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France)"는 "대서양ㆍ지중해"에 맞닿은 유럽의 본토에 있는 "공화국"으로, "영국ㆍ독일ㆍ러시아"와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 중 하나이다.
1. 프랑스 (France)
BC 7C 경 : "켈트 족"이 정착하고, "프랑스" 모든 지역을 지배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 "로마인"들은 이들을 "갈리아인"이라 부르고, 지역을 "갈리아"라고 불렀다.
"갈리아인"들은 금발에 흰 피부, 거대한 몸집을 지닌 전투적인 민족이었다. 전성기 때, "갈리아인"들은 "로마제국"에 거의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땅을 차지했는데, 산만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인지, "통일 국가"를 만들지는 못했다.
"갈리아"는 이웃나라 "로마제국"과 전쟁을 자주했고, BC 58년, "로마"에서 명성이 높아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시작한다. 수년에 걸친 전쟁 끝에 "카이사르"는 100만 "갈리아인"의 피를 뿌리며, "갈리아"를 정복한다. 이때부터, "갈리아"는 "로마 화" 되기 시작한다.
2C 후반, 혼란에 빠진 "로마제국"에 내전이 빈번하고, 북방의 "게르만족"이 "로마"로 침입한다. 260년, 이런 위기를 해결하려는 "로마"가 "갈리아"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리자, "포스투무스(갈리아 장군)"은 스스로 왕이 되어, "갈리아 제국"을 세운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로마"는 다시 "갈리아 지배권"을 회복한다. 이후에도 끝임 없이 이어진 "갈리아인"의 반란은 "로마제국" 붕괴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한편 "로마"의 국경선을 뚫고, 계속 밀려오는 "게르만족"은 "동고트ㆍ서고트ㆍ프랑크"등 수많은 부족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4C "훈족"의 압박으로 인해, "게르만족의 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2. 406년 겨울, "게르만족"은 "라인강"을 넘어, "갈리아"에 들어갔고, 쇠약해진 "로마제국"은 그저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
"게르만족"이 "갈리아"에 들어와 세운 왕국 중에서, 후대 "프랑스"에 제일 큰 영향을 준 "프랑크 왕국"이 이때 탄생한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의 "클로비스"가 "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던 중, "프랑크 왕국"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클로비스"는 상황이 불리해 지자, 하느님에게 "회생기회를 준다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고 기도한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상대편 내부에 혼란이 발생했고, 결국 "클로비스"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후 "클로비스"는 군사 3,000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
"메로빙거 왕조"의 지배권이 약화되자, 왕실을 관리하던 "궁재ㆍ재상 (宰相)"들에게 실권이 넘어간다. 이때 "프랑크 왕국"을 침략한 "이슬람군"을 궁재인 "샤를 마르텔(680~741)"이 격파하게 된다. (카롤링거 왕조)
741년, "샤를 마르텔"이 세상을 떠나자, "피핀 3세(714~768)ㆍ형 카를로만(706~754)"이 "프랑크 왕국 궁재" 자리를 물려받는다. 746년, 형제의 결전 끝에 "피핀 3세"가 "카를로만"을 무너뜨리고, 역사상 교황이 국왕을 위해 거행한 "첫 대관식"을 거행하며, 새롭게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연다.
이후 "피핀 3세"가 아들 "샤를마뉴(카롤루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는 재위 수십 년 동안 약 50여 차례 전쟁을 벌였고, 유럽 중서부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한다.
"샤를마뉴"는 반대파를 피해, 감옥에서 탈출한 "로마 교황"이 다시 지위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데, 800년 "샤를마뉴"가 "로마"를 방문하자, 큰 도움을 받았던 "교황"이 친히 교외까지 영접하러 나온다. 당시에는 "황제"가 방문했을 때만, "교황"이 영접하러 나갔는데, 결국 "로마 교황"에 의해 "샤를"은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에 임명되었고, "샤를 대제"라 불리게 된다.
따라서 "프랑크 왕국"은 "샤를 제국"으로 불리게 되고, 자연스레 "고대 로마제국"을 잇게 된다.
이렇게 전성기를 달리던 "샤를 제국"도 "샤를 대제"가 죽자, 세 손자들의 암투로 분열된다.
3. 843년,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면서, "샤를 제국"의 역사는 끝이 나고, 3등분 된다. (서 프랑크 (프랑스)ㆍ동 프랑크 (독일)ㆍ중 프랑크 (이탈리아) ) → 이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프랑스 역사"가 시작된다.
"서 프랑크(프랑스)"의 "샤를 대제"가 죽고, 뒤를 이어 10년간 3명의 왕이 평범하게 살다가 일찍 죽고, 987년 "루이 5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위그카페(938~996)"가 왕으로 추대되어, "위그카페 왕조"시대가 들어선다. "위그카페"는 강력한 왕권을 원했으나, 각지의 귀족들은 마음대로 영지를 자기 땅으로 만들어, 자식들에게 물려준다.
