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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41.09~44.01): 레닌 그라드 전투 (상트페테르부르크)

by 당대 제일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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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ㆍSiege of Leningrad)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중, 동부전선에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에서 발발한 "독일 북부 집단군"의 장기간 군사 작전이다. "레닌그라드" 점령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3가지 목표 중 하나였고, "북부 집단군"의 주요 목표였다.

 

1. 레닌그라드 포위전 (Siege of Leningrad)ㆍ레닌그라드 봉쇄 (Blokada Leningrada)

"히틀러"의 궁극적인 계획은 "레닌그라드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 강" 북부의 영토는 "핀란드"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길었고, 파괴적인 "포위전"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사상자인 약 300만 명의 사상자를 입은 "도시 전투"로 꼽힌다.  이 기간 동안, 도시ㆍ주택(3,200채)ㆍ목조 주택 (9,000채, 모두 전소)ㆍ공장시설(840채)가 파괴되었다. 포위전은 1941.09.08일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1943.01.18일 도시로 연결되는 "작은 회랑 부분"을 해방하지만, 완전한 "포위전" 종료는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01.27일 끝났다.

일 시 : 1941.09.08~ 1944.01.27일 (872일)          • 장 소 :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           결 과 : 소비에트 연방의 승리           교전국 : 나치 독일핀란드이탈리아 왕국스페인 청색 사단 / 소비에트 연방

• 병 력 : 나치 독일- 병력(약 380만 명)ㆍ전차(3,350대)ㆍ항공기 4,389기(전투기 2,770기) / 소비에트 연방- 병력(약 260~290만 명)ㆍ전차(11,000대)ㆍ항공기(7,133 ~ 9,100기)           피해(사상자): 나치 독일- 포위전(미상)ㆍ소련 공세(140,739명 이상) /  소비에트 연방- 계(4,078,000명)ㆍ붉은 군대(1,017,881명 사망/실종)ㆍ민간인(642,000명 사상)

2. 배 경

"레닌그라드"의 전략적 가치는 "옛 러시아 수도"로서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였고, "소련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 군사적 중요도가 높았으며, 산업시설ㆍ무기공장이 모인 대도시였다. 1939년부터 이 도시는 "소련 산업 생산"의 11%를 차지했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확실히 점령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미 "호텔 아스토리아"에서 개최될 "승리 행사 초대장"을 이미 인쇄하고 있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직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궁극적인 계획은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소련" 저널리스트 "레프 베지멘스키"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제국의 새로운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가 되고, 완전히 도시의 시민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3. "레닌그라드" 도시의 영향 (사망ㆍ기아)

2년 반 동안의 계속된 포위공격은 대규모의 도시 파괴와 현대 도시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872일간의 포위 동안, "물ㆍ에너지ㆍ식량ㆍ공공 서비스" 등이 중지되어, "레닌그라드" 지역에 심각한 기근을 몰고 왔다. 그 결과, "군인 150만 명 이상ㆍ주로 어린이와 여성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 대피 중 포격으로 인한 사망ㆍ기아로 인해 사망했다.

"레닌그라드"의 "피스카례요브스코례 기념비(Piskaryovskoye Memorial Cemetery)"는 "공방전" 기간 중 사망한 민간인 50만 명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레닌그라드"의 경제적ㆍ인적 피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ㆍ모스크바 공방전ㆍ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의 손실을 초과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가장 사상자가 많은 "포위전" 중 하나이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공격 작전을 대량 학살의 일부로 보기도 하고, 전례 없는 "인종적 이유의 기아 정책" 등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생각한 전쟁 정책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 "히틀러"가 명시한 명령에서는 도시방어구역 외곽에 위치한 "예카테리나 궁전ㆍ페테르호프 궁전ㆍ로프샤ㆍ스트렐나ㆍ가치나와" 같은 "차르 궁전ㆍ기타 역사적 건물들"에 존재하는 많은 예술품들을 "나치 독일"로 가져가, 약탈하고 파괴했다. 많은 수의 "공장ㆍ병원ㆍ학교ㆍ사회 기반시설"은 공습 및 장거리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4. 소련군의 공세

