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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고려 :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ㆍ문벌귀족ㆍ권문세족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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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士大夫) 란,  중국 및 고려, 조선시대 상류계층ㆍ문무(文武)의 양반을 평민에 상대하여 일컫던 말ㆍ문벌이 높은 사람을 일컫던 말로,  대체로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때 귀족ㆍ높은 벼슬아치ㆍ문벌이 높은 사람을 지칭하였고, 그 가문을 "사대부 집안"ㆍ그 가족을 "사족"이라 해서 일반인과 구별하였다.

 

1. 고려의 문벌귀족권문세족신진사대부

문벌귀족 (門閥貴族): 대대로 특정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귀족

"고려 성종"이 추진한 "호족세력" 통합정책으로 인해, 대 호족들이 귀족화된 세력으로, 이들은 "음서" 통해(물론 과거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관직을 독점했고, "전시과공음전" 등이 경제적 기반이었다.

신진사대부

 권문세족 (權門勢族):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

"무신정변" 이후, 성장해서 14C 이후에 정착한 세력인데, 대체로 "원 간섭기"에 성장한 세력을 말하는데, "친원파" 세력이다. (이들 중엔 천민 출신도 포함되어 있음이들은 합의기구인 "도평의사사"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경제적 기반은 "농장"이라 할 수 있는데, 불법적인 탈취를 통해서 토지를 겸병하거나, 재력을 이용해서 토지를 개간하면서, 대농장대토지를 지배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높일 수 있었다.

고려후기 사회를 이끌어 간 "권문세족" "무신정권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원 간섭기에 그 골격이 갖추어졌는데, 시기는 대체로 "충렬왕" 중엽 경이다그 뒤, "충선왕"은 교서를 통해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정하였는데, 이들 가문이 곧 "권문세족" 임에 틀림없다. 이들 "재상지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기 이래의 문벌가문 : 경주 김씨정안 임씨경원 이씨안산 김씨철원 최씨해주 최씨공암 허씨청주 이씨파평 윤씨           무신 정권 시대 무신으로 득세한 가문 : 언양 김씨평강 채씨           무신 정변 이후 능문능리의 신관인층으로 성장한 가문 : 당성 홍씨황려 민씨횡천 조씨           대원 관계 속에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한 가문 : 평양 조씨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 "최씨 정권기"부터 대두해서, "무신정권" 붕괴 후에 중앙에 많이 진출하게 되며, "공민왕" 개혁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대체로 "향리하급관리" 출신이 많아, "권문세족"과 달리, 지방의 중소지주로 대체로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으며, 대체로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는 유학자들로서 구질서와 권문세족의 횡포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성장하였다. "성리학""고려 말"에 유입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사대부" 층에 수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불씨잡변"을 써서, 유교는 존중하고, 불교를 비판했다.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학문적 교양을 추었을 뿐 아니라, 정치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였다이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무신정권" 아래에서부터였으나, 정치세력으로의 역할은 무신정권이 무너진 13C 말엽까지는 뚜렷하지 않았다13C ,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으나, 개혁 정치의 실패로 뿌리내리지 못하였으며, "공민왕"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권문세족"과 달리 가문이 한미하였고, "지방 향리" 출신이 많았다. 고려시대 "향리"는 지방에서 중소 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학문적 교양을 쌓아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였던 것이다"신진사대부"는 권력을 등에 업고 불법수단으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한 권문세족을 경멸하였다그들은 대체로 청렴결백한 생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신진사대부"는 이미 중앙 정계에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권문세족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이미 ""의 세력과 결탁하여 강력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소유한 "권문세족" 대하여, 세력 기반이 미약한 "신진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신진사대부"의 개혁운동은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다이 때에는 "신진사대부"의 세력이 자못 성장하였고, 국제적으로는 대륙에서 ""이 흥하면서 "" 쇠약해지고 있었으므로, "공민왕"은 이들 "신진사대부"를 기반으로 개혁정치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개혁정치도 이를 뒷받침하는 "신진사대부" 세력이 "권문세족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새로 등장한 "신진무장세력신진사대부들"이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권문 세족"을 누르고, "조선 왕조"를 개창할 수 있게 되었다.

2. 권문 세족신진사대부의 차이점

3. 사대부 (士大夫) ?

