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1868~1889ㆍ명치유신 (明治維新))"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친정 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킨 근대 일본의 정치ㆍ사회적 변혁으로, "메이지 유신"의 과정은 개국ㆍ도쿠가와 막부의 붕괴ㆍ천황 중심 통일국가의 형성ㆍ그에 따른 신정책의 실시로 나눠 볼 수 있다. "막부체제"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것은 학문상의 명칭으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으로 불렸었다.
1. 메이지 유신 (1868~1889ㆍ명치유신(明治維新))ㆍ1912년 메이지 천황사망
"메이지 유신"의 개시시기에 대해 대체로 "덴포(天保)시기"로 일치하고 있지만, 종료 시기에 대해서는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ㆍ1873년 지조개정(地租改正)ㆍ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ㆍ1889년 헌법발표 등으로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1889년 "헌법 제정"으로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었다고 본다.
19C 중반에 접어들어, 일본 개국이 현실적인 문제로 부각되면서, 미국은 "동인도 함대의 페리 제독"을 일본에 보내, 개국을 요구했다. "페리"의 내항으로 구체화된 자본주의의 열강에 의한 외압은 정통적ㆍ비정치적 천황을 정치화시켰으며, "덴포개혁" 이후 대두한 유한 세력이 점차 이와 연결되면서, "도쿠가와 체제"는 분열현상을 띠게 되었다. 이에 막부 측에서도 체제 개선을 위해 조정, 즉 "천황" 권위와 손을 잡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1858년 "다이로"에 이어, "니니 나오스케"가 천황의 칙령을 받지 않고, "미일수호조약"을 조인한 것을 시작으로, 소위 "5개국 조약"을 위칙 조인함에 따라, 막부와 조정은 정치적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며, 장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계승문제를 둘러싼 "도쿠가와 요시토미 파ㆍ히토쓰바시 요시노부 파"의 암투, 그리고 이와 관련해 조정과 막부의 제휴에 의한 정국 안정을 꾀하려는 "공부합체론"이 격렬해지면서, 점차 막부 체제의 모순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하층무사 계급을 중심으로 막부의 위칙 조인에 대해서는 "존왕"을, 개국정책에 대해서는 "양이"를 외치는 "존왕ㆍ양이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쓰마 한ㆍ아이즈 한" 등의 "공무합체파"가 1863년 "조슈 주체"로 하는 급진적인 "존왕양이파"로 교토에서 추방하는 "8월8일의 정변"이 일어나자, "존왕양이 운동"은 일시에 좌절되었다. 12.09일에는 "이와쿠라 도모미"등의 "왕정복고파"가 은밀히 "사쓰마 한"의 "막부타도파"와 결합해 "왕정복고 쿠데타"를 단행했으며, 같은 날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표됨으로써, 조정을 중심으로 "사쓰마 한ㆍ도사 한" 등이 연합한 "메이지 신정권" 이후, "도후쿠 지방"을 중심으로 막부 측의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왕정복고 후, "메이지 신정부"는 외국에 대해, "천황 정부"의 성립을 알려 승인을 받음과 동시에, 중앙 관제 정비에 착수했다.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에 의해,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되던 혁명적 조치들은 18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점차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사계급들이 반란을 자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끈 "반란(세이난 전쟁)"이었다.
이들 반란군은 새로 구성된 신정부군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한편 신정부를 불신하고, 농업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188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동시에 서구 자유주의 사조의 도입으로, 고양된 자유 민권 운동은 점차 헌정의 창출과 민선의회를 통한 폭넓은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정부는 이러한 압력에 대응해, 1890년까지 헌법을 제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881) 이어 1885년에 내각 제도를 창설했으며, 1886년부터 헌법 제정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1889년 "천황이 국민에게 하사하는 형식"으로 헌법이 공포되었고, 제한 선거에 의해 "양원제의회"가 설립되었으며, 1890년 첫 의회가 소집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정치적 변혁과 더불어 경제적ㆍ사회적 변화도 이루어졌다. 아직 일본경제는 농업 의존적이었지만, 정부는 "산업화"라는 목표아래 전략사업과 교통ㆍ통신 산업 등을 발전시켰다. 한편 이러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의 과학기술이 필요했는데, 이에 따라 "문명개화"의 기치 아래 사상에서 복식ㆍ건축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가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일본의 전통적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대대적인 서구화정책은 다소 주춤해졌다.
