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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신라 : 보물들 ② 첨성대ㆍ포석정ㆍ성덕대왕 신종 (에밀레 종)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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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 신종 (에밀레 종ㆍ봉덕사종ㆍ국보 29호)"은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완전하게 "한국 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상원사 동종(725, 강원도 오대산)"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동종"을 대표하며, 8세기경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준다.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1. 첨성대 (27국보 31인왕동)

높이 9.11m밑지름이 4.93m윗지름이 2.85m이며, 27대 선덕여왕 재위 중(632~647) 축조되었다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基壇部)원주부(圓柱部)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로 나누어진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 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잘 다듬어져 있지 않다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기단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은 한 변이 518, 높이 39.5인 직육면체 석재 12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기단의 방향은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돌아가 있다하단은 이보다 약간 큰 한 변이 536, 높이가 39.5인 직육면체 석재 20개로 이루어져 있다"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에 이르며 술병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단의 둘레는 1,600, 14번째 단의 둘레는 1,170, 제일 윗 단의 둘레는 920이다.  아래부터 제12단까지는 각 단의 높이가 약 30이다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이다출입구의 방향은 정남쪽에서 동쪽으로 16°돌아가 있다출입구 아랫변의 돌은 커다란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13단 이상은 내부가 비어 있다그리고 평판석에는 사다리를 걸쳤다고 생각되는 홈이 출입구 양 끝에 파져 있다.

13~27단까지 비어 있으므로 관측자가 사다리를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다정자형의 두부는 상하 2단의 정자형 구조로 각 단은 306x32x32 크기의 석재를 4개씩 정자형으로 물려놓았다정자석의 내부에 220x64의 공간이 확보되므로 하부에 나무판을 깔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 끝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처음이며,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보다 자세한 기록은 "세종실록- 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 위의 둘레가 21.6,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서운관지(書雲觀志)" "문헌비고(文獻備考)" 서도 찾아 볼 수 있다그러나 오늘날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제강점기, 와다(조선기상관측소 근무한 일본인): 1910 "조선관측소 학술보고"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고, 이어 1917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홍이섭(학자):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홍사준 : 첨성대를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며, 또한 첨성대가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 잡았다.   전상운 :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에 따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용범 :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       박성래 : 겉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며, 토속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했다.

2. 분황사 (국보 30높이 930cm모전석탑구황동)

"삼국사기"에는 634(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이 있다일찍이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疎)"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하였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경덕왕 14) "강고내미"가 구리 30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원효대사(617~686)" "해동종"을 창시하였는데, 이것을 또 분황종이라고 할 만큼 이 절은 원효대사와 깊은 인연이 맺어진 곳으로, "원효대사"가 입적하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공경하며 예배를 올렸다그가 예배할 때 마다, 소상(塑像)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보았다고 한다또한 좌전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1101(숙종 6) "숙종"의 조서에 의해, "한문준(韓文俊)" "화쟁국사비"를 건립했다그 뒤 "몽골 침입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분황사 화쟁국사비부(경북 유형문화재 97)분황사석정(경북 문화재자료 9)분황사약사여래입상분황사 석조 불상군석등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芬皇寺模塼石塔)

"분황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뿐이다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을 만들고 문비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문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운 "인왕상"이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매우 동적이며 근육의 표현에도 양감이 강조되어 사실적인 조각표현을 볼 수 있다이러한 표현기법은 "중국의 톈룽산(天龍山) 석굴"에 있는 "수대(隋代)의 인왕상"들과 비교된다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석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각솜씨가 부드럽고 사실적이다"옥개부"는 전탑 특유의 구조인 상하에 층단이 있다1915년 수리 때, 2층과 3층 사이의 석함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은제사리함구슬류 금동제장신구류" 등이 수습되었다.

3. 문무대왕릉 (둘레 200m사적 158양북면 봉길리)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681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 이라고 불렀다.

