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Operation Barbarossaㆍ붉은 수염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 명칭이다. 작전명은 "신성 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원래 목표는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부분"의 정복이었으나, 실패했다. 이 실패는 "히틀러"의 전체 전쟁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했고, 결국은 "나치 독일"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1. 바르바로사 작전 (Operation Barbarossaㆍ붉은 수염 작전)
독일군 주력을 담당한 "중부 집단군"은 곧장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했고,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로 돌진했다. "히틀러"가 눈독들인 "코카서스"지방의 유전지대에는 소련 원유의 80%가 매장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명군으로 불린 전설적 인물로, 동방에 관심을 기울였기에, "대 소련전"에 걸맞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일설에는 "붉은 수염"은 "스탈린"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독일육군"은 공격 작전명에 색깔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어, 이것의 발전형이라고도 생각된다.
• 일 시 : 1941.06.22.~ 1941.12 • 작전명 : 바르바로사 (붉은 수염) • 장 소 : 러시아의 유럽 부분ㆍ우크라이나ㆍ벨라루스ㆍ리투아니아ㆍ라트비아ㆍ에스토니아ㆍ • 결 과 : 전략적으로 "추축군"의 작전 목표 달성 실패
• 교전국 : 나치 독일ㆍ루마니아 왕국ㆍ핀란드ㆍ이탈리아 왕국ㆍ헝가리ㆍ슬로바키아 공화국ㆍ크로아티아 / 소비에트 연방 • 병 력 : 나치 독일- 병력(약 380만 명)ㆍ전차(3,350대)ㆍ항공기 4,389기(전투기 2,770기) / 소비에트 연방- 병력(약 260~290만 명)ㆍ전차(11,000대)ㆍ항공기(7,133 ~ 9,100기)
• 피해(사상자): 나치 독일- 전사(167,347명)ㆍ실종(34,527명)ㆍ전차(2,400대)ㆍ항공기(2,827대) / 소비에트 연방- 전사(566,852명)ㆍ실종(2,335,482명)ㆍ전차(20,500대)ㆍ항공기(21,200대)
2. 집단군 (북부ㆍ중부ㆍ남부)의 목표
"히틀러ㆍ독일군 지휘부"는 "3개의 집단군"을 각각 "소련"의 특정된 대도시를 공격ㆍ점령목표로 삼아 할당했다. 최종적으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까지 진출할 계획으로, 그 때문에 동절기 장비도 준비하였다. 하지만 장비의 수가 부족했고, 또 작전 중 "병참"의 혼란으로 전선부대까지 동절기 장비가 거의 도착하지 못했다.
① 북부 집단군 (빌헬름 폰 레프 원수): 군 (3개) + 기갑집단 (1개ㆍ제4기갑집단)으로 구성
"발트해" 연안에 있는 "발트 3국"을 경유해, "북 러시아"에 침입하여, "레닌그라드"의 점령 혹은 파괴를 목표로 했다.
② 중부 집단군 (페도르 폰 보크 원수): 군 (2개) + 기갑집단 (2개ㆍ제2/3기갑집단)으로 구성
현재의 "벨라루스"를 통과하여, "러시아"의 중서부로 진군하여, "모스크바"에 직접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2개 기갑집단이 집중되어, 최강 전력을 가졌다)
③ 남부 집단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군 (3개)+ 기갑집단 (1개ㆍ제1기갑집단)+ 루마니아군 (2개)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ㆍ거대한 공업지대ㆍ인구밀도도 높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하여, "키예프"를 공략한 후, "남 러시아"의 초원을 넘어, 동쪽의 "볼가 강"까지 진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3. 결 과
"단기 결전"이 가능한 목표로 보고, 시작한 작전은 "독일군"의 실패로 끝났다. "소련 수도 모스크바" 공략을 통해, "소련"을 굴복시키려 했던 "태풍작전"은 그동안의 "모스크바 방면"의 방위강화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소련군"에 의한 "동계 반격"에 의해,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공황적인 패주ㆍ붕괴가 일어났으나 "히틀러"의 사수명령과 각 부대의 분전에 의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단기 결전"을 예상하고, 전투를 벌였던 "독일군"은 "러시아"의 주요 도시는 점령하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한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또한 "히틀러"의 퇴각 불가명령에 따르지 않은 장군의 대량 경질은 군내에 커다란 불평을 일으켰다.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의 최대 이유는 "러시아 땅"이 생각보다 광대하여, "독일군"의 보급이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이 "독일" 측의 예상보다 높았던 것이다. 또한 "독일군"에 적대한 여타 군대와는 달리, "소련군"은 전선이 내륙부까지 진행되었는데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최초 일격에 "소련군" 전체가 붕괴되었다고 보았던 "히틀러"의 생각은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러시아"는 "레닌그라드ㆍ모스크바ㆍ남부 자원지대(스탈린그라드)" 등으로 전략적 목표가 분산되어 있어, "독일군"은 어느 한곳에 중점을 두지 않고, 모든 곳에 대해, 병력을 3개로 나눴다. 이것은 "병력 분산"을 초래했고, 모든 주요 목표 공략에 실패로 끝나는 동시에, 보급의 곤란을 불렀다.