이러한 양상은 근대적 교육 제도의 발전에서 엿볼 수 있으며, 서구의 이론과 양식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중요시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예술과 문학에서도 두드러져, 초기에는 서구 양식들이 모방되었지만, 점차 서구 양식과 일본적 취향을 조화 있게 융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목표는 20세기 초가 되면서 대부분 달성되어, 일본은 근대 산업국가로 가는 길을 순조롭게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서구 열강에 치외법권을 인정했던 종래의 불평등 조약들은 1894년에 개정되었다. 영일동맹(1902)ㆍ청일전쟁(1894~1895)ㆍ러일전쟁(1904~1905)을 통해, 주요 열강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었다
※ 메이지 천황 (明治天皇ㆍ메이지 텐노ㆍ1852~1912ㆍ60세)
일본 제국의 제122대 천황(재위 1867~1912ㆍ45년) "쇄국령"을 실시하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와 "에조 공화국"을 2년간(1868~1869)의 "보신 전쟁"에서의 승리로 타파하고, 1871년 "산발탈도령"을 발표하고, 1876년 "폐도령"을 발표하고, 정부한테 항거하는 "사쓰마 번"을 1877년에 "세이난 전쟁(현재까지의 일본 마지막 대규모 내란 전쟁)"에서의 승리로 타파하고, 1879년 "류큐국"을 병합하고, 1881년 10년 후의 국회개설을 약속했고, 1889년(메이지22년)에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0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ㆍ연호는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을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 (明治大帝)ㆍ메이지 성제 (明治聖帝)ㆍ무쓰히토 대제 (睦仁大帝)" 등으로도 부른다.
2. 일본의 역사
구석기 시대 (BC 35,000~14,000)→ 조몬 시대 (BC 14,000~300)→ 야요이 시대 (BC 300~AD 250)→ 고훈 시대 (250~538)→ 아스카 시대 (538~710)→ 나라 시대 (710~794)
→ 헤이안 시대 (794~1185)→ 가마쿠라 시대 (1185~1333)→ 겐무 신정 (1333~1336)→ 무로마치 시대 (1336~1573ㆍ난보쿠초 시대(1336~1392ㆍ센고쿠 시대(1467~1573)→ 아즈치ㆍ모모야마 시대 (1568~1603)→ 에도 시대 (1853~1868ㆍ막부 말기(1603~1868)→ 메이지 시대 (메이지 유신ㆍ1868~1912)→ 다이쇼 시대 (1912~1926)→ 쇼와 시대 (1927~1947)→ 군정기 (1945~1952)→ 헤이세이 시대 (1989~현재ㆍ잃어버린 10년(1991~2000))→ 일본제국 (전전ㆍ1868~1947)→ 일본 (전후ㆍ1945~현재)
3. 배 경
1853년, 미국 동인도 함대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ㆍ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ㆍ러시아ㆍ네덜란드ㆍ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反)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ㆍ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4. 동맹
1866년, "사이고 다카모리(사쓰마 번 지도자)"와 "기도 다카요시(조슈 번 지도자)"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는데,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12.25일,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1867.01.0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5. 개혁의 내용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열강 나라를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ㆍ징병령ㆍ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ㆍ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① 중앙 행정
"막부 체제의 붕괴"로 중앙집권 국가의 확립을 서둘러야 했던 신정부는, "율령제"를 본보기로 한 명칭을 부활시켰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인해, 막부ㆍ섭정ㆍ간파쿠의 폐지와 일본 천황의 친정이 결정되어, 일본 천황 아래로 총재(総裁)ㆍ의정(議定)ㆍ산요(参与)로 나뉘게 되는 관제가 시행되었지만, "메이지 천황"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것을 보좌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메이지 원년 04.21일, "정체서(政体書)"가 공포되었고(정체서 체제), 다음 해 율령제의 2관 8성을 본뜬 "2관 6성제"가 발족한다.