바위는 둘레가 200m 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바다 수면은 안쪽 가운데에 "큰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거북이 등 모양의 "큰 돌(길이 3.7mx 너비 2.6mx 높이 1.45m)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편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부처 사리"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4. 감은사지 3층석탑 (국보 112높이 13.4m양북면 용당리)

"감은사(感恩寺)"에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에 속한다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고선사(高仙寺) 3층 석탑나원리의 5층 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1966,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  " 3층 석탑"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寶輦形) 리함" 발견되었는데,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1996, " 3층 석탑"이 해체수리되면서, " 3층 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사리 10여과가 나왔다"동탑 사리함"은 지붕인 "천개(天蓋)"의 양식이 서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6세기에 조영된 중국 당대(唐代)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벽화 및 구조 등과 비교하여 알 수 있었으며, 1966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 "진신사리(眞身舍利)"임에 비해, "동탑"에서 나온 사리는 "문무왕"의 사리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탑신부" 1층은 "우주"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 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감은사 (感恩寺)

682(신문왕 2),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이듬해(682) 창건하였으며, 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 "대왕암(大王巖)"이 있다"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문무왕"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고, 그 때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을 파서, "화룡(化龍)"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682, "신문왕"은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金庾信)"으로 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그 뒤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5. 이견대 (사적 159감포읍 대본리)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들인 "해중왕릉 대왕암(大王巖)"이 보이는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 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바다의 ""이 되었고, 아들 "신문왕" 681.07.0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뒤에 ""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고 한다.

682.05, ""이 이곳에서 ""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한편, 이와 관련된 "이견대가(利見臺歌)"라는 가요가 있었다고 하는데, 작자는 어느 왕이라 하나 잘 알 수 없고 가사는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어느 왕의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대()를 지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이견대라 하고, 그 부자의 즐거움이 비할 데 없어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6. 포석정 (사적 1B 31x H 22x L 22m배동)

927 "경애왕"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기도 하다창건연대는 미상이고, 석구의 폭이 평균 약 31, 깊이가 약 22, 총 길이는 22m 정도이다이것은 신라 궁원예술의 특이한 상징이며,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즉 자연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한 궁궐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왕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離宮)"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지금 이궁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이 석구가 유상곡수(流觴曲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를 짓는 놀이)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이곳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으로 "삼국유사" "헌강왕"과 연관된 이야기 속에서 보인다"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향연을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며, 왕은 신이 돌아간 후 신하들 앞에서 그 춤을 흉내 내어 보였다고 한다그리하여 그 춤을 "어무상심무(御舞詳諶舞)"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계곡의 물을 끌어 들여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조성한 것으로 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모양의 돌이 있었다고 하나, 1871~1873년 사이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간 후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거북이 토해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을 받는 둥근 모양의 석조와 여기서 시작해 굽이굽이 돌아 타원형을 그리며 되돌아가는 수로만이 있을 뿐이다.

"혜공왕" 이후,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시대가 내려 갈수록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경애왕" 4(927) 11, 왕은 비빈종친 등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그때 "견훤"의 군사가 쳐들어왔고, 왕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그리고 "경순왕"을 왕으로 세우고, 신라의 재주 많은 사람을 데리고 돌아갔다고 한다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였고, 천년영화의 막을 내렸다.

7. 대릉원 (미추왕릉지구고분군천마총황남동)

고분군의 중심연대는 5세기이며, 경주분지의 중심부이며, "신라 왕궁"이었던 "월성(月城)"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1963.01.21 "사적 제40"로 지정되었다가, 2011.07.28.일 해제되었고,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한 인접지역 고분군을 통합하여,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재지정 되었다

조사결과, 이 지역에는 직경 약 80m, 높이 약 20m에 이르는 초대형의 "왕릉급 고분"과 이들 대형 고분 사이에 소형급 고분 수백 기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이로써 이 일대가 인근의 노동동노서동황오동인왕동 고분군들과 연결된 삼국시대 신라왕경의 묘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외형상 대형급 고분들은 원분과 원분 2기를 맞붙인 "쌍분"이고, 소형급 고분들은 원분이 있으나,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는 것들도 많다내부 구조는 대부분 신라의 특유한 묘제인 "돌무지덧널 무덤"이고, "앞트기식 돌널무덤(151호분)독무덤 돌널무덤"도 있었고, "원분" "천마총" "쌍분" "황남대총" "돌무지덧널무덤"의 대표적인 고분이다.

