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라티온 작전 (Operatsiya Bagrationㆍ러시아 제국 장군 이름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1944년 "동부 폴란드ㆍ벨라루스"에 포진해 있던 "독일군"을 붕괴시키기 위한 "소련군"의 "하계 대공세"의 작전 명칭이다. 이 작전이 성공해서,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래, "벨라루스"를 3년간 점령하고 있던 "독일 중앙집단군"은 붕괴되었다.
1. 바그라티온 작전 (Operatsiya Bagrationㆍ러시아 제국 장군 이름 작전)
작전명은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 군"과 싸우다가, "보로디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전사한 "바그라티온(러시아 제국 장군ㆍ18~19C 조지아 태생)"의 이름을 따 붙여진 것이다. 작전 개시일은 본래 06.15~ 20일이었으나, 06.22일로 바뀌었다. 이 날은 3년 전,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과 같은 날이다.
• 일 시 : 1944.06.22~08.19 • 장 소 : 소련ㆍ동부 폴란드 • 결 과 : 소련의 결정적 승리
• 작전명 : 바그라티온 • 교전국 : 나치 독일 / 소련ㆍ폴란드 동부군
• 병 력 : 나치 독일 - 병력(약 134만 명)ㆍ탱크( 800대)ㆍ돌격포( 530대)ㆍ항공기(1,300기) / 소련ㆍ폴란드- 병력(약 241만 명)ㆍ탱크(2,715대)ㆍ돌격포(1,355대)ㆍ항공기(5,327기)
• 피해(사상자): 나치 독일 - 전사(25만 명)ㆍ탱크/돌격포(1,000대)ㆍ항공기(1,000대) / 소련ㆍ폴란드- 전사(18만 명)ㆍ탱크/돌격포(2,957대)ㆍ항공기(822대)
2. 상황 (작전 시작 전)
1941년, "독소전쟁" 개시 이래, "스탈린"은 계속 "영국ㆍ미국"에 "유럽의 제2전선"을 개시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연합국은 1943.07월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고, 9월에는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지만 이는 한정된 전선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프랑스"에 상륙해 달라고 요구했다. 1943.11월 개최된 "테헤란 회담"에서는 "영국ㆍ미국"이 "북 프랑스"에 상륙할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44.06.0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의해 "스탈린"이 요구한 "제2전선"은 만들어졌다.
"영국ㆍ미국"이 "북 프랑스"에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독일군"은 주전장이었던 "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부대를 이동하기 시작했고, 가능한 모든 예비 병력을 동원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ㆍ미국"의 전략 폭격이 늘어났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전개한 "독일 공군"도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동부전선"의 하늘의 균형추도 "소련군" 측으로 기울게 되었다.
3. 남방 집단군의 괴멸ㆍ북방 집단군의 후퇴
한편 1943.08월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전쟁의 주도권은 "소련군"에 넘어갔으며, 이 방면에서 1943년 말 ~1944.05월까지 "소련군"은 겨울~봄에 걸쳐 계속 파상공세를 가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는 1944.01.28일에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바투틴 대장)ㆍ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이반 코네프 원수)"가 "독일 남방집단군(AㆍB 집단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공세에서 "독일 제11군단ㆍ42군단"의 6만 명이 "코르순"에서 포위되어 섬멸되었다. 또한 3월에는 "독일 제1기갑군"이 포위되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였다.
"히틀러"는 이 공세에서 후퇴를 금지했으며, 후퇴를 요구하는 "B 집단군의 만슈타인"은 해임되었다. 4월에 "발터 모델"이 부임하여, 나머지 패잔 병력을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재편성하여 이끌었다. 한편 "A집단군(클라이스트 원수)"는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말리노프스키 대장)"에게 밀려 "부크 강"을 건너 "몰도바"까지 후퇴하였다. "B집단군"과 마찬가지로 이 후퇴는 "히틀러"의 격노를 사서, "클라이스트"는 해임되고 잔존병력은 "남 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개편되어,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이 맡았다.
