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Ludwing van Beethovenㆍ1770~1827ㆍ57세)"는 "음악의 성인(聖人)ㆍ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영웅ㆍ보나파르트 나폴레옹)ㆍ교향곡 5번(운명)ㆍ교향곡 6번(전원)ㆍ교향곡 9번(합창)ㆍ비창 소나타ㆍ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1. 베토벤 (Ludwing van Beethovenㆍ1770~1827ㆍ57세)
독일의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ㆍ피아니스트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1826년 조카 "카를"의 자살기도로 인한 충격과 감기로 인해 폐렴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그는 "고전주의ㆍ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종종 영웅적인 인물로도 묘사된다.
그는 "모차르트ㆍ하이든"과는 달리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길이도 길지만, 음악적인 내용 또한 복잡하고 심오하다. "교향곡 제5번(운명)"만 해도 1803년부터 5년 동안 셀 수 없이 고치고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이와 같은 결벽에 가까운 완벽한 작가정신이 그를 "악성(樂聖)"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2. 외모ㆍ성격ㆍ사생활
신장은 168cm로, 당시의 남성으로는 평균 이상이었으며, 신체는 근육질에 건장한 편이었다. 백인으로서는 피부가 검은 편이었고, 천연두 반흔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용모가 미남이라고 지칭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정은 풍부하고, 생기 넘치는 눈빛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많은 숭배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옷을 차려 입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제자 "체르니"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로빈슨 크루소"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머리 주변에서 부스스 곤두선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방은 난잡한 반면, 목욕과 빨래를 선호하는 등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결벽증처럼 손을 집요하게 씻는 버릇도 있었다. 또한 생애 최소 60회 이상 이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빵ㆍ날달걀을 넣고 푹 삶은 수프ㆍ생선ㆍ고기ㆍ마카로니 앤드 치즈를 좋아했다. 와인을 즐겼고, 브랜드는 값싼 "토커이 포도주"를 선호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커피는 한 잔을 끓일 때마다 60알의 원두를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격은 모순이라할 정도로 정반대인 측면이 있었다. 사귐성있게 친절하고 순진하면서도, 엄격하고 냉혹하며, 무도할 정도의 행동을 하는 등 기분의 흔들림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빈"에서 괴짜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경애받고 있었고, 그것은 성대한 장례식과 다수의 참석자를 그린 서화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미혼
1801년(31살),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서신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라는 글귀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 편지는 "브라운슈바이크 백작"의 딸이며, 피아노 제자인 "테레제와 요제핀"의 사촌인 "줄리에타 주치아르디 백작부인"에게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명 "월광 (Mondschein)"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르를 헌정한 대상도 바로 그녀였다. 1803년(33살), "줄리에타"는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고, 이후 그녀를 정도 경멸했다. 그녀의 사촌인 "요제핀"에게도 결혼 신청을 했다 (전 남편인 "폰 다임 백작"은 1804년 세상을 떠남). 만남은 3년 정도 계속되었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요제핀" 가족의 압력으로 끝이 나고 만다. 1810년(40살), "테레제 말파티"라고 하는 주치의 딸과도 결혼설이 나돌았지만, 이것 역시 무산된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잠겨진 서랍에서 여성에 대한 심정과 관련해서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3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편지들은 "불멸의 여인" 앞으로 씌어진 것들로서 그는 이 편지들을 쓰고 난 뒤,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고 서랍에 보관해 둔 셈이다. 편지 내용은 시적 정서에 잔뜩 부풀려진 것에서부터, 건강과 생활의 불편함에 대한 사소한 불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따라서 이 편지들이 문장 연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특정인에게 보낼 의도로 씌어진 것이었다. 물론 수신인이 누구인지는 추측할 수 없다.
4. 사인 (死因)ㆍ건강
만성 "복통ㆍ설사"는 일생의 골칫거리였고, 사후에 실시된 부검에서 "간ㆍ신장ㆍ비장" 외에도 많은 내장 손상이 보였다. 이 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정설은 없다. 최근 "모발"에서 통상의 100배 가까운 "납"이 검출되었는데, "납"은 청각ㆍ정신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중금속이다.
① 청각 장애
난청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796년경(26살)부터 점차 청력을 잃어갔으며, 1820년(50살)에는 완전히 청력을 상실했다.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치아와 피아노 건반을 스틱으로 연결함으로써,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어, "귀경화증(귀硬化症) 설"도 있다.