이외에 "미추왕릉지구 C-1호분"은 무덤 둘레돌 곁에 "둥근 말무덤"을 두고 있으며, 109호분과 같이 한 봉토 내에 3개의 널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고분들도 있다"껴묻거리"로는 "천마총"에서 "금관 천마도가 그려진 다래"이외에 1 5,0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과 "夫人帶"라는 명문이 있는 허리띠장식"을 포함하여 3 5,648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밖의 여러 고분에서도 금옥으로 만든 장신구류, 생활풍습을 보여주는 토우 및 이형토기, 다양한 토기류 마구류무구류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문화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1906, 일본인들에 의해 지표 조사된 이후, 1916 "검총(劍塚)", 1934년에 109호분 발굴이 있었고, 1965년에 151호분 발굴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전면조사는 1973년 고분공원 조성 시, 155호분(천마총)98호 쌍분(황남대총)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미추왕릉지구 계림로지구110호분이 경주박물관경북대부산대영남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8. 경주 국립박물관 (인왕동)

2만여 평의 대지에 10여 만 점의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다"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28)금관총 금관(국보 87)불국사 3층석탑 내 발견유물(국보 126) 토우장식장경호(국보 195)"  "국보 13, 보물 26"의 지정문화재가 있다"전시실"에는 선사시대~ 통일신라시대까지의 3,000여 점의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고고관 : 선사원삼국실신라실/국은기념실(菊隱記念室)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원삼국실 : 경주경북 각 지방에서 수집한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였는데, 울진 후포리영천 어은동경주 조양동경주 황성동 유물들은 매우 중요한 전시품이다.              신라실/ : 금관총(金冠塚)천마총(天馬塚)서봉총(瑞鳳塚)황남대총(皇南大塚)계림로 미추왕릉지구(味鄒王陵地區) 등의 고분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제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일괄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고 신라시대"의 토기 중 "토우(土偶,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 이형토기(異形土器)상형토기(象形土器)", 통일신라시대의 "골호(骨壺 : 뼈 단지)" 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물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국은전시실 : 1986 "이양선(李養璿)"이 수집하여 기증한 선사시대삼국시대의 유물 7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 1- 불교미술실, 2- 금석문실황룡사실 등 2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미술실 : 융성했던 신라불교의 미술을 전시하는데, "분황사(芬皇寺)불국사황룡사지(皇龍寺址)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남산(南山)" 등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탁월한 불교 공예품들,  "사리구(舍利具)불상와전류(瓦塼類)금석문(金石文)" 등의 유물이 전시                 금석문실황룡사실 : "임신서기석문무왕릉 비"  "신라 금석문" 자료를 모아 놓은 "금석문실" "황룡사" 출토품으로 꾸민 "황룡사실"이 있다.

 안압지관 : "안압지"에서 출토된 3만 여 점의 유물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명품 700여점이 전시되어 통일신라시대의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옥외전시장 : 국립경주박물관의 상징적인 전시품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보 29)고선사지 3층 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보 38)을 비롯한 경주지역 절터, 궁궐터 등에서 옮겨온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 종봉덕사종국보 29)

무게 18.9높이 3.33m입지름 2.27m두께 11~25통일신라시대의 동종 (771년 제작)

원래 "경주 봉덕사"에 있던 것을 "영묘사"로 옮겼다가, 1915.08 "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완전하게 "한국 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상원사 동종(725, 강원도 오대산)"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동종"을 대표하며, 8세기경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준다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의 몸체에 새겨진 긴 명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 12만 근"으로 주조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혜공왕"이 뜻을 받들어 771(혜공왕 7)에 완성했다고 한다""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특히 ""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상원사 동종 (725강원도 오대산) : 높이는 1.7m, 현존하는 한국의 최고 오래된 종이다.   (성덕대왕 신종보다 46년 빠르다)

 "에밀레 종"의 전설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 종"'이라는 별명이 붙은 시기는 "일제 강점기"이다"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 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계획적이고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는 1925.08.05.일자 "매일신보(조선총독부 기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작문예란"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 동화가 올라있다얼마 후, "함세득(친일 극작가)"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성덕대왕 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었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 "에밀레 종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어밀네 종" "성덕대왕 신종"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한편, "에밀레종 전설"을 연구한 "황인덕"에 의하면 "중국 감숙성 무위시 대운사(大云寺)"에 있는 종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 "당 또는 오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종이 울릴 때 "낭아(娘呀)()"또는 "응당(應當)응당(應當)"하는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라는 말이 어머니를 가리킨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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