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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고려 : 왕건 (王建ㆍ877~943ㆍ66세ㆍ재위 25년)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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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王建ㆍ877~943ㆍ66세)"은 궁예의 휘하 부장출신으로,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자,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붕어하였다.

 

1. 왕건 (王建ㆍ877~943ㆍ재위 918~943(25년)ㆍ향년 66세) : 궁예의 휘하 부장

궁예 (弓裔ㆍ869~ 918ㆍ재위 901~918 (17년ㆍ태봉 1대)ㆍ향년 49세)

고려 태조ㆍ후삼국 시대 후고구려 장군(집안 가계상 고구려의 먼 후손)ㆍ유훈 : 훈요 10조(訓要十條)ㆍ후임 : 혜종 (943~945)→ 정종(945~949)→ 광종(949~975)

• 출 생 : 신라 한산주 송악     • 사 망 : 고려 개경 신덕전         • 능 호 : 현릉(顯陵ㆍ개성 해선리)ㆍ정비 신혜왕후와 합장

• 배우자 : 29명 (신혜왕후 유씨ㆍ신명순성왕후 유씨ㆍ신성왕후 김씨ㆍ장화왕후 오씨ㆍ신정왕후 황보씨ㆍ정덕왕후 유씨)

• 자 녀 : 25남 8녀        • 참 전 : 나주 전투ㆍ공산 동수 전투ㆍ고창 전투

왕건

재위 기간 중의 정치적 역량은 매우 뛰어났지만, 집권 기간 동안 호족 세력 통제에 완전하지 못했고, 후계 구도를 제대로 잡지 못해 그의 사후 고려 초기의 정치 혼란상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혜종(2대)"의 권력 기반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해, 사후 "정종의 쿠데타ㆍ광종의 대량 숙청"이 일어나 고려 초기 사회가 혼란해진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생전에 여러 호족 통제 정책들을 시행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고, 또 주요 왕자들을 전쟁터로 늘 데려가 왕자들의 군사적 세력을 키워줘 결국 "견신검"을 비롯한 왕자들의 난으로 권력을 잃은 "견훤"과 달리, "왕건"은 장남인 "왕무"만을 전쟁터에 늘 데리고 가 공을 세우게 해 주고, 이에 반해 다른 왕자들은 외면해서 다른 왕자들이 군사적으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았다.

"태자 무"를 일찍부터 "정윤"으로 정하였으나 "태자 무"의 외가는 세력이 미약한 점을 염려하였다. "박술희"를 불러 "고명대신"으로 정하고, "태자 무"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사후 후계 문제를 우려해 "박술희ㆍ왕규ㆍ염상ㆍ박수문" 등을 "혜종"의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혜종"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믿고 그에게 보위를 넘겨주었고, 또 "혜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혜종ㆍ정종"의 아내들을 서로 자매들로 혼인시켜 둘의 싸움을 만류하는 정치적 배려까지 썼지만 더 치밀하지 못해, 그의 사후 "고려"는 한동안 반란ㆍ숙청으로 혼란해졌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과 부인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96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그 후 충청도 지역들(충주ㆍ청주)을 점령해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이후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ㆍ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했는데, 903년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했으며,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들과 "나주"를 재점령하였다.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후백제"와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뛰어난 전과들을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40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 삼은 "신숭겸ㆍ홍유ㆍ복지겸ㆍ배현경" 등의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이후 "후백제 견훤"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유린, 약탈하자 출병했으나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했고, 한동안 수세에 몰렸다. 3년 후 "고창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를 대파하고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이후 935년 "견훤"이 아들 "견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왔고, 이후 다시 "신라 경순왕"의 자발적인 투항이 이어졌으며, "왕건"은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ㆍ공주 왕씨"를 혼인시키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 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1년 후인 936년 9월, 9만에 가까운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926년부터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 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 융화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2. 훈요 10조 (訓要十條)

943년(태조 26), 임종을 눈앞에 두고 고명대신인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게 하였고, 후대 왕들은 이를 귀감으로 삼았다.

①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②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황자에게 황위를 계승하게 할 것           중국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는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는 본받지 말 것           서경에 100일 이상은 머물러 황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들의 신망을 잃지 말 것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백관의 녹봉을 함부로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3. 부인은 29명 (25남 8녀)

"고려"를 건국하기 전에는 "무장의 딸"과, 통일 후에는 "신라의 왕족"과 혼인하며 전략적인 모습을 보인다. 29번의 혼인은 개인사가 아닌, 대의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으로, 호족들과의 연합을 통해, 군사적ㆍ경제적ㆍ정치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는 29명의 부인 사이에서 낳아진 왕자들의 외할아버지격인 호족들끼리 서로 자신들의 외손자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권력 다툼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① 신혜왕후 유씨 : 본부인ㆍ삼중대광 유천궁의 딸ㆍ경기도 정주(풍덕)

"유천궁"은 경기도 북부지역의 큰 부자였다. 태조가 그녀를 만난 시기는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군대를 거느리고, 각 지역을 정벌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때 유씨의 나이는 당시 결혼 적령기인 18살쯤 되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그녀를 늙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만났다고 되어 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 땅"을 지나가다가 말을 쉬게 하느라고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시냇가에 서 있는 유씨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의 덕스러운 얼굴에 반해 그날 "유청궁"의 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유천궁"은 자신의 딸을 왕건과 동침토록 했고, 왕건은 그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떠났다.  유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죽은 뒤 "현릉(왕건의 묘)"에 합장되었다.