② 선천성 매독 설
"증발성 연고를 몸에 칠했다(수은의 가능성ㆍ당시 매독의 치료법 중 하나)"는 기술이 있다. 모발을 분석한 결과, 수은이 검출되지 않았고, 게다가 "매독"은 현기증을 병발하는데도 그런 말이 없어 "선천성 매독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③ 납 중독 설
와인의 감미료로 사용된 "아세트산 납"이라는 설과 1826.01월부터 "간경화"에 의한 복수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복수를 배수할 때, 상처 소독을 위해 사용된 납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5. 생애
"독일 본"에서 궁정 가수로 있었던 "요한 반 베토벤"과 "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 앞에 붙어있는 "van"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네덜란드" 출신이다. 그는 초등학교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교양을 쌓기 위하여, 많은 문학ㆍ철학 서적을 탐독하며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으로 귀족들의 상류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연주활동에 자극을 받아, "베토벤"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만들려고, 피아노ㆍ바이올린ㆍ오르간ㆍ비올라" 등 여러 악기를 가르치면서 혹독한 음악교육을 시켰다.
비록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은 되지 못했지만 그도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8세 때, "하프시코드"로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였고, 11세 때에는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13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다. 1779년에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해 온 "네페"에게 오르간ㆍ대위법을 배웠다. 1783년, "네페"의 추천으로 임시로 궁정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맡았고, 이듬해에 정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787년, "빈"을 방문하여 "모차르트"를 만났고, 이후 4년 동안 "궁정교회ㆍ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였다. 1792년, "빈"에 정착했으며, 영국여행을 하고 귀국하는 "하이든"을 만난 것을 계기로 스승 "하이든"에게 대위법ㆍ작곡이론을 배웠다. "쉔크ㆍ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대위법ㆍ푸가를 배우고, "살리에리(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에게는 이탈리아 성악기법을 배웠다.
"빈" 초기에는 여러 귀족들의 모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연주회에 출연했으며, 귀족의 자녀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였고, 작품에 대한 출판료도 받았지만, 생활은 여유가 없었다. 1795년부터 작곡ㆍ연주에 전력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으나, 이때부터 청각 장애가 나타났다. 병이 점차 악화되자, 1802년 "빈"의 외곽지역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2명의 동생에게 병으로 절망에 빠진 자신의 삶을 적은 유서를 남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이다.
유서의 내용처럼 그는 자살할 정도로 실의에 빠져있었으나, 다시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1802년 이후, 10년 동안 대부분의 "교향곡"이 탄생했고, 이들 작품 이외에도 "피아노 소나타(6개)ㆍ피아노 협주곡(3개)ㆍ피아노 트리오(3개)ㆍ오페라 피델리오ㆍ현악4중주(5개) 등이 이때 작곡되었다. 1813년 이후, 5년간은 작품을 작곡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1820년, "조카 카를"의 양육권 문제가 해결되면서 다시 창작활동이 활발해졌고, "피아노 소나타 30~32번ㆍ교향곡 제9번ㆍ장엄미사ㆍ현악 4중주 op.127ㆍ130~132ㆍ133(대푸가)ㆍ135등 다수의 작품들이 작곡되었고, 1826년 조카 "카를"의 자살기도로 인한 충격과 감기로 인해 폐렴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하였다.
6. 작 품
① 교향곡 3번 (영웅ㆍ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그에게 "나폴레옹"이야말로 "자유정신ㆍ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세기의 영웅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1798.02~04월까지 "빈"에서 "프랑스 대사"로 있던 "베르나도 장군"이 "베토벤"과 친분이 있어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관심을 고무시켰던 것이다. 이런 경위로 혁명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은 1804년 봄에 완성되었다. 작품에서는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독창적이고도 강한 개성의 힘과 균형 있는 양식으로 진실한 도덕성을 표현했으며, 그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될 때까지는 이 곡이 가장 좋은 작품인 것으로 말했다.
② 교향곡 5번 (운명)
그의 교향곡 중 최고의 걸작으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1803~1808년 사이에 다듬은 후 완성되어 "로브코비쯔 후작ㆍ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헌정되었으며, 1808.12.22일에 자신의 지휘로 "빈 극장"에서 "전원 교향곡ㆍ합창 환상곡"과 더불어 초연되었다.