총 방어선은 "목재 바리케이드(190km)ㆍ철조망(635km)ㆍ대전차 도랑(700km)ㆍ토재-목재 진지 및 철근 콘크리트 진지(5,000km)ㆍ참호(25,000km)"로 이들 중 대부분이 민간인이 건설했다.  또한,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가 "레닌그라드" 남쪽의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① 1942.08.27 : 신야비노 공세

1942년 가을, "소련군"이 도시 봉쇄를 깨려는 시도를 했던 공세이다.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2충격군ㆍ8군"이 공세의 주공을 맡았다. 같은 시간, "독일" 측은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세바스토폴"을 점령한 이후, 남은 "군"들에게 측면 공격인 "노드리트 작전(Operation Nordlicht)"을 준비했다.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양편 모두 상대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신야비노 공세"는 "노드리트 작전"이 시작되기 몇 주 전, 1942.08.27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19군"이 소규모 공세를 시작하면서 발발했다. 이 작전의 성공적인 시작은 "노드리트 작전"을 준비하던 "독일군"이 "소련군"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역공은 "티거 전차"를 처음으로 투입하면서, 제한된 성공을 거두었다. "2군"의 일부가 포위되고 무너진 이후, "소련"의 공격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의 공세작전을 중단했다.

② 1943.01.12 아침 : 이스크라 작전

이 공세는 1943.01.12일 아침에 시작되었는데, 완벽한 포위망은 "레닌그라드 전선군ㆍ볼호프 전선군"이 실시한 본격적인 공세인 "이스크라 작전"의 여파로 파괴되었다. "라도가 호수" 남부에서 강력한 "독일군"의 요새에 전투를 펼친 이후, 1943.01.18일 "볼호프 전선군의 372소총병사단"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123소총병사단"이 서로 만났으며, 약 10~ 12km 길이의 땅을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에서 포위된 시민들에게 몇몇 구호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1944.01.27 (포위전의 끝) : 레닌그라드 - 노브고로드 공세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4.01.27일,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를 펼치며, "독일군"이 도시 남부로 퇴각하면서 끝났는데, 이 공세는 "레닌그라드 전선군ㆍ볼호프 전선군ㆍ1발트 전선군ㆍ2발트 전선군"이 합동으로 치룬 공세이다. "발트 함대"는 30%의 항공력으로, 마지막 "독일 국방군"에 대한 공격을 펼쳤다. 1944년 여름, "핀란드 방어군"에게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를 펼치면서, "핀란드군"은 "비보르크 만ㆍ부오크시 강" 건너편으로 후퇴했다.

5. 전투 편제

① 독일군 (북부 집단군ㆍ원수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18군 (게오르그 폰 퀴흘러)ㆍ42군단(보병사단 2개)ㆍ46군단(보병사단 3개)

• 16군 (에른스트 부슈)ㆍ28군단(마우리츠 폰 뷔크토린ㆍ보병사단 2개ㆍ기갑사단 1개)ㆍ1군단(보병사단 2개)ㆍ3군단(보병사단 3개)ㆍ2군단(보병사단 3개)ㆍ50군단(9군하에 있음ㆍ보병 사단 2개)

• 4 전차집단(에리히 회프너) : 38 군단(프리드리히윌리엄 폰 차푸니스ㆍ보병사단 1개)41 기갑군단(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보병사단 1계화사단 1기갑사단 1)56 기갑군단(에리히 폰 만슈타인보병사단 1기계화사단 1기갑사단 1기갑척탄병 사단 1)

② 핀란드 군 (핀란드 방위군 본부ㆍ핀란드 원수 만네르하임)

• 1군단(보병사단 2개)ㆍ2군단(보병사단 2개)ㆍ4군단(보병사단 3개)

③ 붉은 군대 (북부 전선군포포프 )

"레닌그라드 전선군(초기에는 레닌그라드 군사지구)"은 "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지휘했다.  이 전선군은 "핀란드 만ㆍ라도가 호수" 사이의 북부 지역에 있던 "23군"과 "핀란드 만ㆍ파블롭스크-므가"의 서부지역에 있던 "48군"을 포함한다. 또한, "레닌그라드 요새지역ㆍ레닌그라드 주둔군ㆍ발트 함대ㆍ코포레 남부 풀코보 고지-술레츠크-콜피노 지역 작전 그룹"도 존재했다.