이 부대는 "드니스테르 강"을 끼고, "추축국"에 남은 유일한 유전지대인 "루마니아"를 방위했다. 한편 "소련군"에게 "크리미아 반도"에 고립된 "제17군ㆍ루마니아군" 대부분은 해상탈출에 실패하여 7만5천 명의 병력을 잃고, "세바스토폴"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독일 남방집단군" 휘하 "A집단군ㆍB집단군"은 모두 분쇄되어, "소련 영토"에서 물러났다.
한편 북방에서는 01.14일에 900여 일 동안 포위되었던 "레닌그라드의 정면ㆍ노브고로드 부근"에서 "소련군"이 양방향 공세를 시작하여, "북방집단군(퀴흘러 원수)"는 3월에 "나르바ㆍ프스코프"를 잇는 선까지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레닌그라드"의 포위는 900일 만에 뚫렸고, "소련군"은 "핀란드"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하여 "카렐리아 지협ㆍ비보르크"까지 진출하였다.
4. 벨라루스의 군사적 상황
1944.05월말까지 수복하지 못한 "소련" 영토는 "벨라루스ㆍ발트 3국" 뿐이었다. "벨라루스"에는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앙 집단군"이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후퇴한 이래 같은 곳에서 3년째 버티고 있었다. "중앙 집단군"은 기갑 부대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남방ㆍ북방 집단군"에 비해 전력이 더 강했다. "남방 집단군"이 붕괴하고, "북방 집단군"이 후퇴했기 때문에, "중앙 집단군"은 돌출부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소련군"은, 1943.09월에 "모스크바"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인 "스몰렌스크"를 탈환했고, "발트 해"로 흘러드는 "자파드나야드비나 강"에 면한 "비쳅스크"와 "흑해"에 이르는 "드네프르 강" 유역의 "오르샤" 사이에 전개하고 있었다.
"비쳅스크"는 "모스크바"로 이르는 철도와 간선도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고, 이는 아직 "독일군"이 점령 중이었다. 그래서 "중앙 집단군"을 분쇄하고, "베를린(독일의 수도)"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벨라루스"를 탈환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벨라루스"는 습지와 숲이 많은 지형이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병력 전개가 곤란했다. 특히 기갑 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독일군"은 이런 지역에 강력한 수비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 지휘관들은 이전의 "수보로프(러시아 제국의 명장)"이 말한 "사슴이 갈 수 있는 곳은 러시아 병사도 간다."는 말을 떠올려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5. 독일군의 대비
"독일군"도 "소련군"의 여름 공세를 예상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남부의 "갈리치아" 방면에서 출발하여, "발트 해"로 좌회전을 하며, "독일군"의 돌출부를 잘라내는 대공세를 가해, "독일 북방ㆍ중앙 집단군"의 퇴로를 막아, "독일" 본토와 연결을 차단할 작전을 펼칠 가능성을 염려했다. "소련군"은 거짓된 무선을 흘리고, "독일 정찰기"를 속이는 부대이동을 하는 등 기만작전을 펼쳐, 이런 판단을 확신하게 했고, 이 결과 "독일 중앙 집단군"에 속한 "제4기갑군" 등 주력부대가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민스크 - 모스크바"에 이르는 전선의 전력이 눈에 띠게 약화되었다.
한편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서부와 본국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하였으며, "독일군"의 보급로를 계속 폭격하였다. 또한 "파르티잔"도 활발히 활동하여, "독일군"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도로와 철로를 파괴하였다. 이 결과, "중앙 집단군"의 보급은 매우 곤란하게 되었으며, 많은 병력이 파르티잔을 막기 위해 후방으로 배치되어 전방의 수비력이 약화되었다.