1137년, "루이 7세(1120~1180)"는 경제ㆍ문화발전에 힘썼고, 이때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착공된다.
1180년, 아들 "필리프 2세(1165~1223)"가 즉위한 뒤, 귀족들의 위세를 꺾으면서, 왕실 권위를 크게 높인다. 영국왕자 "리처드(1157~1199)"와 연맹을 맺고, 영국 왕 "헨리 2세"와 싸우도록 부추긴다.
그렇게 "필리프 2세"는 어부지리로 일부 영토를 얻어내는데, 뒤에 영국에 "사자왕 리처드"가 즉위하자, "필리프 2세"는 이번에는 "사자왕 리처드"의 동생 "존(1166~1216)"이 형과 "왕위쟁탈"을 벌이도록 부추긴다. 이렇게 왕이 된 "존"은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땅을 너무 많이 잃어서, "실지왕"이라 불린다.
"필리프 2세"는 영국을 무찔렀다는 업적 외에, "파리"를 수도로 결정한다. 이때 성벽ㆍ도로를 수리하여, "파리" 모습을 재정비한다. 1328년,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카페 왕조"가 끝이 난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은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영국왕 에드워드 3세"였으나,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이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민들은 프랑스 태생인 "필리프 드 발루아(필리프 6세ㆍ1293~1350)"를 새 왕으로 지지한다. 결국 그가 "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1328년 "발루아 왕조"가 시작된다.
4. 하지만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가만있지 않았는데, 자신이 후계자라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자, "영국ㆍ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이다.
1348년,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면서,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흑사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국왕 "필리프 6세"도 "흑사병"으로 죽고, 인구가 줄어 양국이 타격을 입자, 10여 년간 전쟁을 멈추기도 한다.
1355년, "영국"에 의해 다시 전쟁은 시작되고, "프랑스"를 눌러갔는데, 전쟁 후반기에 쓰러져가는 "프랑스"를 구원할 영웅인 "잔 다르크(1412~1431)"가 나온다.
그녀는 평범한 시골소녀로, 13살 때부터 계속 "신의 계시"를 받는다. 계시 내용은 "프랑스를 이끌어, 영국을 물리치고, 왕세자 샤를을 왕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왕세자 샤를"은 영국에 의해, "프랑스 남부"까지 밀린 상황이었고, "프랑스 국토"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잃은 상태였다.
남은 "프랑스 남부"마저 함락될 위기에서 "잔 다르크"는 고향 근처의 장군을 찾아가 계시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장군이 코웃음을 쳤지만, 전쟁에 대한 그녀의 예언이 맞아 떨어지자, 정말 그녀가 프랑스의 희망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왕세자 샤를"을 만나게 해준다. "왕세자 샤를ㆍ귀족들" 모두가 그녀를 의심했지만, 그녀가 "샤를"만 알고 있던 비밀을 말하자, "신이 프랑스를 구원하려고 보낸 사자"라고 믿게 된다.
1429.04월, 그녀는 수천명의 프랑스 군인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장으로 향한다. 1431년, "프랑스 귀족"에 의해 "영국"에 팔려간 "잔 다르크"는 마녀로 몰려, 18세에 "화형"을 당한다.
그녀의 지휘로, "영국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게 된다. 결국 "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을 가지며, "샤를 7세(1403~1461)"로 등극했고, 옆에는 손에 깃발을 든 그녀가 함께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그녀 명성에 귀족들의 질투는 커져갔고, 결국 그들은 그녀를 없앨 계획을 세운다.
※ 잔 다르크ㆍ성녀 요안나 아르켄시스 (Jeanne d'Arcㆍ1412~1431ㆍ18세)ㆍ흰 갑옷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전세가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판단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녀는 "샤를 7세"의 의견을 끝까지 반대하여 잉글랜드가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신이 지시를 내린 적도 없었음에도 적진을 공격하는 그녀의 행동이 계속되어 협정에 찬물을 끼얹자 그녀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진다. 1430년 "오를레앙"이 잉글랜드에게 함락된 것이다. 게다가 "오를레앙"을 지키던 그녀도 포로가 되고, 잉글랜드는 이를 이용하여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요구하였으나 지금까지 자신에게 많은 승리를 안겨준 그녀를 매정하게도 몸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버린다.
1453년, 프랑스는 "백년전쟁 (1337~1453)"에서 승리한다.
전쟁이 끝난 후, "잔 다르크"는 "교황"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된 프랑스에서 용맹함ㆍ낭만을 갖춘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왕위에 오른다. 어릴 때부터 예술을 사랑한 그는 훌륭한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해, 든든하게 후원한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네오나르도 다빈치"인데, 프랑스에 있는 동안 "모나리자"라는 작품을 남긴다.