 사대부의 상징 : 회화나무 (Sophora japonica Linne콩과(Leguminosae)에 속하는 나무로 한자로는 괴화 (槐花))

 중국 및 고려, 조선시대 상류계층문무(文武)의 양반을 평민에 상대하여 일컫던 말문벌이 높은 사람을 일컫던 말로, 대체로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때 귀족높은 벼슬아치문벌이 높은 사람을 지칭하였고, 그 가문을 "사대부 집안"그 가족을 "사족"이라 해서 일반인과 구별하였다.

고려 말, 정치에 두각을 나타낸 사대부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전현직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지식계급을 지칭하게 되었다 "사대부"는 유교에 바탕을 둔 예의를 생활의 기본으로 하여, 스스로를 엄히 규제절제하였고, 국가에서도 법률적으로 이들의 몸가짐을 규제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사대부는 그 처가 사망한 후 3년이 경과하지 않으면 재혼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사대부 가족"은 법률로서 보호하고 국가적 관심을 보여, "경국대전"에는 사대부의 딸로서 30 가까워도 빈곤해서 출가시키지 못하면, 나라에서 "혼자(婚資)"를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사대부 집안" 부녀자의 몸가짐은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까다로워,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갔다 돌아온 "속환사녀(贖還士女)"에 대해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사대부집 여인의 도리가 아니라 해서, 많은 이혼사례가 생겨 정치, 사회 문제화하였다. 관계상 (官階上)으로는 종4~1품까지를 대부(大夫)로 규정하고 있으나, 사에 대한 구별은 별도로 없다.

조선후기 "이중환""택리지(擇里志)"에서,  "사대부는 혹은 농상의 업을 할 수 있어도, 상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사대부의 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까닭에 사대부를 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이르러 자연적인 추세로서 분의 차별이 생겨난 동기라 할 수 있겠다.""사대부"를 풀이하고 있다.

4. 사대부 (士大夫) 발생과정

① 고대 중국의 봉건제도에서는 신분층이 "천자(天子)ㆍ제후(諸侯)ㆍ대부(大夫)ㆍ사(士)ㆍ서인(庶人)"등 5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천자ㆍ제후"는 "황제ㆍ왕"을 뜻하고, 이들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ㆍ사"가 지배계층이었으며, 피지배자인 "서민"과 구분되는 계층이었다.

주(周)나라 때, "사"의 상층(上層)에 있는 자를 "사대부"라 했으며, 이들은 신하이면서 동시에 "서민" 위에 서서 그들을 지배하는 계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세습되었다. 진(秦)나라 때, "군현제(郡縣制)"가 성립됨에 따라, 관료 지배제가 확립되었고, "사대부"의 신분은 일대(一代)에 한정되기 시작했다. 통일국가인 "한(漢)나라"에 이르러, "사ㆍ서민"의 구별은 없어졌으나 새로이 "관리ㆍ백성"이라는 구별이 생기고, "관리"의 지위가 세습화하자, "사족(士族)"이라 불리어 "육조(六朝)"를 중심으로 한 귀족정치 시대가 나타났다. "육조(六朝)시대"에는 관리를 뽑는 가문이 고정되어 "서민"에 대해, 상류 특권층인 "문벌 귀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송(宋)나라" 때부터는 "세습귀족"이 몰락하고, 대신 "과거(科擧)"가 실효를 거둬 관리 중에서도 특히 과거출신의 문신 관료들을 구별하는데 사용했고, 사회적으로 농업ㆍ공업ㆍ상업이외의 독서인(讀書人)ㆍ지식 계층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대부 사회에서는 학문과 더불어, 고아(高雅)한 취미가 숭상되어, 그들이 여기(餘技)로서 그림은 "사대부화(士大夫畵ㆍ文人畵)"라 지칭하여, 직업화가의 그림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송나라" 이후,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으며, 강남 지역의 농업을 근거로 새로운 지주층으로 성장했다. 또한 고대 유교에 불교ㆍ도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확립시켜, "사대부" 자신의 지배이념으로 삼았고, 나아가 사회윤리ㆍ가족윤리로 주창했다. 이에 입각해 "사대부"층은 모든 법제ㆍ의식을 사대부 중심으로 바꾸어갔다. 과거응시 자격ㆍ관리선발 제도에서 "사대부"층을 비롯한 지식층의 문호를 개방ㆍ확대하며, "왕조례(王朝禮)"를 "사대부의 가례(家禮)"로 통합시키려 했다.

