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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고려 : 궁예 (弓裔ㆍ869~918ㆍ49세ㆍ재위 17년)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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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弓裔ㆍ869~ 918ㆍ49세)"는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 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신라 헌안왕(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고,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世達寺)"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1. 궁예 (弓裔869~ 918재위 901~918 (17태봉 1)향년 49)

왕건 (王建ㆍ877~943ㆍ재위 918~943(25년)ㆍ향년 66세) : 궁예의 휘하 부장

신라의 왕가 서족 (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후고구려/마진/태봉의 군주918"왕건"에게 축출ㆍ 신라 말기,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호족이 되었다가, 스스로 ""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이후 국호를 "마진태봉" 등으로 변경하였다 호족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 추대한 부장들에 의해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신 체 :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고,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잘못하여,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었다.

재 주(관심법):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고 하여,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 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국 호 : 후고구려 (後高句麗) 마진 (摩震) 태봉 (泰封)           연 호 : 무태 (武泰)성책 (聖冊) 수덕만세 (水德萬歲)정개 (政開)                 궁 터 : "구 철원" 북쪽 30 , 비무장지대 안지명- 풍천원(豊天原)

도 읍 : 송악(개경개성효공왕 2(898)왕륭(왕건 부친)의 제의)철원(무태 2(905))   효공왕(孝恭王): 신라 52대 왕재위 897~912헌강왕의 서자

재 위 : 901 ~ 918 (태봉 1)          본 명 : 김 궁예         본 관 : 경주(慶州)          법 명 : 선종(善宗)

별 명 : 일목대왕(一目大王)현세의 미륵불 (彌勒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ㆍ장군(將軍)고려왕(후 고구려왕효공왕 5(901))

부 왕 : 헌안왕(47) 또는 경문왕(48)      모 후 : 후궁 장씨(後宮 張氏)       왕 후 : 왕비 강씨(王后 康氏삼국사기)         자 녀 : 아들 2(청광신광)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청광신광"이라 불린 아들은 강씨 소생인 것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철원 궁씨"가 궁예의 아들이라는 "신광"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순천 김씨광산 이씨""궁예"의 후손을 자처했다.

궁예

2. 애꾸가 된 이유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국왕 헌안왕(혹은 신라 제48대 국왕 경문왕)의 빈어(嬪御) 소생, "서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 이름은 "김궁예""삼국사기고려사"에 등장하는 "고경참문"에 의하면, 궁예는 축()년생인데, 그러면 857년생 혹은 869년생인 것으로 알 수 있다궁예가 891년 절을 떠나, 처음 봉기에 참여한 시기로 미루어 짐작할 때, 869년생 그러니까 경문왕의 서자인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음력 05.0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잘못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궁예가 10여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며,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을 안 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고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니 슬프다."라고 했다궁예는 울면서 "그러면 내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와서, "세달사(世達寺)"에 몸을 기탁해 스스로 성명을 "선종(善宗)"이라 했다.

3. 왕건 (궁예의 휘하 부장ㆍ王建ㆍ877~943ㆍ재위 918~943(25년)ㆍ66세)과의 관계

895(신라 진성여왕 9) "왕륭왕건" 부자는 중부 지방의 강자로서 세력을 떨치던 "궁예"를 찾아가 미련없이 "송악"을 바치고, 그 밑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898(신라 효공왕 2, 21세 때) 궁예 진영의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고,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으로 연이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900년까지 "광주국원 당성" 등지를 평정하였다왕건은 병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덕망이 높고 추종자도 많았다. 왕건의 이러한 성품은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고, 싸움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는 궁예와 왕건 사이에 있었던 일화 1가지가 소개되어 있다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마침 처벌된 자들로부터 몰수한 물품들을 점검하고 있던 궁예는 왕건을 보자 성난 표정으로 "경이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었고,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이 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스스로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지나갔고, 왕건은 곧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며,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경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왕건에게 주연까지 베풀어 주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 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고 한다이 기록은 흔히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기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4. 왕건의 반란궁예의 최후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918,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고, 왕건을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그러나 왕건은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임금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홍유"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질투를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를 항변하였다. 왕건은 주저하였으나 이를 밖에서 엿듣던 "신혜왕후 유씨"가 왕건을 독려하여 군사를 일으켰다고 "고려사"는 전하는데, 918 07.24,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추대되어,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하고, 새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정하였다.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최후에 대해서, "미복차림으로 도망치던 중,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민간전승에서는 "그가 오히려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국사기"는 화전민들에게 발각되고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고려사"는 궁예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특히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 "미복"차림으로 도망치던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민간의 전승에서는 궁예가 오히려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하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유명한 것이 "포천 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 전설로,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해서 산새들이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폈다는 "망무봉"의 지명 유래담이 내려오고 있으며, 철원의 "보개산성성동리 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한 고을이라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5. 평 가

