주도민 30만 명의 10%)

백조일손묘역

 백조일손묘역 (百祖一孫墓域)

"제주 43항쟁" 사건발생 직후, "군부대 연대장" "봉기군 사령관" 사이의 "평화협상"이 합의되어 진정될 기미가 보였으나, 우익 세력인 "서북청년단"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이것을 "봉기군"의 소행으로 누명을 씌우면서 협상은 깨졌고,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연대장"이 해임되고, 제주도 출신이 아닌 외부 출신으로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연대장이 임명된 후, "빨갱이들을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제주도 전역"에서 학살이 자행된다.

1년이 지난 1949년 초, 사태가 진정되며, 학살의 광기가 끝나는 듯했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 "43항쟁" 때 체포되었던 사람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잡아들여, "집단 학살"을 벌이는데, "알뜨르 비행장 옆 섯알오름"이 그 현장 중 한 곳이다.

인근 "대정한림"의 주민 200여 명을 끌어다가, "학살"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전쟁이 끝나고도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7년이 지난 1957년에야 현장을 찾았는데, 로 엉킨 유골을 구분할 수 없어서, 함께 모아 ""를 만들어, 그 억울한 죽음을 추모할 수 있도록 든 곳이 "백조일손지묘"이다.

 

2. 시대적 배경왜 유독 "제주"에서만 선거구가 불탔나?

소 군정기 시작 (북위 38도선): 우리민족 스스로 힘이 없어, 독립 쟁취 불가 1945.09.09~ 1948.08.15 : 미군정시대미국의 남한지역 군사통치 시대  (미군정)친일파 경찰공무원 등용 (미국의 적은 소련이었다.)

소련과의 대치상황의 수습이 중요하고, 친일청산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1946년 말, 군정경찰 간부 82%가 일제경찰 출신)  서북(평안도)청년단 : 해방이후, 평남함북함남황해 청년회 등 이북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11.30일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단체

1948.05.10 : 남한만의 단독선거(200개 선거구김구민족지도자는 불참거부세력 상실 사회주의자 활동 : 제주도 선거구 3개구 중 2개구 전소투표율 미달로 선거불발198명 선출제주도는 "사회주의자의 섬 (빨간 섬)"으로 낙인

조선시대 : 유배지로 "광해군(1637)김정희" 200여 명의 유배, 가혹한 진상부역으로 고통

일제시기 : 일본과 근접거리징용징병으로 인적수탈 /  패방 전, 군사기지화(지정학적 요충지)강제 노역 / 1945년 광복시일본군 5만 명이 제주도 주둔

해방이후 : 1945.09 "제주도 인민위원회" 창립

 

3. 사건 일지

1946.08.01 : 제주도 (전라도 부속)에서 제주도()로 승격

상황- 높아진 실업률(일본에서 60,000명 귀국)전염병 창궐흉작경제적 어려움(전라도의 지원 중단세금의 증대)경찰기구 확대(일제강점기 제주경찰 101육지에서 응원경찰 수급1947.02330명으로 증원미군정에 대한 불신불만 증가

1947년 : 좌익세력 색출 명분194871년 동안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을 검거고문

1948.03.01 : 31 경찰 발포사건 시작

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31정신 계승과 자주독립을 기치로 제주도내 10개면에서 열린 행사)제주북국민학교에 3만여 명의 군중 집결관덕정에서 평화 가두시위 행사응원경찰 충원(100)기마경찰 말발굽에 6살짜리 어린이가 치이는 사고 발생기마경찰은 그냥 도주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군중을 보고, 폭동으로 오인경찰들이 군중들을 향해 발포6명의 사망자 발생(15살 어린이젖먹이21살 엄마 포함)책임자 처벌 요구 : 진상규명과 발포경찰 책임규명 요구제주경찰은 기관총 거치제주신보 기자들의 중재로 마무리경찰의 책임규명과 사과가 없자, 제주도민들은 310 총파업 돌입

1948.03.10 : 310 총파업 (남로당 제주도당의 반경(反警)활동 전개)