7군 : 소총병 사단 2개ㆍ의용군 사단 1개ㆍ해병 여단 1개ㆍ기계화 소총병 3개ㆍ기갑연대 1개  /  8군 : 10소총병군단(소총병사단 2개)ㆍ11소총병군단(소총병사단 3개)ㆍ독립부대(소총병사단 3개)  /  14: 42소총병군단(소총병사단2)독립부대(소총병사단2요새화지역1계화소총병 연대1)  /  23: 19소총병군단(소총병사단 3)독립부대(소총병사단 2기계화사단 1요새화지역 2계화 소총병연대 1)  /  루가 작전집단군 : 41소총병군단(소총병사단 3)독립부대(기계화사단 1소총병연대 1)  /  킨기세프 작전집단군 독립부대(소총병사단 2의용군사단 2기갑사단 1요새지역 1)  /  독립부대 (소총병사단 3수비사단 4요새화지역 3소총병여단 1)

※ 이들 중, "7군"은 "카렐리야 지역"을 방어하고, "14군"은 "무르만스크"를 방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군"들은 초기 공세 중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 연대기

① 1941년

04월 : "바르바로사 작전ㆍ제네라플랜 오스트"의 계획에 따르면,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점령ㆍ파괴하고자 했다   06.22 :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추축국""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06.23 : "레닌그라드 지휘관 포포프 중장" "남부 방어지를 답사한다."2번째 명령을 한다  06.29 : "루가"에 방어진지 건설이 시작. 이와 함께 어린이여성의 대피령 시작.

06~07월: "독일군"이 전진하면서, "프스코프ㆍ노브로고드"에서 피난을 온 시민 30만 명이 "레닌그라드로 몰려오고, "북서전선군"은 "레닌그라드" 전방 방어선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자원군ㆍ징집병을 포함한 전선에 있는 군 병력이 200만 명에 도달한다.

07.19~23 : "북부 집단군"의 1번째 "레닌그라드 공격"이 "레닌그라드" 남부 100km에서 멈춘다  07.27 : "히틀러""북부 집단군"을 방문하여, 진격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화를 냈다.  그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에게 12월까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07.31 : "핀란드 군"이 "카렐리야 지협"의 "소련 23군"을 공격하면서, 겨울전쟁 이전의 "핀란드 국경"에 도달했다  08.20~ 09.08 : "레닌그라드"의 산업학교병원주거지역에 대해, 포격이 있었다  08.21: "히틀러 제34지침"에서 "핀란드 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08.20~27 :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철도ㆍ도로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민간인 대피가 중단되었다  08.31 : "핀란드 군"이 방어 태세에 들어서고, 전선을 더 이상 진군하지 않는다.

09.06 :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이 "핀란드 군"에게 "레닌그라드" 공격을 계속하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09.02~ 09 : "핀란드 군""벨루스트로프잉구시" 북부해안지대를 점령하고, 완전방어태세에 들어선다  09.08 : "독일군""라도가 호"에 도달하면서, "레닌그라드 육지"를 완전히 포위한다.

09.10 : "스탈린"이 "레닌그라드 전선군" 지휘관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게오르기 주코프"를 임명한다 09.12 :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큰 식품 저장소인 "바다예브스키 상점""독일"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09.15 : "빌헬름 리터 폰 레프""4기갑군""모스크바 공방전"을 위해, 전선에서 "중앙 집단군"으로 재배치된다  09.19 : "독일군""레닌그라드" 10km까지 진군하고, 정지한다. 시민들이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09.22 : "히틀러"가 "우리는 민간인 생명을 구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발언  11.08 : "히틀러"가 뮌헨에서의 연설에서 "레닌그라드는 굶어 죽여야 한다."라고 발언  11.10 :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11.30일까지 "독일군""티흐빈"에서 "볼호프 강"으로 퇴각하여 "레닌그라드" 동부의 "스비리 강"에서 "핀란드 군"과 조우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12: "처칠"이 일기에서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지만, 절대로 점령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12.06 : "영국""핀란드"에 선전포고한. 이후 "캐나다호주인도뉴질랜드"가 차례로 선전포고한다.

