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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신라 : 원효 (617~686ㆍ69세)ㆍ의상(625~702ㆍ77세)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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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617~686ㆍ69세)"와 "의상(625~702ㆍ77세)"은 나이는 "원효"가 8살이나 더 많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며 함께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원효"는 여행 도중 "해골 물 사건"을 겪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채 신라 땅 곳곳을 떠돌며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반면에 "의상"은 "원효"와 헤어진 후 "당나라"로 가서 불교 종파 중 하나인 "화엄종"을 열심히 공부하고, 귀국하여 "신라"에 "화엄종"을 널리 유포시키며, "왕"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 원효 (元曉)의상 (義湘) : 신라를 "불국토"로 만든 사람들

"원효""진평왕" , 승려가 된 사람으로, "경북 경산"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성씨는 "설 씨",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에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원효""()"자가 "새벽"을 뜻한다 "원효"가 불교에 입문한 것은 아주 어릴 때로, 승려가 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불교 장려책 속에 스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 "신라 사회""진골 귀족"에 의해서 운영되던 신분제 사회였기에, "원효"와 같은 지방 출신들은 제아무리 똑똑해도 출세에 제한이 있었다 따라서 신분의 한계 때문에 일찌감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반면 "의상"은 귀족 출신으로, 644(선덕여왕13) "경주 황복사"에서 승려가 되었는데, 661년에 닷길로 "당나라"에 들어가서 "지엄 대사(당나라 수도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의 지상사에서 수도하던 승려의상에게 화엄학을 가르쳐 준 스승)"를 스승으로 삼아 "화엄종"을 깊이 연구했다 그 후 670년에 귀국, "해동 화엄종"을 창시하여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원효1

2. "당 유학"을 위해, 길을 나서는 "원효의상"

"원효의상"이 한창 불법을 공부하던 때는 "신라"가 통일 전쟁을 치르던 "태종 무열왕"시대였다이 시기 신라 승려들에게는 "당나라"로 불교유학을 가는 것이 일생일대 소원이었는데, "원효의상" 그러했다두 사람은 처음에는 육지 길로 ""에 가기 위해, "고구려 땅"으로 몰래 숨어들어 "요동 지방"까지 올라갔다하지만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붙들려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간신히 "신라 땅"으로 되돌아왔다두 사람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 고향 땅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당나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여 이번에는 바닷길로 가기로 했다만반의 준비를 갖춘 두 사람은 "경주"를 출발하여, "충남 천안" 부근에 당도했다밤은 깊어 가는데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져,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두사람은 부득이하게 무덤 안에서 하룻밤 머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워낙 피곤하여 무덤인데도 자리를 잡자마자 깊숙이 잠에 빠져들었다"원효"는 한밤중에 심한 갈증이 일어, 비몽사몽 간에 머리 위에 놓인 물병에 든 물을 마셨다아침 해가 쨍쨍 무덤 위로 솟구쳤고, 눈이 번쩍 뜨인 "원효"의 뇌리에 어젯밤 맛나게 먹은 물맛이 불현듯 떠올랐고, 급히 물병을 찾았다! 그러나 물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병이 아니라, "해골바가지"였다갑자기 몸속에 있던 모든 것이 위로 밀고 올라왔다. 한참을 토악질하고 난 후에야 진정이 되었다.

그 순간 "원효"의 머리를 무언가가 비수처럼 꿰뚫고 지나가며 마음 문이 활짝 열렸다(수도사 (평택 포승읍 위치): 원효대사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 수도사 부근 토굴에서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장소다.)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더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의 이치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원효"는 불법의 진정한 이치를 깨닫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당나라" 불교 유학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다"스님, 나는 당에 가지 않겠소.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내가 여기에 있은들 깨우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소. 나는 이곳에 머물겠으니, 스님 혼자 다녀오시오.결국 "원효(사진 좌측)"은 ""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사진 우측)" 혼자 ""으로 건너갔다.

원효2

3. 불교 대중화에 나선 "원효"

"원효""경주"로 돌아온 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불교를 전파했다"원효"는 가는 곳마다 극락 세상을 주관하는 "아미타 부처님"과 조수인 "관세음보살"만 열심히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그의 이러한 포교술은 "신라" 곳곳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울려 퍼지게 했는데, 이 경구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내 몸을 의지합니다"라는 뜻이다불교 교리에 정통한 "원효"가 이것만 반복해서 외우면, 어려운 불경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 누구나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하니, 어느 누가 이걸 외우지 않겠는가?

하루종일 일에 매달려도 먹고살기 힘들어 끙끙대던 농부나 어부까지도 일하는 틈틈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불교"는 귀족들만 믿던 고급 종교에서 민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대중 종교로 확산되었는데, "불교""원효" 덕분에 대중화가 되었다또한 "원효""당나라"에서 수입해 온 불교 경전 "금강삼매경"을 능수능란하게 번역해설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해설서가 바로 "원효"의 대표 저서 "금강삼매경론"이다.

"()"은 알기 쉽게 풀어 쓴 "해설서"를 말한다여기에 "대승불교" 개론서 "대승기신론"을 번역해설한 "대승기신론소"를 지어,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십문화쟁론"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이니, 싸우지 말고 협력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화쟁(和爭)사상"을 주장하기도 했다이처럼 "원효"는 많은 승려들이 유행처럼 떠났던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고도 독자적인 철학 세계를 구축하여 불교를 백성과 가깝게 했으며, 여러 불교 철학 서적을 발간하여 현재까지도 불교계를 기름지게 만들어 주고 있다.

4. "해동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

"의상""당나라"로 들어가 "화엄종"을 열심히 공부했다"화엄종"이란 "천태종(중국 불교 13종 중, 가장 대표적인 종파로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고려 왕자출신 승려)이 소개)"과 함께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불교 종파이다"의상"이 유학을 떠난 당시에는 "화엄종" 2대 교조 "지엄 대사""당나라" 종남산에 있는 지상사에 살면서 제자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치고 있었고, "의상"은 먼 길을 걸어 "종남산"까지 찾아가 "지엄 대사" 밑에서 "화엄학" 공부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지엄""의상"을 자신의 애제자로 인정했다한편 그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만든 "화엄일승법계도""화엄종"의 핵심 사상을 정리한 도표로 현재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스승이 입적하자, "의상"은 고향으로 돌아왔다선진 불교 종파인 "화엄종"을 공부한 "의상"이 돌아오자, 왕실부터 귀족까지 많은 사람이 "의상" 밑으로 들어와 "화엄학" 공부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신라 불교" 자체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신라" 땅에서 유행한 "화엄종""삼국 통일 전쟁"을 막 끝낸 신라 지배층에게 통합의 명분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화엄 사상"이 통일 명분까지 돼 줄 수 있었냐고"화엄종" 교리 속에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이 들어 있다"하나인 것이 많은 것이요, 많은 것이 하나인 것이다"로 해석되는 이 사상은 삼국 통일 이후 새롭게 "신라" 사람이 된 "고구려백제" 유민도 신라 백성이라는 통합 명분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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