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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사건- 1170~1270 : 고려 무신정권(100년)ㆍ최씨 무신정권 (60년)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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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은 "최충헌"이 "이의민"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안정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후,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실행하지 않았고, "농민항쟁"을 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충헌"은 이전 무신 집권자들처럼 많은 토지ㆍ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길러 권력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이후 "최씨 가문"은 4대 60여 년에 걸쳐 집권자의 자리를 계승하였고, 왕은 형식적인 존재가 되었다. "최충헌"은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교정도감"을 만들었으며, 사병으로 조직된 "도방"을 설치하여 자신을 경호하게 하였다. 이후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1. 무신 정권의 집정 (1170~1270 : 100)최씨 무신정권 (1196~1258 : 60)

① 1170~ 1174 ( 4): 이의방 (李義方ㆍ1121~ 1175ㆍ54세): 정중부에 의해 제거 : 무신정변의 주역 (이의방ㆍ정중부ㆍ이고)

② 1174~ 1179 ( 5): 정중부 (鄭仲夫ㆍ1106~ 1179ㆍ73세): 경대승에 의해 제거

③ 1179~ 1183 ( 4): 경대승 (慶大升ㆍ1154~ 1183ㆍ29세): 술을 먹고 나서 취침 중, 의문의 요절 → "명종"이 "정중부"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허승ㆍ김희조"와 거사

④ 1183~ 1196 (13): 이의민 (李義旼ㆍ ? ~ 1196ㆍ ): 최충헌에 의해 제거 :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

⑤ 1196~ 1219 (23): 최충헌 (崔忠獻ㆍ1149~ 1219ㆍ70세) → 사후 4대에 걸쳐, "최씨 무신정권"의 세습 권력(60년)을 닦음.

⑥ 1219~ 1249 (30): 최 우 (崔 瑀 ㆍ1166~ 1249ㆍ83세): 최충헌 아들

⑦ 1249~ 1257 ( 8): 최 항 (崔 沆 ㆍ1209~ 1257ㆍ52세): 최우 서자ㆍ최충헌 손자ㆍ법명- 법우(法祐)

⑧ 1257~ 1258 ( 1): 최 의 (崔 竩 ㆍ1233~ 1258ㆍ25세): 최항 서자ㆍ김준에 의해 제거 → 최씨 정권의 최후의 지도자ㆍ세습 권력(60년) 마감

⑨ 1258~ 1268 (10): 김 준 (金 俊 ㆍ ? ~ 1168ㆍ ): 양아들 임연에 의해 제거 : 아버지 김윤성이 최충헌의 가노

⑩ 1268~ 1270 ( 2): 임 연 (林 衍 ㆍ1215~ 1270ㆍ55세): 등창으로 사망

⑪ 1270~ (3개월): 임유무 (林惟茂ㆍ1248~ 1270ㆍ22세): 원종의 지시로 근위대 삼별초에게 사형

2.  고려ㆍ몽골 전쟁 (1231~1257 : 26년간)

고려-몽골 전쟁ㆍ대몽 항쟁ㆍ삼별초의 항쟁ㆍ몽난(蒙亂)ㆍ원의 침략ㆍ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몽골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1270년, 고려 "원종"은 "원나라"에서 제시하는 요구 조건에 따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출륙환도"를 했고, 나중에는 "원종" 이후, 고려 임금들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고려 왕 시호 앞에 "충(忠)"를 쓰게 되었다. 고려 황실의 정통성을 없애기 위해, "원나라 황족의 딸"들을 고려 임금과 혼인시켜 "부마국(夫麻國)"으로 전락시키고, 왕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등 여러 가지의 수모와 굴욕을 당하게 된다. 

3. 김부식 (金富軾1075~ 115176): 신라계 문신대학자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ㆍ김효충"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고, 지위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ㆍ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송나라" 사신 "노윤적"이 왔을 때,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이 그의 "고려도경"에 "그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이자겸"이 국정을 농단할 때에는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도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1127년(인종5)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그는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1129년(인종7)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종"도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ㆍ백수한"이 성인이니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조정 신료 가운데 오직 "김부식ㆍ임원애ㆍ이지저"만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서경의 서기(瑞氣)"를 조작한 일이 탄로 나고, 행차 때의 악천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부식 일파"는 1134년(인종12)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1135년(인종13), "묘청ㆍ조광ㆍ유담" 등은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일단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ㆍ김안ㆍ백수한"을 처형하고, "서경"으로 출전하였다. 서인들은 "묘청ㆍ유담"등을 죽이고 항복하였으나, "조광"이 또 반하므로 "서경"을 포위하고, 1136년에 잔당을 소탕하였다. 그는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인 "윤언이(尹彦頥)"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1140년(인종18),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그는 1142년(인종20)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 후인 1145년(인종23)에 "삼국사기(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4. 김돈중 (金敦中1119~117051): 김부식의 아들내시문신(문과 장원)