제주도내 관공서통신기관기업인자영업자학교경찰 등 166개 단체42,211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 총파업(95% 참여)

조병옥(경무국장) 도청연설 :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이때 서북(평안도)청년단 입도 응원경찰의 명분으로 입도

1948.04.03 : 43 무장봉기 발발

새벽2, "남로당 제주도당(좌익세력총책임자- 김달삼)"의 주도 아래, 경찰 서청의 탄압중지단독선거 반대단독정부 반대통일정부수립 촉구 등의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

무장대(350여명 습격) 경찰지서(12)우익단체 공격 12명 사망 전쟁발발 위기 조선경비대 제9연대(연대장 김익렬 대령, 1946.11.16. 도제 승격이후, 모슬포에서 창설, 43사태 직전 병력 800) 제주도내에 있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 마찰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므로,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1948.04.28 : 평화협상김달삼(무장대 총책)과 김익렬(경비대 9연대장)이 서귀포시 구억리에서 협상

무장대 요구사항 :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반대응원경찰 철수무장대 신변보호 등 (협상내용 : 72시간 내에 전투 완전 중지점차적인 무장대 무장해제주모자 신병보장무장대 귀순 절차 마련)

1948.05.01 : "제주읍 오라리" 방화사건 발생 (우익청년단원인 "서북청년단"의 소행)

평화협상 결렬미군 대토벌작전의 계기가 된 사건

05.05 : 경 수뇌부 회의 (미군정장관조병옥 경무부장제주도지사김익렬 연대장 등)→ 김익렬 연대장 해임 후임 박진경 연대장 → 박진경 -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05.10 : 총 선거제주도 무효(사회주의자 활동 : 제주도 선거구 3개구 중 2개구 전소표율 미달로 선거 불발국회의원 198명 선출)제주도는 "사회주의자의 섬(빨간 섬)"으로 낙인06.18 : 부하에 의한, "박진경" 연대장 피살사건 발생

1948.08.15 : 대한민국 정부수립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 명령 하달 군대 동원

09.09 : "북한 공산주의" 정부수립

1948.10.19 : "여수순천사건" 발생"제주 43사건" 진압출동 거부한국 단독정부 저지가 목표

여수(경비대 14연대)에 지시 반발여수에 주둔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반대미군철수를 주장하며, 여수순천 등을 점령한 사건

11.15 : "표선면 가시리" 학살 사건

11.17 : "제주도 계엄령선포"초토화 작전 개시 : "초토화 작전"선포(금족령)-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들어간 자는 이유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 총살 ㆍ"초토화 작전" 동안, "제주 43사건" 희생자 7~ 80%가 학살당함ㆍ "삼진작전(三鎭)"- 좌익세력들을 태워죽이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앤다 "제주도 중산간 소개령"- 중산간 주민들이 무장대의 가담할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집단 이주명령무장대 보급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움

12.10 : "비학동산" 총살 사건시신까지도 대검으로 확인사살

1949.01. : "북촌 주민" 학살 사건하루에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350여명의 주민 총살

 01.16 : "빌레못 골" 학살 사건

03월 : "제주도" 지구전투사령부 설치

05월 : "제주도" 국회의원 재선거

06월 : "무장대" 총책 "이덕구" 사살"무장대" 해체

1950.06.25 : 625전쟁 발발

1954.09.21 :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

1978 : 순이 삼촌 (현기영의 소설)로 알려지게 됨  ("제주 43사건"은 금기의 역사)

• 2000.01.12 : 김대중 대통령 때,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4. "진압회의" 해프닝 - "병옥(경무부장)""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 난투극

1948.05.05, "윌리엄 딘(미 군정청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 부사령관)안재홍(민정장관)송호성 준장(경비대 총사령관)조병옥(경무부장)맨스필드 대령(제주도 군정장관)"등이 비행기 편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43사건 진압"의 해결을 놓고, 오전 12시부터,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윌리엄 딘안재홍송호성 준장조병옥맨스필드 대령" 외에, "유해진(제주도지사)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최 천(제주도 경찰감찰청장)김씨(딘 장군 전용통역관, 목사 출신)"9명이었다.