또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에 있던 "반 나치정권"의 전복에 간섭하고, "무솔리니"가 독단적으로 침공한 "그리스 침공 작전"이 대실패로 끝나, "그리스 군"에게 역습을 당한 것도 있다. 그곳에 "기갑부대"의 투입을 승인하는 것으로 인해, "실제 작전개시 시점"인 05.15일에서 1개월 이상 연기된 것이다.
또한, 1941년 "겨울"이 다른 해에 비해, 매우 빨리 찾아온 것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다음 해인 1942년, "독일군"은 다시 크게 승리했고, "소련"의 주요 유전이 집중된 "코카서스 지방"의 제압을 목표로 한 "블라우 작전"을 발동하였다. 더군다나 "케르치 해협"을 낀, "카프카스 지방"에 인접한 "크리미아 반도"의 제압이 난항을 거듭하고 "세바스토폴 전투"가 "블라우 작전" 발동 전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독소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4. 배 경
"히틀러"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이 필요하니, 이를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슬라브인"을 "열등 인종"으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나치 독일ㆍ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독일ㆍ소련"이 "중앙 유럽"의 분할지배에 합의하고, "상호 안전보장" 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39.08.23) 절대 손을 잡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양대 적대세력이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에게 있어서,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영국"을 후방에 두고, "소련"을 공격하여, "2개의 전선"을 만드는 것을 염려했지만, "히틀러"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작전개시를 명령했다. "히틀러"는 "서방전격전"의 성공에 힘입어, "소련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나치 독일"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련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화평을 촉진시키길 기대하고 있었다.
5. 소련의 준비
개전시점, "소련"은 주요 군사 장비 보유량ㆍ공업 생산력에 있어서, "독일"을 크게 앞섰다. "소련"의 공업생산은 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 대공황"에 시달리던 1930년대에 급속히 발전해, 이미 1930년대 말, "소련"은 "미국"의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중공업", 특히 "군수산업"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또한 "소련 전차"는 "독일 전차"에 비해, 성능면에서 많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공기"의 발전도 눈부셔, "독일" 등 "서구제 항공기"와 성능도 거의 비슷해졌다.
그러나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부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공산당ㆍ군 내부"에 있던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해, "적백내전" 등을 통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육군지휘부"를 포함한 수백만 명을 숙청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지휘관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 외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경시했다. "소련군"은 전방의 군이 "독일군"을 국경 근처의 "요새 선"에서 저지하는 사이,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킨 뒤, 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국경선에 구축된 요새인 "스탈린 선"은 같은 해,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 근처의 "요새"는 구축 중에 있었고, 겨우 위치만을 표시하는 존재였다. 새로운 "요새 선"의 구축 완료까지, "소련" 측의 방비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국경 부근에 병력을 배치하는 방침은 변경하지 않았다. "정예부대" 대부분을 "독일" 국경과 "시베리아의 만주국" 국경"에 배치했다.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조약체결"까지 "소련"은 "나치즘"의 위협을 선전하면서, 국내의 "숙청"의 구실로 삼았으나, "조약 체결" 후에는 모습을 바꿔, "반 독일적인 논조"를 억압했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경고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스탈린"은 그 정보를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정부"도, 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 "전선부대"의 경고에도 대처를 하지 않았다.
6. 공격 개시
1941.06.22일, "독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작전에는 "독일군"을 주축으로 한 "추축군" 총 300여 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동원되는 "역사상 최대 육상작전"이었다. "2개 기갑집단"이 배치되어, 최강전력을 지닌 "중부집단군"은 "민스크ㆍ스몰렌스크" 등에서 "소련군"을 포위ㆍ격파하고, "모스크바"를 목표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지원하기위해, "중부집단군"에서 "제2기갑집단"을 빼내, 남부로 진격하여, "키예프"를 수비하던 "소련군" 배후를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 덕분에 개전 후 "우마니 포위전" 등의 한정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강력한 "소련군"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남부집단군"에게 "키예프"에서 "소련군" 주력을 포위 격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늦어지게 되었다. "독일군"이 뒤늦게 "모스크바"로 진출하고자 했을 때는, 가을비에 의해 땅이 진흙탕이 되었고, 뒤이어 겨울의 한기로 인해 진군이 정지되었다.