② 이러한 "사대부" 층의 "성리학"은 "원(元)"의 통치시기에 들어왔다.

당시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인 이념 위에, 국가의 제도ㆍ의례를 바꾸고 자신들의 계층적 의견을 수렴하는 여론정치를 수행했다. 이들은 이미 "무인정권시기"에도 "과거제" 등을 통하여 진출했으며, "원 간섭시기"에는 관료정치를 재정비함에 따라, 폭넓게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과 행정적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능문능리(能文能吏ㆍ글 짓는 솜씨가 뛰어나고 맡은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이 우수한 관리)"집단이었다.

"원 간섭시기"에 성리학을 수용한 "안향ㆍ이제현ㆍ백이정ㆍ민지ㆍ권부ㆍ우탁ㆍ이곡ㆍ이색" 등은 비록 자신들의 출신 기반이 "권문세족"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경세적 유교의 진작을 통해서 중소지주나 하층민의 이해를 어느 정도 조정함으로써 현실체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개선하려고 했다. "원 간섭시기"에는 "신 유학"이 수용되는 추세와 관련하여 몇 차례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13C 말, "충선왕ㆍ충목왕"이 비슷한 성격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2차례 개혁의 배경에는 "신 유학"의 소양을 지닌 학자층의 노력이 있었다.

③ 이들은 "권문세족"에 비해, 한층 낮은 가문의 출신자로서 과거를 통해 입사한 부류였다.

"사대부"층이 급성장하여 유학교육을 장려함으로써, "신 유학"에 대한 이해가 학문적으로 심화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색ㆍ정몽주ㆍ김구용ㆍ박상충ㆍ박의중ㆍ이숭인ㆍ이존오ㆍ정도전"등이 "성균관"을 통해서 성장한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향리 가문 출신자"로, 자신의 능력으로 과거에 급제한 엘리트 관원이었으며, 삼남지방에 중소 지주적 경제기반을 가진 전형적 신흥세력이었다.

그리고 "공민왕" 대 이후로 외침이 극심해지고, 무장 세력이 급속히 성장함으로써, "사대부"는 그들과 합작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잦은 전란 속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워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성계"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급성장한 전형적인 신흥무장이었다. 문인사대부들은 무장세력과 제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④ "공민왕" 대 이후, "한량ㆍ산관ㆍ품관"이라 불리는 광범위한 "사대부" 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직함은 있으나, "직사"가 없는 관원인 "한량 품관"으로, 또는 검교직ㆍ동정직ㆍ첨설직을 통해 관권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향촌에 거주하는 독서계급으로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진사대부"의 일부는 하층민을 압박하는 "향원(鄕愿)"으로, 그리고 중소지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신진사대부" 의지가 반영된 "공민왕" 대의 개혁운동은 2차에 걸쳐 벌어졌지만, 실패했다.

"사대부"의 개혁운동은 "우왕" 대를 고비로 하여, 크게 2개 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려는 파와 "역성혁명"까지 내다보면서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려는 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특히 "사전(私田)"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둘러싸고 진행되어, "급진파"의 뜻대로 다시 "양전(量田)"을 하고, 전반적인 "전제"를 정비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과전법"으로 일단락된 "전제 개혁"이 이뤄진 것이다.

⑤ 고려 말기, "혁명파ㆍ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층은 조선이 개국한 뒤, "양반ㆍ관료체제"를 구성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훈구파ㆍ사림파"로 갈라지기도 했다.

특히 "사림파"는 조선이 그동안 취한 "부국강병책ㆍ관(官)주도적 경제정책ㆍ중소지주층에 대한 통제ㆍ 양인에 대한 지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성리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중소지주층"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는 정치ㆍ경제ㆍ사회구조의 확립을 추구했다. "주례" 보다는 "소학ㆍ가례ㆍ춘추"등을 중요시하고, "향약ㆍ사창ㆍ유향소ㆍ서원" 등 향촌사대부의 자율적 책임 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촌락조직의 시행을 주요 정강으로 내세웠다. 또한, 그러한 조직체의 자치적 운영을 통해, 지주ㆍ전호 관계를 안정시키고, 그 토대 위에서 "사대부ㆍ민"의 지배관계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즉 "사대부 주도"의 사회건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앙정계 뿐 아니라, 지방사회까지 장악하여,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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