이렇게 "프랑스 르네상스 전성기"의 초석을 다진 그는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잠시 "밀라노"를 쟁취하기도 한다. 건축에도 조예가 깊어서, "루브르 궁전ㆍ샹보르 성ㆍ퐁텐블로 궁전"을 남긴다. 1520년대 이후, 프랑스에 전해진 "칼뱅사상(1509~1564)"으로 신교도들이 생기는데, 이들은 "동맹자"라는 의미의 "위그노"라 불렸다.
기존 "가톨릭"과 "신교도 위그노"가 충돌하면서, 1562년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발발한다.
"앙리 4세(1553~1610ㆍ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 왕)"은 양쪽 모두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면서, 30년간의 "종교전쟁"을 끝낸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한다.
5. 1643년, "루이 14세(1638~1715)"가 5살 나이로 등극하는데, 성인이 된 "루이 14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를 연다. "짐이 곧 국가다"는 말로 유명한 그는 70여 년간 통치하면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연다.
그는 귀족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파리" 교외에 28년에 걸쳐,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귀족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떠나, "베르사유 궁"에 머물도록 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고 장엄한 왕궁으로, 이곳에서 많은 녹봉을 받으면서, 점차 유희에 빠져든 귀족들이 관리하던 영지의 국민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루이 14세"는 이렇게 귀족세력을 약화시킨다.
그는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1682년 "왕권이 교황보다 높다"는 주장을 하고, 종교통일을 위해, "신교도"들을 숙청한다. 프랑스는 "순수 가톨릭 국가"로 바뀐다. 또한 그는 유럽을 제패하기 위해, 여러 정복전쟁을 펼친다. 전쟁으로 인해, 재정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의 사후, 프랑스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1774년, "루이 16세 (1754~1793)"가 즉위했을 때, 프랑스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의 사치가 하늘을 찌르고, 현실을 회피한 "루이 16세"가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동안, 화려한 궁 밖에선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루소ㆍ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새로운 세계관을 접한 프랑스인들은 "신분제ㆍ절대군주제가 당연하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벗어나, "자유ㆍ평등"에 눈을 뜨게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였고, "자유ㆍ평등"를 갈망하던 프랑스인들이 절대 권력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
"프랑스 인권 선언문"이 선포되고, 1792년, "국민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했으며, "자유ㆍ평등ㆍ박애"를 이념으로 하는 "공화정"을 선포한다. 1793년, 이 혁명의 불길로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공개처형을 당한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자코뱅파"가 공포정치를 시행하자, 결국 "반동"이 일어나고, 반복되는 권력투쟁으로 프랑스의 혼란이 극심해진다.
6. 이런 혼란기에 등장하는 "나폴레옹 (1769~1821)"
1799년,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귀국한 "나폴레옹 군대"가 "의회"를 해산시키고, 순식간에 정권을 잡는다. "나폴레옹"은 내정ㆍ외교에 훌륭한 성과를 냈고, 나라를 안정시키며,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1804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공화국"이 끝나고, "나폴레옹 제국"이 시작된다. 그가 건설한 제국은 "프랑스 제1제정"이라 부른다.("샤를마뉴"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
이후 "나폴레옹"은 주변국을 정복하며, 세계에 명성을 떨치다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섬으로 유배를 떠나고, 후에 섬에서 탈출해 "파리"에 입성하여 "프랑스 황제"에 복귀한다.
1815년, 하지만 유럽 각국이 뭉쳐, "워털루 전투(벨기에)"에서 그를 격파하자, "나폴레옹"의 황제 복귀는 이른바 "백일천하"로 끝이 난다.
이후 왕정복고로 "루이 18세(1755~1824ㆍ루이 16세 동생)"가 등극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미 새로운 삶을 경험한 국민들은 예전의 어두웠던 세상으로 돌아가길 거부했고, 결국 "7월 혁명"을 일으켜 "파리"를 손에 넣는다. 이에 "샤를 10세(1757~1836ㆍ루이 16세 동생)"는 "베르사유 궁"으로 도망을 가고, "루이 필리프 1세 (1773~1850) "가 국왕으로 추대되어, "7월 왕정"을 세운다.
그는 "민주주의 대표"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조 자체가 이미 시대 흐름에 맞지 않았다.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하면서, "7월 왕조"은 끝내 막을 내리고 만다.
7. 임시정부는 "프랑스 제2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루이 나폴레옹(1808~1873ㆍ나폴레옹 조카)"를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하지만 야망을 품고 있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민투표로 "군주제"를 복귀시킨다. 1852년, "프랑스 제2제정"이 정식 성립되어, 그는 "나폴레옹 3세"로 황제에 즉위한다.