1144년, 섣달 그믐에 "나례(儺禮 : 역귀를 쫓는 의식)" 때, 각 관리들이 잡기(雜技)를 보일 때, "인종"이 와서 구경하였다. "내시ㆍ다방ㆍ견룡" 등이 서로 재주를 보이고 즐기던 중, "내시 김돈중"이 연소(年少)하나 기운이 날래어, 촛불로써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다. 수염이 불에 탄 "정중부"는 화를 내며 "김돈중"을 묶어 놓고 구타하였다. 이 일로 "정중부ㆍ무신"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이를 듣고 "김부식"은 노하여 "정중부"를 고문하려 했으나 왕이 모면케 해주었다.

그 뒤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觀瀾寺)"를 중수하여, 아우인 "김돈시"와 함께 왕의 복을 비는 절로 삼음으로써 "의종"의 환심을 샀다. 1167년(의종21), "의종"이 "봉은사(奉恩寺)"에서 연등행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 "김돈중"의 말이 놀라 한 군사의 화살통에 부딪쳐, 화살이 "의종"의 수레에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유시사건(流矢事件)"으로 군인들이 죄 없이 귀양 가게 되어, "김돈중"에게 더욱 원한을 품게 되었다. 1170년, "보현원"에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제거할 때, "김악산"으로 도망쳐 숨었으나 자신의 종자의 밀고로 동생 "김돈시"와 함께 붙잡혀 처형되었다. 후에 목과 사지가 절단된 채,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아버지 "김부식" 또한 "부관참시"를 당한다.

5.  상세 설명

② 1174~ 1179 ( 5): 정중부 (鄭仲夫ㆍ1106~ 1179ㆍ73세): 경대승에 의해 제거

무신정변을 일으켜, 명종 때 1170~1179년까지 "명종" 대신 실권을 잡았다.  무신으로 활동하던 중, "김돈중ㆍ한뢰"의 전횡에 분개하여, "이의방ㆍ이고" 등과 1170.08월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무신정권"의 집권자가 되었다.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아들 정균ㆍ승려 종참"에 의해 "이의방"을 제거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가, 1179년 "경대승"에 의해 살해당했다.

1170년(의종24), 당시 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신들과의 출유(出遊)가 잦아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여 문신들과 늦도록 시주(詩酒)를 즐겼으나, 경호를 위해 따라간 무신들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의방ㆍ이고" 등이 이 같은 차별대우에 대한 불평을 "정중부"에게 털어놓으니, "정중부" 역시 쌓였던 원한이 폭발하여 구체적인 흉모를 꾸미게 되었다. 정변 이후, 형식적으로는 "이의방"과 권력을 나누었지만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거두"로 살아간다. "무신정권"의 등장 이후,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1173년(명종3),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은 "장순석" 등과 함께, "정중부ㆍ이의방"을 치고 "의종"을 다시 세우려고, 왕을 "거제도"에서 "경주"로 모셔왔으나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었고, "의종"도 심복 "이의민"에게 처형되었다.

1174년,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거병했다가 실패한다. "정중부"는 반란을 잠재우고, 그 와중에 "이의방"도 살해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정권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펴, 같은 무신들의 불만을 샀다. 벼슬에서 물러나자,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정균(아들)ㆍ송유인(사위)"과 함께 효수되어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이때 그의 다른 자녀들도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 정중부의 난 >

1170.08.30일, "의종"은 "보현원"이라는 절로 나들이를 나섰다. 왕은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도록 명했다. 이때 "정중부" 역시 무신의 한사람으로 왕을 수행, "보현원"까지 따라갔다. 한참 어울리던 중, 대장군 "이소응"이 한 젊은 군졸과 씨름을 하다가 지고 말았다. "이소응"은 환갑이 다 된 노장군이었다. 이를 본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늙은 무인 놈아. 그래 대장군으로서 어찌 군졸 놈한테 넘어가느냐. 하는 일 없이 녹만 받아먹는 좀도둑이로구나." "한뇌"는 "이소응"을 떠다 밀었다. 왕과 문신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저 이소응의 꼴을 봐라. 태평성대가 계속되니 무신 놈들은 놀고먹어 비계살만 쪄서 힘을 못 쓰는구나."