"삼국사기ㆍ고려사"는 대부분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된 것이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흥망사관에 입각해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그 쿠데타로 인해 추방된 궁예가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하였으며, 의심을 많이 품었고, 폭정을 일삼았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궁예 자신의 개인적인 결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기존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전제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① 반 신라 정책과 폭정

우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부터, 기존의 학설은 "삼국사기(궁예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나아가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궁예의 행동에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궁예가 처음 거병할 당시의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 초적들은 극심한 천재지변에 신라 왕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장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

② 개인적인 신격화

궁예가 지은 경전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 교훈거리가 될 수 없다"고 혹평하여 궁예에게 살해된 "석총"이라는 승려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해, "진표의 제자인 석충(釋忠)이 "간자 108개"를 태조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석총과 "왕대종족기"의 "석충"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궁예가 지향했던 불교와 "석총"의 불교가 같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궁예는 "아미타불ㆍ관음보살" 중심이었던 데 반해서, "석총"은 "미륵보살ㆍ지장보살" 중심이었던 차이점이 지적되어, 양자간에 알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적어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울컥해서 죽이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6. 승려 시절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에는 궁예 정권의 핵심인물로서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즉위한 지 7일 만에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와 함께 주벌된 "소판 종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젊어서 승려가 되었던 자"라고 적고 있어, 일찍부터 궁예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종간"이 궁예의 승려 시절, 즉 "세달사"에서 궁예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가 어느 날 재(齋)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궁예는 이때부터 장차 자신이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7. 후고구려 선포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浿西)"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송악(松嶽)"의 해상호족이었던 "왕륭ㆍ왕건" 부자가 진성여왕 10년(896)에 궁예에게 투항해 오자, 궁예는 "왕륭"의 아들인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했다. 왕륭의 제의를 받아들인 궁예는 효공왕 2년(898) 철원에서 "송악(개경,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淸州)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겨울 11월에 궁예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청주 지방을 점령(효공왕 3년(899))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을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3월에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견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하지만, 거꾸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다. "비뇌성"에서 "양길"을 패배시킨 뒤인 효공왕 4년(900)에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ㆍ국원경(충주)ㆍ 청주ㆍ당성(唐城)ㆍ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여 "광주"를 우선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ㆍ괴양의 적수 "청길(淸吉)ㆍ신훤(莘萱)"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효공왕 5년(901) 7월에 스스로 "고려왕(후 고구려왕)"을 칭하였다(삼국유사 연표에는 고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당병을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한 궁예의 발언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분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고,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칼로 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다. 효공왕 6년(902)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해 당시 후백제의 해상으로의 대중 교역로를 차단하게 했고, 효공왕 7년(903) 3월, 수군으로 후백제의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錦城)"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나아가 왕건은 "금성"공략과 함께 양주(良州)의 호족이었던 "김인훈(金忍訓)"을 구하여 돌아온 공으로 궁예로부터 "알찬"의 관등을 받았다.

8. 태 봉

효공왕 14년(911),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ㆍ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또한 직접 경전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總)"이라는 승려가 이 불경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서 입에 담기도 어렵다"고 혹평했고,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수덕만세 3년(913), 왕건을 "파진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해, 수도로 불러 들인지 1년만인 정개 원년(914)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했던 것이다.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 만 하겠는가?"며,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개 2년(915),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康)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쇠꼬챙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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