② 1942년

01월 : "소련군"이 포위를 풀기 위해, "네브스키 퍄타초크" 교두보 전투를 시작한다. 이 전투는 1943.05월까지 지속되었지만, 부분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양 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입었다  01.07: "소련""리유반 공세"가 시작되어, 16주간의 공세가 실패하여, "2충격군"이 손실을 입었다  04.04~30 : "루프트바페""레닌그라드 해상"에 위치한 "발트 함대" 공격 작전인 "에이스 스토스 작전"이 실패한다 06~ 9: "38cm 지크프리트K(E)"라는 열차포를 투입하여, 포 무게 약 800kg의 포격을 시작한다.

08월 : "스페인 청색사단(División Azul)"이 "레닌그라드"로 배치된다  08.14~ 10.27 : "내빌 데타츠먼트 K""라도가 호수"의 소련 보급로와 충돌한다  08.19 : "소련군"이 8주 길이의 "신야비노 공세"를 시작시켜, 포위 해제에는 실패했지만, "독일군"의 "노르드니흐트 작전"을 무력화시킨다.

③ 1943년

01~ 12월 : "레닌그라드" 포격이 대폭 증가하다  01.12~ 30 : "소련""이스크라 작전"을 통해, "라도가 호수"를 따라, 육지 포위망이 해제되었다  02.10~ 04.01 : 포위망을 해제하려는 "폴랴르냐 즈베즈다 작전"이 실패하다.

④ 1944년

01월 : "독일군"이 후퇴하기 전, "차르"의 역사적인 궁전인 "예카테리나 궁전ㆍ페테르호프 궁전ㆍ 가치나ㆍ스트렐나"를 약탈하고 파괴한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다른 역사적 랜드마크ㆍ교외 주택이 약탈되고, 많은 수의 귀중한 예술품들은 "나치 독일" 본토로 이동한다  01.14~ 03.01 : "포위전"을 끝내기 위한, "소련군"의 몇몇 공세들이 시작한다  01.27 :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끝나다. "독일군"은 도시에서 60~100 km 외로 후퇴한다.

7. 독일군의 계획 준비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목표로 진출했다. "폰 레프"의 계획은 도시로 이동하여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독일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가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 4기갑군"을 후퇴시키고, "폰 레프"는 "라도가 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한정 포위하기 시작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부의 "스비리 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하는 동안,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부"에 있었다. "독일군ㆍ핀란드군"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지역의 경계를 유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음식ㆍ보급품을 운반하는 기선 통행을 막았다. "독일군"은 시민에 대한 최고의 무기가 "음식"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다.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후에, 기아 상태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① 레닌그라드 요새 지대

1941.06.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첫 민간인으로 구성된 "반격 그룹"을 조직하도록 결정했다. 다음날에는 "레닌그라드" 민간인 전부가 위험 대상으로 통보되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방어선 몇몇 곳은 남쪽과 북쪽으로 몰려오는 적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도시의 경계를 따라, 민간인들이 방어하는 선으로 이루어졌다. "방어선"의 남쪽은 "루가 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ㆍ가치나ㆍ우리츠크ㆍ풀코보ㆍ네바 강"까지 이어졌다. "방어선"의 다른 부분은 "페테르고프ㆍ가치나ㆍ풀코보ㆍ콜피노ㆍ콜트스키"로 이어졌다. 북쪽의 "핀란드군"을 방어하는 선은 "카렐리냐 요새" 지역으로 1930년대 이후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서 있어왔다가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② 편제

"동 프러시아"의 "4기갑군"은 "프스코프"까지 빠른 전진을 하였으며, "루가ㆍ벨리키노브고로드" 지역에 근접했고, "레닌그라드"가 작전 범위까지 들어왔지만, 도시 남부에서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전진이 멈췄다. 그러나 "18군"은 약 35만 명이 뒤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북서부 전선군"이 "레닌그라드"로 후퇴할 때, "오스트로프ㆍ프스코프"로 진격했다. 07.10일에는 "오스트로프ㆍ프스코프"가 함락되었으며 "18군"은 "나르바ㆍ킨기세프"에 도착했고, "루가 강" 방어선 곳곳에서 "레닌그라드"로 전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핀란드 만"에서 "라도가 호수"로 전진함으로써, 모든 방향에서 "레닌그라드"를 고립시킨다는 목표에 부합했다. "핀란드 육군"은 "라도가 호수" 동부 연안을 따라, 전진할 것으로 예상했다.