② 장화왕후 오씨 : 2비ㆍ부친- 오다련군ㆍ조부- 오부돈ㆍ나주 목포

"고려사"는 그녀를 미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다.  왕건이 그녀를 만난 때는 910년을 전후한 무렵이다. "혜종"이 912년생이라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왕건과 오씨의 만남을 "고려사"는 다소 신비화시키고 있다.  왕건이 "나주"에 진주하여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17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그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다.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왕건이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오기 며칠 전에 이미 금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혜종 왕무"가 7세가 되었을 때,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자, 왕건은 "자황포(柘黃袍)"라는 비단을 오래된 상자에 담아 장화왕후 오씨에게 준다. 후에 태자를 책봉할 때 징표로 왕건이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뜻을 알고 황태자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고려사"는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동침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그녀를 불러서 동침을 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한 탓으로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가 그것을 즉시 흡수하였으므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 바 그가 곧 혜종이다."  "고려사"는 또 이 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씨는 "혜종" 이외에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③ 신명순성왕후 유씨 : 3비ㆍ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인 내사령 유긍달의 딸ㆍ충주

어떤 왕후보다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 그녀 소생 중에 2명이 왕이 되었다.  아들 5명(태자 태ㆍ정종ㆍ광종ㆍ문원대왕 정ㆍ중통국사)과 공주 2명(낙랑ㆍ흥방)을 낳았다.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제56대 경순왕)"와 혼인하여 왕건이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④ 신정왕후 황보씨 : 4비ㆍ삼중대광 황보제공의 딸ㆍ황주

태조가 죽은 후 40년을 더 살았으며, 사망 당시의 나이는 80살가량이었다.  그녀는 덕이 많고, 성격이 후덕했으며, 검소하고 슬기로워 백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⑤ 신성왕후 김씨 : 5비ㆍ신라 왕족ㆍ김억력(강순왕의 큰아버지)의 딸

제5비가 된 것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935년 직후이므로, 936년 초가 될 것이다.  935.11월 "경순왕(신라 56대)"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은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고려 사신은 "경순왕"에게 왕건이 신라 종실과의 혼인을 원한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에 "경순왕"은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낸다.  "김씨"의 소생으로는 "안종(선왕의 왕후와 간통한 죄로 경남 사천에 유배 후 사망)""이 있는데, "경종(5대)"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와 사통하여 "현종(8대)"을 낳았다.

5. 신라와는 호의ㆍ후백제와는 갈등

신라는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왕건"이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과 신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했다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 신라의 장군 출신인 까닭으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을 더 믿을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내비쳤다왕건이 동경을 방문할 때면 "경애왕경순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회유하였다"경애왕""견훤"에게 살해된 뒤에는 "고려"에게 의존했고 "왕건" 역시 신라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왕건"은 고국인 신라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신라를 계승했다는 이미지를 내세움과 동시에 "견훤"신라의 장군 출신인데, 자기 조국에 반역을 저지른 인물임을 강조, 자신이 정통성을 갖춘 지도자임을 대내외에 공언하였다또한 "발해의 계승자"로도 천명하여, "고려""고구려발해"를 계승한 국가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927.09"고려-후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왕건을 지지했다. "경애왕""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왕건의 즉위 초, "후백제"는 즉위를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견훤""신라의 대야성"을 침략하자 "왕건"이 신라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후백제와의 우호는 깨지게 된다여기에 "후백제"에서도 왕건이 후고구려의 장군 시절, 빼앗은 "나주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후백제"와의 관계는 악화, 전쟁을 하게 된다.

6. 승려 도선대사의 출생 전설ㆍ가계

가계는 증조부 이전은 다소 불확실한데, 언제부터 그가 "왕씨 성"을 사용했는가는 불확실하다877.01.31, "송악(松岳송도(松都)개성)"의 남쪽 자택에서 신흥호족 "왕륭(王隆)"과 부인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악"의 유력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은 후일 "궁예"가 거병하자 그 휘하에 의탁하였고, "후고구려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역임하기도 했다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고려사"에서는 "왕건"이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고 적었다"왕륭""도선대사(道詵827~898신라 승려풍수설의 대가)"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이라 지었다. "왕건"17살이 되자, "도선대사"가 다시 "송악"으로 그를 찾아와, "군사학문학제례법" 등을 가르쳤다.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그의 외 대조인 "강충"에게 한 승려가 지나가다가, "부소산 남쪽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 곧 군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강충"은 승려의 예언에 따라, "송악 부소산" 근처에 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고려사 태조 총서""도선대사의 왕건의 탄생"에 관한 예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 배우고 돌아왔다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쫒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북쪽 지역)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 34월이었다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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