"최고 수뇌회의"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병옥(경무부장)""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 난투극이 발생한다.

회의에서 1번째로 발언하게 된 "최 천(제주도 경찰감찰청장)"은 "43폭동은 국제 공산주의자에 의해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발언한 "김익렬 중령(경비대 제9연대장)"은 무력 위압설득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건의하였다"직접적인 도화선은 밀 무역자 혹은 남로당 공산주의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나 자세한 경위를 알기 어렵다. 폭동자 수가 증가된 것은 빨치산이 우익 인사들을 학살했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초동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며,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두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김익렬"이 증거로 제출한 사진첩을 들여다보던 "윌리엄 딘(미 군정청 군정장관 겸 주한미군 부사령관)" 흥분하여 사진 자료들을 "조병옥(무부장)"에게 던지며, "조병옥"에게 화를 낸다. 그래서 화가 난 "조병옥""김익렬""공산주의자"로 몰면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된다.

"조병옥(무부장)""김익렬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맨스필드 대령(제주도 군정장관)""드루스 대위"에게 제출한 자료는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그러면서 "김익렬 연대장"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라고 지적했다.

화가 난 "김익렬 연대장""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윌리엄 딘 장군""김익렬 연대장"을 제지하며, 연설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조병옥(경무부장)"은 계속해서 "김익렬"을 가리키며"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라며,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윌리엄 딘 장군" "조병옥(경무부장)" "김익렬"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김익렬"을 쳐다봤고, "맨스필드 대령"도 의심하기 시작했다격분한 "김익렬"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유도 3단이던 "김익렬"은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의 표현에 의하면"조병옥은 의외로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고 한다넥타이로 목이 졸린 "조병옥"은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 천(제주도 경찰감찰청장)"이 말리러 올라왔으나, "김익렬"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 그도 비명을 르며 쓰러졌다.

"윌리엄 딘 장군" "송호성 준장(경비대 총사령관)"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고, "맨스필드 대령(제주도 군정장관)" "안재홍(민정장관)" 달라붙어, "김익렬" "조병옥"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역시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당신이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호성 준장( 경비대 총사령관)"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 고함을 친다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 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손을 놓고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라며 제지했다.

"유해진(제주도지사)"가 단상에 달라붙어, 다시 "김익렬"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김익렬""조병옥"의 몸싸움은 격화되었고, 회의는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딘 "윌리엄 딘 장군""김 모씨(딘 장군 전용통역관, 목사 출신)"를 불러, "안재홍""송호성"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김 모씨""윌리엄 딘 장군"에게 "안재홍""송호성 준" "김익렬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통역하였다.

이성을 상실한 "김익렬 연대장""조병옥"의 넥타이를 붙잡고, 통역관 "김 모씨"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음낭을 걷어찼다놀란 "윌리엄 딘 장군안재홍송호성 준장"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통역관 "김 모씨"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윌리엄 딘 장군"은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 헌병(MP)"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수 명의 "미군 헌병(MP)" 달려들어, 그 중 2명의 "헌병""김익렬 연대장"의 팔을 양쪽으로 붙잡아 비틀어, "조병옥"에게서 떼어놓고는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김익렬 연대장"두 팔은 결박하여 꼼짝 못하게 했다소란은 끝이 났고,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5. 사건 발단

지리적 특성상, 동북아 요충지인 "제주도""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 6만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들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 데다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 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 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03.01.,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기마 경찰"탄 말의말굽에 구경을 나온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있었고, 이를 본 주변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주민 6명이 사망하는 "31 발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반경(反警)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제주도"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다전체 166개 기관단체 에서 41,211명이 참여하였고, 이중 제주출신 경찰관 66명도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카스티어(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였다"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당시 작성된 "미군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붉은 섬(Red i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하였다이 사건은 1954.09.21, "한라산""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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