8. 핀란드군의 참여

8월부터 "핀란드군"은 1939년 당시의 "핀란드-소련 국경"으로 진출하며, "레닌그라드" 북부 20km까지 도달하여 도시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핀란드군"은 "동카렐리야ㆍ라도가 호수 동부"를 점령하며, 동부에서 도시를 위협했다. "핀란드군"은 "겨울전쟁" 이전의 국경인 "카렐리야 지협"에 도달해, "베루스트로프ㆍ북 잉그니아"의 "소련군 돌출부"를 제거했으며, 전선을 곧게 만들어, "핀란드 만"의 해안부터 "라도가 호수"까지 오래전부터 유지하던 국경을 따라서 전선이 이어졌고,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는 여전히 "겨울전쟁" 전, 국경에서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소련"의 주장에 따르면, 9월부터 "핀란드군"의 "카렐리야 방어사단"에 대한 공격이 중단되었지만, 1941.08월 이전부터, "핀란드군"은 목표도달 이후에는 더 이상의 전진을 하지 않았으며, 이중 일부는 "겨울전쟁" 이전, 국경 너머에 가 있기도 하였다. 각각의 목표를 달성한 이후, "핀란드"는 전진을 중지하고, "동칼렐리야"로 병력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핀란드군"은 이 선을 유지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령부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하는 독일의 공격계획을 거부하고, "스비리 강" 남부로 전진하지 않은 채 09.07일 "동카렐리야"를 점령했다(레닌그라드 동부 160 km). 11.08일, 남동쪽에서 "독일군"이 "티흐빈"을 점령했지만, "핀란드군"이 있는 "스비리 강"까지 전진하지 못해,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하는 데 실패했다. 12.09일, "볼흐프 전선군"의 반격으로 인해, "티흐빈"에서 "볼호프 강"으로 후퇴했다.

1941.09.06일, "독일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은 "헬싱키"를 방문했다. 그의 목표는 "만네르헤임"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1941년, "핀란드 대통령 리스토 뤼티"는 이 전쟁의 목적은 "겨울전쟁" 기간 동안 "핀란드"가 잃은 영토를 다시 얻고, 동부 영토를 합병하여, "대 핀란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핀란드 의회"에서 연설했다. 전쟁 이후, "리티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1.08.24일, 나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지휘본부에 갔다.  독일군은 계속 국경을 넘어와 레닌그라드를 계속 공격하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레닌그라드 점령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우리가 거기게 참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마네르하임과 국방장관 월든은 내 의견에 동의하고 독일군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 결과는 역설적인 상황이 오게 되었다. 독일군은 북부에서 레닌그라드로 접근할 수 없다."

사실 "독일군"과 "핀란드 육군"은 1944.01월까지 함께 포위망을 유지했지만, "핀란드군"의 체계적인 포격 작전이나 폭격 작전이 없었다. "핀란드군"의 위치는 "레닌그라드" 시내로부터 33~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핀란드" 공격 위협은 도시 방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방어중인 "전선군 사령관 포포프"는 "독일군"이 "카렐리야 지협"에서 "23군"이 방어하기 위해 "핀란드군" 증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핀란드군"의 배치 해제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네르헤임"은 1939년 국경에 도달한 1941.08.31일 공격을 종료하였다.

"포포프"는 안심하였고, 09.05일 "독일군"이 위치한 곳으로, 2개 사단을 증원하였다. 이후, "핀란드군"은 "벨로스트로프ㆍ키르야셀로"의 포위망을 풀었고, 이는 "부오크스키 강" 남부와 해안 사이를 위협하는 위치였다. "핀란드 해안여단"의 총지휘관인 "중장 파보 타르벨라ㆍ대령 야르비넌"은 "독일 사령부"에서 "라도가 호수"의 생명의 길을 차단해 주라는 제안을 받았다. "독일 사령부"는 사령부 하 "아인사트크사탑 퓌레 오스트(Einsatzstab Fähre Ost)ㆍ핀란드군ㆍ이탈리아 12공격차량 중대를 포함한 K해군파견대(Naval Detachment K)"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해군 병력"은 1942년 여름~가을 동안, "보급로 공격작전"으로 이용했지만, 오직 물이 어는 기간 동안, 경기계화 장비로 멀리 이동하여 공격해야 했고, 전선의 변화로 인해, 나중에는 이 "군"들을 재편성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9. 민간인 피난 방위