6. 결과
"소련군"은 5주간 700km를 전진하였고, "독일군"의 기둥뿌리를 빼앗는 "전격전"을 성공시켰다. 이는 1930년대 완성한 "소련군의 종심타격 이론"의 확실한 구현이었다. "독일군"의 발표에서도 25만 명의 전사자와 11만 명이 넘는 포로가 나타나는 대 타격을 주었고, "동부전선"의 승부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이 작전의 경이적인 성공 때문에, 냉전시절 "서방국들"은 "소련군"의 전력에 크게 위협을 느꼈다.
이 작전의 이전에는 120만 명에 달했던 "독일 중앙 집단군"은 전사ㆍ실종ㆍ포로ㆍ부상 등 총 사상자 60만 명(25개 사단)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장성급 지휘관 47명중 31명이 전사ㆍ실종ㆍ부상ㆍ포로가 되었으며, 탱크ㆍ돌격포 1,000대와 중포ㆍ항공기 1,700대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이 작전에서 잡은 6만 명이 넘는 "독일군 포로"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행군시켜, 자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영ㆍ미군"에 과시하였다. "독일군"은 애당초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총 병력 숫자가 "소련군"의 절반도 안 되었으며, 처음부터 "소련군"의 의도를 오판하여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소련군" 공세의 와중인 07.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여, "히틀러ㆍ 독일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련군"의 피해도 극심하여, 총 240만 명의 병력 중에 77만 명이 넘는 사상자ㆍ탱크/돌격포 2,957대ㆍ중포 2,447문ㆍ항공기 822대를 잃었지만, "소련"은 이런 피해를 금세 보충할 수 있었고, 이 작전이 종료된 8월 이후에는 남부의 "발칸 반도"와 북부의 "발트 3국"에 대한 연속적인 공세작전이 시작되어 "독일" 동맹국인 "루마니아ㆍ불가리아ㆍ핀란드"가 8~ 9월에 각각 사실상 항복했다. 또한 "소련"은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세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영국"에 있던 반공적인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항하여, "소련"은 자국의 조종을 받는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설립하여 "폴란드" 영토 내인 "루블린"으로 이동시켰다.
7. 바르샤바 봉기 (Powstanie Warszawskie)
8월에 "바르샤바" 전면에서 멈춘 "소련군"은 1월까지 꼼짝 않고 있으면서, 후에 반소적인 폴란드 저항세력이 "독일군"에 대해 봉기했을 때도 강 건너에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어서, 서방 연합국들은 이를 비난하였다. (바르샤바 봉기) 이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하는 이들 저항세력이 "독일군"에 진압되도록 놔두었다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바그라티온 작전" 후반기에 다다르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독일군"의 반격과 "바그라티온 작전" 초반기부터 계속 누적되어 온 "소련군"의 피해가 워낙에 극심하였기 때문에,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1944.08월에는 실제로 "소련군"의 공세가 "독일군"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를 앞에 둔 "폴란드의 부크 강" 일대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패퇴시키고, 이 일대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의해서 패배를 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소련군"으로서는 "바르샤바"를 향한 추가적인 공세가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소련군"이 진정한 의도는 현재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 일 시 : 1944.08.01~10.02 • 장 소 : 폴란드 바르샤바 • 결 과 : 독일군의 승리ㆍ독일의 바르샤바 파괴 및 민간인 보복 살해ㆍ폴란드 국내군의 항복ㆍ소련의 루블린-브레스트 공세 중단ㆍ연합군의 바르샤바 공수 실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르샤바"를 "독일 제3제국군"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폴란드 국내군"이 일으킨 봉기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저항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단일 군사행동"이다. 당시 "소련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몰아내며, "바르샤바 동부" 외곽으로 접근하던 것과 시기를 같이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바르샤바" 코앞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그 사이 "독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폴란드 봉기군"을 진압했다. 외부의 도움이 전혀 없는 63일 동안, "바르샤바"는 "독일군"의 잔혹한 진압 아래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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