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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백제 : 무왕 ( ? ~641ㆍ의자왕의 부왕)ㆍ선화공주ㆍ서동요ㆍ미륵사지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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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설화에 의하면, "서동 (薯童ㆍ무왕 (武王)ㆍ ? ~ 641ㆍ재위 600~641(41년)ㆍ백제 31대ㆍ의자왕의 부왕)"은 "신라 진평왕"의 3째 딸인 "선화공주"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신라 수도)" 로 기어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1. 무왕 (武王아명 : 서동(薯童)? ~ 641재위 600~641(41)백제 30대)

배우자 : 사택왕후(沙宅王后정실왕후)선화공주       아 들 : 의자왕 (선화공주나 사택왕후의 아들)

"법왕(29대 왕)"의 서자(아들)라는 설과 "위덕왕(27대 왕)"의 서자라는 설이 존재한다재위 기간 신라에 반발하는 한편, 고구려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기회주의 외교"를 펼쳤다왕권 강화를 위해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630, 백성을 징발하여 "사비궁"을 중수하였으며, "익산""별도"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인 "사택 씨(沙宅 氏? ~ 655무왕의 정비백제의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 2009,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 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미륵사" 창건의 주체인 "사택왕후(좌평 사택적덕의 딸)" "무왕 왕후"라 기록하고 있어, "선화공주"존재를 뿌리부터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자는 설화가 어느 정도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륵사"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선화공주", "선화공주"가 죽은 뒤 "사택왕후"가 절을 완성했다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같은 맥락에서 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무왕이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 선화공주""남부여"를 다스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미륵사지

2. 선화공주 (善花公主? ~ ?):  "신라 진평대왕"3째 딸"무왕"의 왕후 (삼국유사)

부 왕 : 진평대왕 (眞平大王신라 26대 왕567~632재위 579~632(53))          모 후 : 마야부인 (摩耶夫人석가모니(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따옴)          언 니 : 선덕대왕 (善德大王신라 27대 왕 ? ~647재위 632~647(15))          사 촌 : 진덕여왕 (眞德女王신라 28대 왕? ~654재위 647~ 654(7)2번째 여왕) 국반 갈문왕(國飯葛文王진평왕 동생)의 딸성골(聖骨)출신 마지막 왕ㆍ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하였다.

조 카 : 태종무열대왕 (太宗武烈大王신라 29대 왕604~ 661재위 654~661(7)) 김춘추(春秋)진골 출신천명공주(진평왕 2)의 아들  (성골(聖骨)은 왕족 내부의 혼인진골(眞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으로 출생)

2009,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금제사리 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후는 "사택왕후" 기록되었기에 그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다일설에는 "무왕(서동(薯童)백제 30대 왕? ~ 641재위 600~641(41)"이 아니고 "동성왕(백제 24대 왕東城王? ~ 501재위 479~501(22))"라고도 하며,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도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남부여의 옹주귀족지방 호족의 딸" 등 다양한 가설이 있다.

"일연(고려시대 신라계 대 승려)""삼국유사" 설화에 따르면, 미모가 매우 뛰어나 "남부여의 "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 경주)"뜨렸다고 한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을 만나 결혼하고 남부여에 가서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미륵사 창건""무왕"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무왕"이 사망하자, 못난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것은 "의자왕선화공주" 간의 갈등과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를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3. 서동요미륵사 창건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삼국유사(일연)"에서는 가난한 "무왕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온다"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에 수록된 설화에 의하면, "서동""신라 진평왕"3째 딸인 "선화공주"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신라 수도)" 로 기어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를 나누어 주며,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짝을 맞추어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널리 퍼져, "신라 반월성"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노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은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공주는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길을 떠나려고 할 때, "신라 왕후""순금 1"을 여비로 쓰라고 주었다공주가 유배지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절을 하고는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지만, 뜻밖에도 믿음직하여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따라오도록 하였고, 또 몰래 정도 통하였다공주는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동요의 내용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그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그래서 왕이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미륵삼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고, 전각회랑을 각각 세 곳에 만들고는 "미륵사(彌勒寺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돕게 하였다고 한다.

2009.01.14,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해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왕후께서는 좌파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미륵사지 석탑"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선화 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이러한 이유로 "선화공주"와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대부분의 설화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것을 감안할 때,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추측되는 "쌍릉"의 존재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4. 서동(薯童)

① 전문  :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遺去如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정을 통해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②. 핵심 정리

• 성 격 : 향가(4구체)ㆍ민요(참요적 성격이 강한 민요)참요(讒謠): 잠재적 소망을 얹어 부른 것으로, 장차 일이 그렇게 될 것임을 직설적으로 암시한 노래

• 주 제 : 연정(戀情)ㆍ선화공주의 비행 풍자ㆍ아내를 얻기 위한 계략        • 의 의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ㆍ향가 중 유일하게 동요로 정착된 작품

③ 작품에 대한 견해

"무왕"과 연결된 설화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야심 많은 소년이 미모의 공주를 아내로 삼기위해 교묘한 계획에 사용한 동요이다.  사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소년의 지혜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라는 한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고 왕이 되기까지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사랑을 위해 목숨도 희생하는 고대인의 강한 정열을 엿볼 수 있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이라는 것에 의해 성공의 실마리가 풀리며,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를 더해 준다.  "서동 설화"는 크게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출생담ㆍ결연담ㆍ등극담ㆍ사찰 연기담"이 그것이다.

④ 설화 배경

모친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백제"의 서울 남쪽 못가에 살면서,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재주와 도량이 커서 장차 큰일을 할 바탕을 갖추고 있었는데, 항상 마(薯ㆍ서)를 캐어 팔아서 생계를 꾸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 불렀다.  "선화공주(신라 진평왕 3째 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머리를 깎아 중의 형색을 하고 "경주(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근방의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그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자, 자신이 지은 동요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서동요"인 것이다.  동요의 내용이 대궐에까지 알려져 공주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에 오르는 공주의 애처로운 모습에 왕후는 "순금 1말"을 노자로 주었고,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맞이하며 같이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외로운 귀양길에 친구가 되리라 생각하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공주는 "서동"이 믿음직스럽고 좋아 결혼했는데,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구릉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가 신력으로써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을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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