1941.09월부터, "키릴 메레츠코프"가 지휘하는 "볼크호브 전선군"은 포위되었고, 4개의 방어 지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북부 지역은 "23군"ㆍ서부 지역은 "42 군"ㆍ남부 지역은 "55 군"ㆍ동부 지역은 "67 군"이 맡았다. "볼크호브 전선군"의 "8군"은 "라도가 함대"와 함께, 도시의 유일한 보급로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6항공군 레닌그라드 지구 PVO 군단ㆍ발트함대 항공대"가 항공 방어를 맡았다. 140만 명 정도 되는 민간인 피난을 보호하는 "방위 작전"은 "레닌그라드" 반격 작전의 일부로 구상되었고, 작전은 "안드레이 즈다노프ㆍ클리멘트 보로실로프ㆍ알렉세이 쿠즈네트소프"가 맡았다. 또한, "블리다미르 트리부츠"가 지휘하는 "발트 함대"의 해군이 추가적인 작전을 펼쳤다.

10. 포격 (872일 동안의 공성전)

09.08일부터,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하며, "레닌그라드" 및 도시 교외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했다. 공세 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도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방어작전을 맡게 되었고, "추축군"은 총 872일 동안 "공성전"을 펼쳤다. "레닌그라드"의 포격은 1941.08월 시작되었고, 새로운 장비가 1942년 도착하면서, 포격강도가 높아졌다. 

1943년에는 때때로 전년도에 사용했던 만큼 많은 포탄ㆍ폭탄을 이용하면서, 포격 강도는 계속 증가하였다. 또한, "루프트바페"가 야간 공습을 하기 위해, 종종 어뢰를 사용하곤 했다. 이에 대항해서, "소비에트 연방"의 "발트 함대 해군항공대"는 공방전 동안,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총 10만 번의 출격을 하였다. "독일군"의 포격ㆍ폭격을 통해, "소비에트" 시민들은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 5,723명이 사망했고 20,507명이 부상을 입었다.

11. 수비군 보급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붉은 군대"가 "레닌그라드"를 오고가는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가 중요했다. 이 경로는 "라도가 호수"의 남부를 지나고 있었으며, 겨울철에는 두꺼운 얼음 위로 트럭이 지나다녔고, 여름에는 함선이 오고가면서, 물자를 운송했다. 이 "공급로"의 안전은 "라도가 함대ㆍ레닌그라드 PVO 부대ㆍ보급로 보안군"이 맡았다. 이 "공급로"는 포위된 도시에서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전쟁의 1번째 겨울 동안의 혼란으로 긴급 비상대피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1941.11.20일 얼어붙은 호수 위로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굶주리고 있었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지칭되었다.

"생명의 길"은 대공포ㆍ전투기로 방어하였으나, "독일군"의 포격ㆍ공습으로 위협이 계속되어, 깨진 얼음에 빠져 침몰하거나, 얼음에 미끄러져, 매우 위험했다. 이와 같은 겨울철 높은 사망률 때문에, 트럭 운전수들은 이 길을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이 "생명의 길"은 군사ㆍ보급품을 오고갈 수 있게 했고, 도시가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부상병 ㆍ민간인을 후방으로 내보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11.20일,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자, 말이 끄는 수송부대가 얼음 위를 통과하여,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수송하였다. 그 후 트럭에 의한 수송도 가능하게 되었고, 얼음 위의 연결로를 "생명의 길"이라고 불렀다. 호수의 맞은편에서 시내로 물자가 운반되면서, 시민의 탈출도 가능하게 되었다. "생명의 길"은 1942.04.24일까지 152일간 이용되었다. 그 기간 동안, 시민 514,000명과 부상한 병사 35,000명이 "레닌그라드"에서 탈출하였고, 중요한 산업 설비도 운반되었다.