구체적인 행정 기구로써는, "태정관(太政官)ㆍ신기관(神祇官)"을 두어, "태정관" 아래에 각 성(省)을 두는 "율령제"가 모사되었지만, 그 후 "민부성에서 공부성"으로 분리되거나, "형부성으로부터 사법성"으로의 개편 등 무수한 개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도가 안정되지 않았다. 또한 입법부인 좌원(左院ㆍ후에 원로원(元老院))ㆍ우원이나 지방관 회의등도 설치ㆍ폐지가 반복되었다.
중앙의 개혁은 1885년 내각제도의 발족으로 간신히 안정된다. 또한, 입법부에 관해서, "기도 다카요시" 등이 메이지 초부터 의회개설을 주장하였지만, 의회 제도를 발족시키기 위해선, 관제 개혁ㆍ민도(民度)ㆍ국민교육 등의 부분에서 미성숙하여 시기 상조였기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유사 전제(有司専制)"라고 불리는 "사쓰마ㆍ조슈 번"의 파벌에 의한 관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의 고조나, 여러 제도의 정비에 의한 개혁성숙 등도 있어, 1881년에 "국회 개설 조서"가 나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 등에 의해 의회제도를 전제로 한 헌법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헌법 심의를 위한 "추밀원"이 설치되었다.
1889년 "일본제국 헌법 공포", 1890년 "제국 의회"가 발족하여,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입헌 군주제ㆍ의회제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되었다. 수도에 대해선, 당초 "교토"에서는 구폐(舊弊)가 많다고 하여, "오사카 천도론"이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주창되었다. 그러나 "교토"에서 옮기는 것에 대해 반대가 많았고, "에도 성의 개성(開城)"도 있어, "에도"를 도쿄로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2번 도쿄 행차"로 의해 "태정관"도 도쿄에 옮겨져, 도쿄가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다.
② 지방 행정
메이지 정부의 지방 행정으로, "도쿠가와 가"를 "슨푸 번"으로 이동, 교토ㆍ나가사키ㆍ하코다테를 정부직할 "부(府)"로 한 것 이외는, 원칙으로서 이전의 "번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국강병 목적의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에 의한 정부의 지방 지배 강화가 필요했다. 우선, 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토지)ㆍ적(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知藩事ㆍ지한사)"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 체제(府藩県体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되어 자발적으로 "폐 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08.29일, "사쓰마ㆍ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 제도" 설치(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것에 대해선, "령제국"의 지명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명이 "부현명"이 된 곳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 이외는 눈에 띈 반발은 없었다.
③ 여러 제도의 개혁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모두 현으로 바꾸는 것)과 "태정관 제도"의 개혁을 거쳐, 중앙집권 체제가 갖추어짐으로써, 간신히 옛 막부 시대의 제도를 개혁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거의 동시에 "궁중 개혁"도 이루어져, 구래의 궁중 직이나 궁녀 폐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시종 등이 메이지 천황을 개혁군주에 어울리는 천황으로 양육하게 된다.
막부 말기에는 병약했던 "메이지 천황"도, 사족에 의한 양육 때문인지 건강도 회복하여,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도 배워, "메이지 국가원수"로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갔다. 특히 헌법 제정과정에서의 "추밀원"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고, 또 국회개설 전후 입헌정치 미성숙기에 수상이 빈번하게 사임, 교대했을 때에도 정국의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 아래의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무사 계급을 사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다이묘나 일부 승려 등을 새롭게 화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성 지배 아래로 두게 되었다.