이를 본 "정중부"는 달려가, "한뇌"의 멱살을 잡고 1대 갈겼다. "네 이놈, 이소응 장군은 아무리 무관이지만 품계가 3품 대장 아닌가. 너 따위 6품 짜리 젊은 놈이 손지검을 하다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왕은 "정중부"를 달래어 "보현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 무신들은 그간 준비해온 거사를 결행하기로 작정했다. 이를 계기로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 호위 장병들이 경호한 문신을 무차별 처형시킨 후, 내직(內直)의 벼슬아치와 문신들을 마저 죽인다. "의종"을 폐위 시키고 거제도로, "태자"는 진도로 각각 쫓고, 왕의 동생 "익양공 호(皓)"를 "명종"으로 옹립하고 정권을 잡았다.

③ 1179~ 1183 ( 4): 경대승 (慶大升ㆍ1154~ 1183ㆍ29세): 술을 먹고 나서 취침 중, 의문의 요절 → "명종"이 "정중부"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허승ㆍ김희조"와 거사

14, "음서제도""교위(校尉)"가 되었고, 뒤에 장군이 되어 아버지 "경진"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바치고 청렴하게 지냈다. 1170(16),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추대하는 "무신정변"이 일어난다1178(24), "청주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100여 명이 죽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심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실패하자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1179(25), 당시는 무신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정중부"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그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을 결심을 하였다"허승김희조"와 함께 거사를 일으켜, "정중부아들 정균사위 송유인"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기존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방"을 무력화 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단인 "도방"을 신설하였다관리등용에 있어 문신과 무신을 고루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반란에 참가한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같이 거사를 일으켰던 "허승김광립"이 제거되었다.

1181(27), "한신충채인정박돈순" 등의 무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잦은 민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웠다1183(29),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창설하여 사병 100명을 거느렸지만, 집권 4년만이던 1183 08.04일 새벽, 술을 먹고 나서 취침하던 중 29세의 나이로 의문을 남긴 채 돌연사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④ 1183~ 1196 (13): 이의민 (李義旼ㆍ ? ~ 1196): 최충헌에 의해 제거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

1170,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의방"의 명령으로 "의종"의 유배지로 찾아가 "의종"을 암살했으며, "경대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집권하였다1173, 반 무신 운동인 "김보당의 난조위총의 난"의 진압에 참여한 공로로 "상장군"에 올랐다한때 "이 씨가 왕이 된다.""도참설"을 신봉하여, "경주 민란군"과 내통하기도 했다.

집권 이후 권력을 남용하다가, 1196년 이른 봄, "아들 이지영""동부녹사 최충수(최충헌의 동생)" 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으로 "최충헌최충수" 형제의 정변에 휘말려 암살되었다"최충수" 비둘기를 빼앗기자, 이에 불만을 품고 형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 암살"을 모의했고, 군사를 일으켰다1196.04.08,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말을 타려할 때 문 밖에서 대기하던 "최충헌최충수(동생)박진재(조카)"가 일으킨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살해될 때, "최충헌"은 조정의 문신들 38명을 잡아서 "인은관"에 가두었다가 함께 살해하였다사후 "이의민아들 3"의 머리는 참수되어 길거리에 효수되었으며, "최충헌""백존유"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3족을 멸하고, "이지순이지광"을 처형했으며, "이지영"은 해주에서 연회를 벌이다 "최충헌"이 보낸 "장군 한휴"에게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풍수지리참위설(讖緯說)"을 맹신한 그는 "이 씨가 왕이 된다."는 속설을 신봉하여, 장정명사들을 모았고, 급기야 자신이 왕이 될 꿈마저 꾸며, "김사미효심" 등과 힘을 합하여, 고향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부흥을 도모하려 하였으며, 1193(명종23) "이의민"과 내통하는 남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아들 이지순대장군 전존걸"이 출병했으나, "아들 이지순"이 오히려 이들을 도와주자, 휘하 장군들이 "이지순"의 처벌을 건의했지만 대장군 "전존걸"은 크게 한탄하며 말머리를 돌려, "기양현" 가서 자살해버렸다.

⑤ 1196~ 1219 (23): 최충헌 (崔忠獻ㆍ1149~ 1219ㆍ70세) → 사후 4대에 걸쳐, "최씨 무신정권"의 세습

강종(1152~1213명종 아들22대 왕(1211~1213))의 서녀사위고종(1192~1259종 아들23대 왕(1213~1259)) 서매부원종(1219~1274종 아들24대 왕(1259~1274)에게는 고모부이자, 외증조부ㆍ정순왕후의 외증조부충렬왕의 외 외고조부ㆍ사위 임효명을 통해, "공예왕후(의종(18)명종(19)신종(20)의 모후)"와도 사돈이 된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 세습 정권"을 구축하였다이후 경쟁자 "두경승최충수(동생)박진재(조카)"를 모두 제거한 뒤 1인 집권체제를 구축했고, 집권 기간 중 왕인 "명종희종"을 폐위시켰다1209, 학자 "이규보(1169~1241백운거사(白雲居士)최씨 정권에 순종하며 활동한 문인)" 발탁,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文運)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다.