12. 레닌그라드의 당시 상황 (사망ㆍ기아)

"연결선"의 차단으로 인해,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은 완전히 끊어졌다. 09.02일, 시민에 대한 식량 배급이 줄어들면서,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600gㆍ노동자는 400gㆍ그밖에 시민/아이는 300g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09.08일, 공습을 받아, 상당량의 곡물ㆍ유지(乳脂)ㆍ설탕이 소실되었다. 09.12일, 식량의 남은 양은 아래와 같이 계산되었다. (곡물/밀가루 35일분ㆍ귀리/분말 30일분ㆍ육류/가축 33일분ㆍ유지 45일분ㆍ설탕/과자류 60일분)

같은 날 배급은 다시 조정되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500gㆍ노동자/아이는 300gㆍ기타 시민은 250g으로 바뀌었다. "육군ㆍ발트 함대"는 비축분을 갖고 있었으나, 충분하지 못했다. "라도가 호수"에 배치된 함대는 장비도 충분치 못했고, 여러 차례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9월에는 "곡물 수송선"이 격침되었다. "수송선"은 나중에 인양되었고, 배에서 발견된 부패한 곡물도 빵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소맥분"을 전부 사용한 후에는 "셀룰로오스ㆍ톱밥ㆍ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말의 사료용이었던 "귀리"도 식용으로 돌렸다. 육류도 떨어지자, 내장 및 가죽도 요리하였다. 시내의 빈 공터에는 양배추 등의 야채를 심었다.

9월 말에는 "석유ㆍ석탄"도 떨어졌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연료는 "나무"였다. 10.08일, 도시 북쪽에 있던 삼림에서 "목재"의 채벌이 계획되었으나, 기재도 작업 시설도 없어 10. 24일까지 목재 채벌 계획의 1%만이 실시되었다. 전력 공급도 부족해져, 전력 사용은 "군사령부ㆍ지역 위원회ㆍ방공거점"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지되었다. 대부분의 공장이 작업을 중지하고, 11월에는 모든 공공 교통 기관이 통행을 정지했다. 1942년 봄에는 일부 노면 전차가 운행을 재개했으나, 트롤리버스ㆍ버스는 종전까지 재개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였다.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비로프"의 연구원 중, 1명은 식용에 쓰일 수 있었던 20만 종의 식물 종자 수집품을 지키다가 아사했다. "레닌그라드" 외곽에는 굶주림ㆍ추위로 죽은 희생자의 시체가 넘쳐났다. "레닌그라드" 도시의 민간인은 특히 1941~ 1942년 겨울 시기, "기근"으로 고통 받았다. 예를 들어, 1941.11~ 1942.02월까지, 시민들은 오직 톱밥이 5~ 60%이상 함유되고, 그 외에 먹을 수 없는 혼화제 성분의 빵 125g을 배급받았다.   1942.01월, 2주일 동안에는 이 배급마저 노동자ㆍ군인만 받을 수 있었다.

-30℃에 달하는 극심한 한파와 도시의 교통시설 정지로 인해, "식품 배급 키오스크"에서 불과 몇 km 떨어지지 않은 지역의 많은 시민들도 배급을 받을 수 없었다. 1942.01~ 2월까지 매일 700~ 1,000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사망했고, 시민들은 곧 죽음의 광경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1941~1942년 겨울 사이, 생존자들이 모든 "새ㆍ쥐ㆍ애완동물"을 먹어치운 이후에는 "식인"을 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굶주린 사람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식료가 끊어진 도시에서는 사체에서 채집한 "인육"을 먹는 처참한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나타나, 사람들은 이것을 먹었다.

"레닌그라드 경찰"은 식인종들을 단속하는 특별 병력을 배치했다. 이 병력들의 단속 결과, 260명의 사람들이 "식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레닌그라드 경찰" 안에는 이를 단속하는 "식인단속 기동타격대"가 따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 "타격대의 대장"이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태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테렌티 슈티코프"다. 

1942년 여름, "라도가 호수" 밑바닥으로 29km의 석유 파이프라인인 "생명의 동맥"이 건설되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자, "생명의 길"은 다시 열렸다. 12.20일부터는 "말"의 왕래가 시작되었고, 4일 후에는 "자동차"를 이용한 수송도 시작되었다. "빙상 철도"의 건설도 이루어졌다. 1943.01.12.일, "라도가 호수" 남쪽 부근에 있던 "소련군"의 반격 작전이 개시되어, 01.18일 "레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육상 루트가 확보되었다.

그 후에도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게 부분적으로 포위되어, 폭격ㆍ포격을 받았으나, 1944.01월 "소련군"의 공세로 인해, "독일군"이 철수하자 포위는 완전히 풀렸다. 1944년 여름에는 "핀란드군"도 개전 시의 위치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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