또한, 유신정부는 서양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ㆍ기도 다카요시ㆍ이토 히로부미" 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지만, "잔류 정부"로 불리며,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ㆍ이노우에 가오루ㆍ오쿠마 시게노부ㆍ이타가키 다이스케ㆍ에토 신페이ㆍ오키 다카토" 등에 의해서, 차례차례로 개혁은 진행되어 갔다.
주 개혁으로는 학제(学制)개혁ㆍ지조(地租)개정ㆍ징병령ㆍ그레고리력 채용ㆍ사법제도 정비ㆍ단발령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사족이나 농민의 불만을 사서, 후에 "정한론"으로 이어졌다고도 말해진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나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욱 더 "오쿠보" 밑으로 내무성이 설립됨으로써, 여러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개화의 움직임ㆍ육식 보급ㆍ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ㆍ식산(殖産)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엔"을 도입(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일본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ㆍ전신망의 정비ㆍ철도 및 선박운수(민간우편 기선 미쓰비시 회사와 국책 회사인 공동 운수회사의 경합을 거쳐, 일본 유센 회사가 되었다.)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명의 선진 제도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오야토이 외국인"이라고 불리는 외국인이 기술지도ㆍ교육 분야ㆍ관제ㆍ군제정비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국가 건설을 도왔다.
6. 종교 정책
① 불교
종교적으로는, "고대의 제정일치"로 돌아가는 개혁인 점에서, 1867년 음력 01.17일에 제정된 직제에는 "하느님을 7가지 필두"에 두어, 음력 3월에는 "신불분리령"이 내려졌다. "신불 분리령"의 주 의미는 불교 배척이 아닌, "에도 시대"까지의 "신불절충"에서 불교와 신도의 혼합에서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복고적 시운은 불교조차도 외래의 종교로서 강하게 배척하는 "폐불훼석"으로 향했다.
② 기독교
1612년 기독교 금령에 의해, 막부의 질서에 반대하는 "반국가적 종교"로 규정되어 탄압받던 기독교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도 계속 금지되어, 기독교 지도자 총 140명은 하기(66명)ㆍ쓰와노(28명)ㆍ 후쿠야마(20명) 으로 나뉘어, 강제로 이주되었다. 그 후, 메이지 2년(1869년) 12.07일에는, 기독교인 약 3,000명을 가나자와 및 10개의 번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하지만 메이지 4년1871년)11월, "이와쿠라 도모미" 특명전권 "신도 국교화 정책"과 관련해서, 기독교 금지를 해제해도 "즉시 구미가 조약개정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에 근거한 정부 내의 보호파의 반대뿐만 아니라, 종교계나 일반 민중에서도 "사종문(邪宗門) 금지" 해제에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강해 분규(紛糾)하였으나, 1873.02.24일 "금지 고찰(高札)"을 제거, 그 뜻을 각 구니에 통고, 이주된 기독교도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드디어 종결되었다.
7. 외교 정책
신정부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구 막부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 여러 제도조사도 목적이었지만, 조약 개정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교섭도 준비되었지만, 일본을 근대국가라고 보지 않는 구미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아직 시기 상조였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 유럽화 정책 등 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8. 개혁의 영향ㆍ비판
주로 구 "사쓰마 번ㆍ조슈 번" 및 일부 구게에 의한 "전제 정치"였기 때문에, "번 파벌 정부"라고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중급 관료 이상에 구 "신판 번ㆍ막부 신하"였던 자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세력이 주도했다고는 하기 어렵다. "메이지 유신"의 개혁은 새로운 제도로 인한 모순을 낳기도 했지만, 단기간에 입헌제도 달성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개혁, 독립 운동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다만 대부분이 형태만의 개혁이나, 일면만 파악한 "위에서부터의 개혁"으로 시종하여, 성공한 예는 많지 않다. 전통주의자들은 신성한 "천황제"가 현대 문명에 양보를 강요당하는 문제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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