"청교역(靑郊驛)" 관리들의 자기네 "부자살해 미수사건"이 생기자, "영은관""교정도감(敎定都監)" 설치,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왕씨(강종의 서녀)"와 결혼하여, "부마"의 직책까지 겸했다.

※ 두경승 (杜景升ㆍ ? ~ 1197): 고려 중기의 무관ㆍ장군ㆍ정치가

1196(명종26),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서열이 "이의민" 위에 있어서, "이의민""중서성(中書省)"에서 욕설을 했지만, "두경승"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197(명종27), "최충헌 형제""명종"을 폐위시켰고, 다음 날인 음력 09.21일에 "두경승""자연도(紫燕島, 인천 영종도)"로 유배되었다"신종(1144~1204명종 아들20대 왕(1197~1204)" 즉위한 후, 음력 11.01일에 유배된 섬에서 울분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⑨ 1258~ 1268 (10): 김 준 (金 俊 ㆍ ? ~ 1168ㆍ ): 양아들 임연에 의해 제거 : 아버지 김윤성이 최충헌 가노

당시 노비출신으로, "박송비 장군"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최우"에게 신임을 얻었으며, "안심(최우의 첩)"과 간통한 사실이 탄로나, 곤장 40대를 맞고 귀양을 가기도 했다. 후에 "최항"을 섬겼다. 1257년, "최항"이 죽고 서자인 "최의"가 집권하자 불만을 품었고, 1258년 "임연ㆍ유경ㆍ최온" 등과 함께 "삼별초"를 앞세워 "최의"를 죽이고, 권력을 고려 황실에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최씨 무신정권"이 정사를 처리한 권력의 중심인 사병 조직 "도방"을 혁파, "최씨 무신 정권" 일가의 모든 재산 또한 황실에 반납하여, 고려 황실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최충헌→ 최우→ 최항→최의" 4대로 내려온 "최씨 일가"는 "노비 김준"에 의해 몰락하였다.

이로써 "최씨 정권"을 타도하여 황권을 회복시키고, "장군ㆍ위사공신(衛社功臣)" 등이 되었다. 그 후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 비위(非違)의 규찰ㆍ국사 감독"을 담당했다. 이어 "시중"이 되고, "해양후(海陽侯)"에 봉해지고, "무인정권"에서 불리는 최고 권력자 자리인 "교정별감" 자리에 취임하면서, "최씨 무인정권"의 초대 "최충헌"에 견줄 만한 권세와 위세를 누렸다.

후에 "김준"이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 때문에, "최의"를 죽일 때, 협조적이었던 "김준"의 측근들이 멀리하고 떠나버렸고, 1268년(원종9) "원종"의 "친몽정책ㆍ개경(개성)환도"에 반대하다가 측근이자 양아들이었던 "임연"의 세력들에게 "김준 일가"를 모두 "철퇴ㆍ칼"로 처참히 살해하였다. 그의 일가는 멸문지화(滅汶摯禍)를 당하고, 측근들도 반란ㆍ내란죄로 모두 처형되었다.

⑪ 1270~ (3개월): 임유무 (林惟茂ㆍ1248~ 1270ㆍ22세): 원종의 지시로 근위대 삼별초에게 사형

"임연"이 1년을 이끌다가 병사하였고, 아들 "임유무"도 3개월 동안 정권을 지니고 있었다. "임유무"는 "대몽(對蒙)항쟁" 당시 "친몽파"인 "원종(元宗ㆍ재위 1259~1274)"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다 "원종"에 의해 제거된다. 이로써 "무신 정권 시대"는 막을 내리고, "왕정(王政)"이 회복된다. 이후 "고려"는 "몽골"에게 항복하면서, "원나라"에게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골에 대한 항전을 결행"함으로써, "친몽정책"에 동의하는 문신들의 수하들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무신정권"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출륙환도(出陸換都, 섬에서 육지로 나오는 것)"에 반대하여 봉기하였고,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여ㆍ몽 연합군"에 쫓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맞게 됨으로써, "원(몽고)나라"에 대항하던 무신 세력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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