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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고구려 : 온달 ( ? ~ 590)ㆍ평강공주 ( ? ~ ?ㆍ 평원왕의 딸)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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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설화"는: 평민의 신분으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 실존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1. 온달 (溫達? ~ 590고구려 장군바보 온달)

부 인 : 평강공주          장 인 : 평원왕(平原王? ~59025대 왕재위: 559~590)           처 남 : 영양왕 (嬰陽王? ~61826대 왕재위: 590~618)

살림이 구차하여 구걸로 모친을 봉양했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다녀서 "바보 온달"로 불렸다뒤에 "평원왕"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찾아온 "평강공주(平岡公主)"와 혼인하고서,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해마다 음력 03.03(삼짇날)에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다"북주(北周557~581)의 무제(武帝재위 560~578))""고구려"를 침입하자, "온달"이 앞장서서 나아가 크게 이겼으므로, "1 전공자"가 되고 "대형(大兄) 작위"를 받았다"영양왕" 즉위년(590),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자 출전하였으나, "아단성(阿旦城아차산성(阿且山城)울 광진구 광장동)"에서 적병이 쏜 화살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온달

 평원왕 : 고구려 25대 왕平原王 ? ~ 590재위 559~590(31)

 영양왕 : 고구려 26대 왕嬰陽王 ?~ 618재위 590~618(28)평양왕(平陽王)대흥왕(大興王) :  "수 문제(30만 대군)수 양제(113만 대군)"으로 침공해오자, "을지문덕"을 보내어 살수(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에서 물리쳤다 "수 문제" 5만 명의 정예병을 이끈 "병마원수 강이식"의 전략에 말려들어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였다.

 을지문덕 : 영양왕 때, 장군乙支文德? ~ ?수나라 2차 침입"을 물리친 장수 :  612"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요동성"에서 지지부진하자, "별동대 30 5천 명을 뽑아, "평양성(고구려 수도)" 침공하였다. "별동대""평양" 근처까지 진격하기는 했지만 모두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이었고, 극도의 피곤과 군량 부족으로 인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별동대""살수(薩水, 청천강)"에서 강을 건널 때 습격하여, 궤멸시켰다.

2. 평강공주 (平岡公主 ? ~ ?온달 처고구려 평원왕의 딸)

"남편 온달"과의 설화가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다. "평강" "평원왕"의 이칭인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 이름은 알 수 없다. 어려서 자주 울어, 그때마다 "평원왕""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렸다.

16세 때, "평원왕""상부(上部)의 고씨 가문"에 출가시키려 하자, 이를 거역하고 홀로 궁궐을 뛰쳐나와 "온달"을 찾아갔다. 장님이었던 "온달 노모""평강공주"의 향기를 맡고 부드러운 손을 만져보고는 "매우 귀하신 분 같다", "우리 모자는 찢어지게 가난하니, 계실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마침 배고픔에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던 "온달" 역시 어린 여자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라며, 강하게 거부하였다. "평강공주"는 사립문 아래에서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모자를 다시 설득한 끝에 마침내 "온달"과 혼인하였다.

"평강공주"는 가져온 값비싼 "팔찌"를 팔아 살림을 장만하고, 말을 정성스레 길렀다"온달"은 그 말을 타고, "북주"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이름이 높아졌다590"온달""아단성(阿旦城)"에서 "신라"와 싸우다 전사하고 관에 들어갔는데 옮기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이미 생사가 정해졌으니 돌아가자"고 해서야 옮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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