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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음악사

음악 작곡가 ⑤ 파가니니 : Niccolò Paganiniㆍ1782~1840

by 당대 제일 2023.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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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ㆍ1782~1840ㆍ58세)"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ㆍ작곡가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ㆍ바이올린의 마술사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낭만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1.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ㆍ1782~1840ㆍ향년 58세)

투자했던 도박장 "카시노 파가니니"가 실패하자, 1839년 "마르세유"로, 나중에는 "니스"로 옮겨갔다. 낭만적인 성격과 모험심으로 도박에도 몰두했으며, 그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다거나 살인죄로 감옥에 갔다 나왔다는 등 소문이 무성하여, 죽은 뒤에도 정식으로 묘소에 묻히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출 생 : 이탈리아 제노바         사 망 : 프랑스 니스         사 인 : 결핵         작 품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1곡인 D장조 협주곡이 특히 인기를 모았던 "바이올린 협주곡 6"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1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기타를 위한 "4중주 6"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돈도 많이 벌어 "수전노"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오랫동안 "욕심쟁이 수전노"로 알려져 왔지만, 많은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의존하거나 일방적인 지원을 청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모두 보살필 수 없었던 그에게 안 좋은 소문이 돌기도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작곡가 베를리오즈"에게 2만 프랑을 선사했던 것을 그의 관대함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는 "베토벤의 후계자인 베를리오즈"의 가치 있는 재능을 인식하고 그 작곡가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엄청난 테크닉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ㆍ1782~1840ㆍ58세)"는"가 연주회에서 엄청난 연주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바이올린을 부숴버리는 일이 있었다. "파가니니"가 외형이 똑같은 "가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무대에 올라와 연주를 하였는데, 연주가 끝난 뒤 예전과 같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는 바이올린을 내팽개쳐, 밟아 부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는 "가짜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를 한 "파가니니"의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11살의 나이에 연주자로 데뷔해, "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ㆍ파리ㆍ런던" 등을 오가며 뛰어난 연주 실력을 발휘했다. 바이올린 연주기교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며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인기를 한몸에 받는 우상이었던 그는 명인들이 지니는 낭만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바이올린 연주기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가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은 "바이올린 기법"은 후대 거장들이 자주 모방했다.

작곡가로서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ㆍ프라지오레토ㆍ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ㆍ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C의 작곡가들(리스트ㆍ브람스ㆍ라흐마니노프) 등은 그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연주기법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주로 "카프리치오ㆍ바이올린 협주곡ㆍ일련의 변주곡" 등에 바탕을 둔 그의 바이올린 기법은 "운지법"과 심지어 "조율"에서조차 새로운 "피치카토 효과"와 화성을 폭넓게 사용했으며, 눈부실 정도의 즉흥 연주를 보여주었다.

또한 1~2개의 "바이올린 현"을 끊어버리고, 나머지 현 위에서 작품을 계속 연주하는 것 같은 재주를 부렸던 뛰어난 연주가이기도 했다. 그가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은 바이올린 기법은 후대 거장들, 특히 "파블로 사라사테ㆍ외젠 이자이" 등이 모방했다. 그가 일으킨 기법상의 영향은 피아노 음악뿐만 아니라 "관현악"에도 미쳤고 특히 그가 "리스트"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카프리치오"의 주제들은 "리스트슈만브람스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3. 일 화

"런던의 템스"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 거지 노인이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낡아빠진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신통치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거지 노인이 벗어놓은 모자에,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웬 낯선 외국인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지 노인이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지 노인은 다 떨어진 외투를 입고, 신발도 떨어져서 너덜너덜했다. 심지어 머리도 제대로 감지 않아, 덥수룩한 상태로 보기에도 처량해 보였다. 외국인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측은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갑자기 빈 몸으로 산책을 나오느라 지금 제 수중에 준비한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잠시 몇 곡 연주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거지 노인은 잠시 쉬기로 마음을 먹고, 그 낯선 외국인에게 낡은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외국인은 그것을 손에 쥐고서 천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낡은 바이올린에서 놀랍도록 신기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걸음을 멈춰 서서, 외국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매료되었다. 1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2곡이 끝난 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거지 노인은 자기가 벗어놓은 모자를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노인의 모자에 넣었다. 순식간에 돈이 수북히 쌓였다. 그것도 한 푼 두 푼 던져주는 동전이 아니라, 돈의 단위가 높았다. 모두가 지폐를 꺼내어서 모자에 넣었던 것이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경찰관이 놀라서 달려왔다. 그러나 경찰관마저도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울려 퍼지자, 매료되어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하다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거지 노인의 모자에 넣어 주었다.

연주가 끝났다. 그곳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때였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 사람은 파가니니이다, 그 유명한 파가니니" ​그가 "런던"에 연주차 와서 호텔에 머물러 있을 때, 잠시 시간을 내어 "템스 강변"을 산책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불쌍한 거지 노인이 바이올린을 힘겹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대신 몇 곡을 연주해 주었던 것이었다.

4. 생 애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처음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 뒤로 지방의 바이올린 연주자 "G.세르베토"에게, 다음에는 유명한 "자코모 코스타"에게 지도를 받았다. 1793년에 데뷔했고, 그 후 "파르마"에서 "알레산드로 롤라ㆍ가스파레 기레티"에게 배웠다. 1797년, 아버지와 동행하여 "롬바르디아 순회 연주"를 했는데 연주회가 거듭될수록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그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에 휩싸이게 되었다. 곧 아버지로부터 독립했으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ㆍ도박ㆍ연애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졌다.

한 번은 빚 때문에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기까지 했고, 그 소식을 듣고 그에게 "구아르네리 바이올린"을 빌려준 프랑스의 상인 덕택에 겨우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상인은 그의 연주를 듣고, 그 바이올린을 "파가니니"에게 주었다. 1801~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ㆍ중음주법ㆍ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1~1807년 새로운 특징이 돋보이는 기교를 선보인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곡의 "카프리치오",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6곡의 "소나타 작품 2ㆍ작품 3"을 썼다. 1805년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엘리자 보나파르트 바치오키(나폴레옹의 누이)"의 추천을 받아 "피옴비노의 음악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후일 이탈리아 여러 지방을 돌며 자신이 작곡한 곡들만으로 연주회를 개최했고, 1815년에는 무용가 "안토니아 비안키"와 오랜 친분을 맺게 되었다.

 1826년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나 단조 <Violin Concerto No. 2 in B minor, Op. 7> 중 3악장이 유명한 라 캄파넬라 (La Campanella, 작은 종)이다. 론도이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멜로디가 반복된다.

1828년, "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831년 "파리ㆍ런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1832년, 가진 "영국ㆍ스코틀랜드" 순회 연주로 부자가 되었다. 1833년, "파리"에 정착해, "베를리오즈"에게 교향곡 "이탈리아의 아롤드(Harold en Italie)"를 쓰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 곡의 비올라 독주 부분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연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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