다만 "OKH(육군 총사령부)" 등이 생각한 것은 "모스크바" 공격작전을 개시하던 상황에서 보급이 제때 뒤따르지 못한 상황이었고, 거기에 "소련"의 대도시와 자원이 존재하던 남부에서의 진격이 생각보다 곤란하다는 사실 때문에, "남부"로의 전환이 정당한 판단으로써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10월 중순,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65만 명이 넘는 포로를 붙잡았다. 이들 대부분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키예프"는 그 방어전투로 인해, 후에 "소련 정부"로부터 "영웅도시"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대 조국전쟁"을 선언한 "소련"의 저항은 아주 격렬했다. "브레스트" 국경 요새의 전투는 그 중요한 예이기도 했다.
"소련" 침공 당시, 요새는 수 시간 이내에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련 수비대"는 포위당한 요새에서 1개월간 전투를 계속했다. 동시에 주요 전선에서는 많은 "소련 징집병"이 자살행위와도 같은 돌격을 감행했다. "보급선"이 늘어나면서, "파르티잔들"의 공격이 빈번해지자, "독일군"의 보급 문제가 심화되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점령지의 곡물ㆍ연료를 비롯한 건축물의 사용을 방해하기 위해, 파괴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토지에 대한 "초토 전술"을 실시했다. "소련"에게 탄압받은 "우크라이나 지방"에서는 "독일군"이 환영받았지만,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인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소련군"이 보유하고 있던 "KV-1 중(重)전차ㆍT-34 중(中)전차"는 당시 "독일 전차"보다도 우수했기 때문에, "전차전술"에서 자타가 공인하던 "독일군"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대책으로 "독일군"은 급히 "신형전차(티거1급의 전차)"의 배치와 기존전차의 개량을 추진하게 되었다.
"발트해 지역ㆍ레닌그라드 점령"이 목표였던 "북부집단군"은 1941.08월까지, "레닌그라드" 남부 주변까지 진군했으나, 맹렬한 "소련군"의 저항에 저지당했다. "독일군"은 기갑부대가 "레닌그라드"에서 "시가전"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제4기갑집단"을 "모스크바" 공격을 위해 "중부 집단군"으로 전속시켜, "레닌그라드"에는 포위ㆍ봉쇄에 의한 "보급단절"을 결정했다. 그러나 1944년 전반,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를 "독일군"의 포위에서 해방시킬 때까지, "레닌그라드"는 점령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는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소련 도시가 되었다.
"키예프" 공략 후, "제2기갑집단"은 "중부 집단군"에 복귀해, 최후 최대의 목표였던 "모스크바" 공략을 위한 "태풍 작전"이 개시되었다. "뱌지마ㆍ브랸스크"의 2중 포위전에서 "소련군"은 다시 50만 병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가을의 장대비가 찾아오면서, 도로면이 진흙탕이 되었고, "독일군"의 전진은 정지되고 그 사이 "소련군"은 "모스크바" 정면에 방위 체제를 재구축했다.
찬 기운의 도래와 함께 땅이 얼자, 다시 "독일군"은 전진을 재개했지만, 추위가 심해지면서, "독일군"의 전진속도가 떨어지고, "시베리아" 방면에서 도착한 정예부대의 증원을 받은 "소련군"의 저항도 있어 12월 초순에 이르러 정지되었다. 만족스런 동계 전용 장비도 없고, 보급도 충분하지 못해, 각 전선에서 정지한 "독일군"에 대해 "소련군의 동계반격"이 개시되었고, 그 반격의 대부분은 "모스크바"에 접근한 "중부 집단군"에 집중되었다. 이후, "모스크바"는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7. 개전 초기, "소련"의 패배 원인
개전 초기, "소련군"의 대패 원인은 단순하다. "소련군"의 전력 대부분이 "독소국경"에 집결하였던 것이다. "국토는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경직된 사고 때문에, 전투 개시 수 시간 만에 거의 대부분이 격파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독일"이 만들어낸 "전격전"에 대해, 유효한 방어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전격전"에 대해 역효과라고 생각되는 전술 때문에, 막대한 인원ㆍ자원을 소모했다.
덧붙여 상당한 인구ㆍ생산설비ㆍ농지 등을 잃은 후에도, "소련"이 "독일"을 격파한 사실은 "소련"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때까지 "나치 독일"이 싸운 군대와 비교하여, "소련군"은 "끈질김"에 있어서 전혀 다른 군대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전멸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은 "소련군"에 의해, "전격전"의 효력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후반의 "랜드리스"의 공헌까지 탄력을 받은 "소련"은 "나치 독일"을 분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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