③ 교향곡 6번 (전원)
5번이 "인간ㆍ남성적"을 표현한 것이라면, 6번은 "자연ㆍ여성적"을 다루었고, 전자가 지극히 집중적으로 응결된 것이라면 후자는 넘쳐흐르는 것이라고 상대적으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각 악장에도 표제가 붙어 있으나, 자연의 풍경을 단순히 묘사한 음악은 아니며, 자연에 대한 감정과 관념의 표현인 것이다. 후에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 탄생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④ 교향곡 9번 (합창)
1824년, 9번째 교향곡이자 마지막 교향곡이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쓴 작품으로, 이 음악은 노래ㆍ합창을 수반한 교향곡이다. 제4악장은 독창ㆍ합창과 함께 연주되고, 가사는 "환희에 붙임(실러의 시 An die Freude)"이 사용되며, 주제는 "환희의 송가(Ode to Joy)"로 사랑받고 있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토벤"에 의해서 봉정된 "교향곡 작품 125"라고 기재되어 있다. 1793년, 고향인 "본"에 있을 때부터, 곡의 작품을 구상해 왔는데, 1822년에 "런던 필하모니협회"에서 교향곡의 작곡 위촉장을 받았다. "합창 교향곡" 구상을 즉시 실현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작곡 의도를 품은 때로부터 완성까지 실로 30여년에 걸친 것이다.
1824.05.07일, "빈의 케른트네르 극장"에서 자신의 총 감독 하에 "움라우프"의 지휘로 그의 다른 작품 "장엄 미사ㆍ서곡 헌당식"와 함께 초연되었다. 등을 지고 서 있던 "베토벤"이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자, "웅가르(알토 가수)"가 팔을 잡아 알려 주었다. 그가 돌아보고 답례했을 때, 청중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더욱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⑤ 비창 소나타 : 피아노 소나타 제8번ㆍC 단조ㆍop.13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호모포닉(단선율을 위주로 하는 화성진행)"한 곡이며, 곡의 구성이 극적이고, 압도적인 연주효과로 대중적 인기까지 차지한 곡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소나타가 그의 생애 전반기를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 작곡가의 고독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인내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의 작곡을 시작할 당시 그는 이미 자신의 청각 장애의 최초 징후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작품이 그의 "로미오와 줄리엣" 시대의 심경, 즉, 청춘의 애상감을 묘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⑥ 월광 소나타 : 피아노 소나타 제14번ㆍC sharp 단조ㆍop.27-2
그가 귀 먹었을 때, 어떤 소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1악장ㆍ3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며, 2악장이 "짧은 미뉴에트"라는 점이 다른 곡과 다르다. 1악장은 보통 활기찬 느낌과는 달리, 나른한 선율과 조용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2악장은 활기찬 "미뉴에트"이다. 2악장은 고요한 1악장과 격렬한 3악장을 이어주는 인상이며, 멜로디는 우아하다. 3악장은 Presto agitato답게 매우 빠르고 격하게 연주되며, 어떤 음악보다도 격렬하고 열정적인 음악이다. 1주제의 급박한 분위기는 2주제에서 더욱 고조되고, 아다지오로 변하면서 한숨을 돌리지만, 이윽고 다시 presto로 돌아오고, 짤막한 코다로 들어간다.
⑦ 열정 : 피아노 소나타 제23번ㆍF 단조ㆍop.57
상당한 난이도로서, 그의 모든 "피아노 소나타"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연주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이나 차분한 마음가짐을 요구한다. 1악장은 처음부터 곡이 긴장되고,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 정도이며, 1주제의 관계 장조인 A-flat장조이므로 3대 소나타 중 유일하게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이후 복잡한 발전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재현부가 나타난 후 거대한 코다로 들어간다. "피아니시모"로 시작하여, "피아니시시모"로 끝을 맺는 특이한 구조이다.
⑧ 에그몬트 서곡
이 곡은 그가 "괴테의 에그몬트"를 보고 감동을 받아, 서곡ㆍ막간음악 등을 작곡하여, "연극 에그몬트"를 음악화했는데, 그 중의 "서곡"이다. "에그몬트 백작"은 실존 인물로, 네덜란드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 조국을 "스페인"의 압제에서 구하려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애인 "클레르헨"은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여 자살한다. 그러나 그녀의 환영은 "자유의 여신"이 되어, 옥중의 "에그몬트"를 격려한다. "에그몬트"의 기백을 상징하는 듯한 장대한 음악ㆍ물결치는 심장의 고동과 공포의 예감이 제대로 그려진 절경ㆍ 이것이 이 음악에 바쳐지는 찬사이다. 따라서 이 음악은 웅장하고 격정적이다. 비극적인 "서주"로 시작하여, 시종일관 비장함으로 진행되다가 최후의 클라이막스에서 울리는 당당한 승리의 행진곡으로, 특히 환상적인 피날레는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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