"나폴레옹 3세"는 독재의 권력을 맘껏 휘두르면서, "황제ㆍ정부에 반대하는 자는 즉시 감옥에 넣을 수 있다"는 "안전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프랑스에는 "백색테러(극우테러)"의 공포가 치솟는다. 그는 유럽 각국과 정복전쟁을 펼치다가, 주변국들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생명을 늘려보고자, "프로이센"과 전쟁을 일으켰으나, 포로로 잡혀 항복한다. 이에 임시정부가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을 설립한다. 같은 해, "파리" 시민들은 사회주의 자치정권인 "파리 코뮌"을 세우지만 "제3공화국"은 이를 진압한다.
이후 내부 분열이 일어나, "왕당파ㆍ공화파"가 "군주제ㆍ공화정" 사이에서 대립한다.
끝내는 "공화파"가 승리하면서, 프랑스의 정치체제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였고, "아프리카ㆍ아시아"에 식민지를 확대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방어가 최고라는 생각에 국경에 "마지노 선"을 건설한다.
※ 마지노 선 (Ligne Maginot)ㆍ마지노 요새ㆍ최고의 군사 건축물 (공사비: 160억 프랑) : 최후의 방어선ㆍ넘어서는 안 되는 선ㆍ넘지 못하는 선 등 의미
1936년, "프랑스"가 "독일"의 국경에 쌓은 긴 요새이다. "앙드레 마지노(프랑스 국방부장관)"의 요청에 따라, 1927~1936년에 "알자스~ 로렌"에 이르는 "마지노 선"이 완공되었다. 벙커형태의 건물에 포ㆍ총을 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독일군"이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940년 "독일"은 "벨기에"로 침입한 다음, 우회하여 "프랑스"에 침공하면서 "마지노 선"은 쓸모없게 되었다.
8. 1940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는 "비시 프랑스(Vichyㆍ1940~1944년)ㆍ자유 프랑스"로 양분화 되면서, "제3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비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으나, "자유 프랑스"는 땅을 되찾고, 승리를 거둔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임시정부를 거쳐, 1946년 헌법이 발효되고, "제4공화국(1946~ 1958)"이 수립된다. 이후 "식민지의 독립운동" 등의 문제로 혼란에 빠졌고, 결국 1958년 국민투표로 "샤를 드골"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제5공화국(1959~ )"이 수립된다.
※ 샤를 드골 (Charles de Gaulleㆍ1890~1970) : 집권 후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유명하다.
임시정부 주석(1945.06~ 1946.01)ㆍ총리(1958.06~12)ㆍ프랑스 18대 대통령(1959.01)ㆍ레지스탕스 운동가ㆍ군사 지도자ㆍ정치인ㆍ작가 : "2차 세계대전"초반 "프랑스 공방전" 일부인 프랑스 동북부의 "아라스 전투"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여, "롬멜 유령사단"에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반격하였고, "국방부 육군차관(소장)"을 지냈으나, 후에 "망명 프랑스 자유 민족회의ㆍ임시정부"를 조직ㆍ결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총리를 2번 지내고, 18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65년 재선하였으나, 1969년 지방제도 및 상원개혁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패하고 물러났다.
※ 5월 혁명ㆍ68운동 (1968.05.03~ 06.23) : "샤를 드골 정부"의 실정ㆍ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ㆍ총파업 투쟁ㆍ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 사건이다.
처음에는 파리의 몇몇 대학교ㆍ고등학교ㆍ대학 행정부ㆍ경찰에 대한 학생 봉기로 시작했다. "드골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저항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는 운동의 열기만 점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라틴 지구의 경찰과의 가두 전투를 일으켰고,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ㆍ파리 전 노동자의 2/3에 해당하는 노동자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드골 정부"는 이러한 시위자들에 대항해서 군사력을 동원했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1968.06.23일 다시 "총선"을 실시했다. 이즈음 정부는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드골"은 "독일군 주둔 비행기지"로 잠시 피신하기까지 했으나, 혁명적인 상황은 지속되지 못했고, 좌파연합인 "노동 총연맹ㆍ프랑스 공산당"의 실책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복귀했다. 6월에 총선이 이루어지고 나서, "드골 정당"은 이전보다 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드골"은 이듬해 물러나고 말았다. 저항자들에게 1968년 "5월 혁명"은 실패였으나,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종교ㆍ애국주의ㆍ권위에 대한 복종" 등의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하는 "평등ㆍ성해방ㆍ인권ㆍ공동체주의ㆍ생태주의" 등의 진보적인 가치들이 사회의 주된 가치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현재의 프랑스를 주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 1달 동안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고, "5월 혁명"은 이러한 가치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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