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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사건- 660 : (백제) 계백장군ㆍ3천 궁녀ㆍ의자왕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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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장군 (階伯ㆍ? ~660ㆍ결사대 대장)"은, 660년 "나ㆍ당연합군" 침공했을 때, 군사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충남 논산)"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명 육군정예군과 4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군대가 전멸하고, "계백"도 사망했다. "성충ㆍ흥수"와 함께 "백제의 충신"이라 불리며, 가족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망국에 충성을 지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1. 계백 장군 (階伯? ~660결사대 대장)

660"당의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 대장군 김유신"지휘하는 5만 육군 정예병이 수륙 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충상"의 지휘 하에 5천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만났다이때 계백은 "작은 나라의 병사로 신라와 당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식구들을 살해하였다

"계백""황산벌"에서 "월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로 병사를 독려했다이때 3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4번의 소전투에서 모두 이겼다이에 신라군은 "반굴(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1인 돌격" 전술을 구사하며 장렬히 전사했고, 다음으로 "1인 돌격" 선봉에 나선 "관창(좌장군 김품일의 아들)"은 사로잡혔다.

"계백""관창"의 나이가 어린 데도 기품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워 돌려보냈지만, 다시 진영으로 돌격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관창"의 죽음으로 용기를 얻은 신라군은 백제군보다 더욱 죽을 각오로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충상상영" 20인을 제외한 4,980명이 전멸하며, 참패하고 "계백"도 사망했다.

계백 장군

2. 3천 궁녀낙화암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이 술과 음란에 빠져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멸망했다는 상징적 존재로 "낙화암"에서 투신한 3,000 궁녀가 거론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망국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사비성" 함락 직전 때는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하고 있으며, "낙화암과 3천궁녀" 이야기는 없다.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비슷한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1) 태종춘추공조"인데,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쓰여 있다. 비록 3,000명은 아니지만, "의자왕" 궁녀들이 "타사암"에서 물에 뛰어든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3. 의자왕 (義慈王595?~66065?재위 641~660(19)백제 31마지막 국왕)

수도 (하남위례성→ 웅진→ 사비)

백제(남부여) 31대 국왕(재위: 641~660)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재위기간 초기, 개혁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장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당연합군 (18: 김유신(태종무열왕) 육군 5+ 소정방의 수군 13)"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함으로써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군주이다최근에 발견된 "예식진(禰寔進)" 묘지명에 주목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웅진방령 예식(禰植)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하였다"는 새로운 견해도 제시되었다.

08.02, 열린 "당연합군"의 승전의식에서 "의자왕아들 부여융(615~682)"은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벌인다"당상에 앉은 태종 무열왕(654~661)소정방(592~667)은 항복한 의자왕아들 부여융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이 모습을 본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자왕조)

본 명 : 부여의자(扶餘義慈)      별 칭 : 해동증자(海東曾子)-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    수 도 : 하남위례성(개국왕 온조BC 18~475서울 몽촌토성/풍납토성)"장수왕(고구려)"에게 락되고, "개로왕(백제)"은 전사웅진(고마나루문주왕(개로왕 아들)475~538충남 공주)사비(성왕538~660충남 부여유적- 부소산성낙화암정림사지 석탑

"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남부여""의자왕"660.08.29일에 항복했고, 완전히 멸망하였다"의자왕""왕자들대신/장사 88백성 12,807"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의 낙양"으로 압송었고, 11.01일에 "낙양의 조당"에 포로로서 바쳐져, "당 고종" 앞에서 문책을 들어야 했다"측천무후" 앞에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고종""의자왕태자남부여의 여러 신료들"을 꾸짖은 용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죄를 사함으로써 "당의 신민"으로 받아들이는 의례 절차이기도 했다.

660,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다11.01, "당 고종"에게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며칠 뒤에 병사하였다"낙양의 북망산""손호(오나라 최후의 황제)진숙보(중국 남북조 진나라 5대 황제)" 옆에 묻혔다이때 "당 고종"은 그의 장례에 "남부여"에서 끌려온 옛 신하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전한다.

641년 부왕인 무왕이 죽자 즉위하였는데, 왕에 즉위할 당시 나이는 적어도 40대 중반이 넘은 완숙한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의자왕""친 고구려정책"을 추진한 것은 중국 대륙에서의 통일 제국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분열된 중국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통일 왕조인 ""은 이웃 나라에 복속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나라는 ""에 복속하느냐 아니면 자주적인 노선을 견지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 것이다이에 반발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고, ""이 들어서자 화친을 청하는 등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여전히 ""의 압박은 거세졌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의자왕""당의 팽창주의"가 한반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고구려"가 백제를 막아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친 고구려정책"을 취한 것이다"고구려" 또한 백제의 대외정책 변화에 부응하여, "대당강경파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하였다.

"의자왕"이 노린 또 다른 측면은 "두 나라(고구려백제)"가 화해함으로써 "신라"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대륙의 외풍을 막아냄과 동시에 경쟁국인 "신라"를 고립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했던 것이다642.07,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신라"는 이를 돌파하고자 "고구려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이에 "신라"""에 의존함으로써 국가의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고자 하였다백제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중국 통교(通交)를 위협하였다.

645, "신라""고구려"를 공격한 ""에 협조하자,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의 7"을 공격하였다"의자왕"은 이와 같이 대내외적인 개혁을 통해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신라"와의 전쟁에 우위를 점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647, "신라"에서 "김춘추김유신" 연합세력이 "비담염종"을 제압하고 집권하면서, "친당정책" 수립한 것도 신라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645년과 647~648년 연이은 "고구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그것은 "고구려"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백제"를 차단하여, "고구려- 백제- "로 이어지는 라인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651, ""은 백제에게 "신라"와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응분의 대가가 따를 것임을 천명하였다655, 하지만 백제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의 30여 성을 빼앗았다"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의자왕"""이 아닌 "고구려" 편에 섰던 것임을 나타내준다. 이 시기 "고구려백제"가 대규모 사절단을 "야마토(大和) 정부"에 보낸 사실도 3국의 협력 관계를 말해준 것으로 본다.

"의자왕"의 정치는 655(의자왕15)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 656.03월에는 궁인과 더불어 밤낮으로 음란스러운 잔치를 매일 열면서, 이를 비판한 "좌평 성충"을 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옥사하기 직전 "성충""앞으로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육로는 탄현에서, 수로는 기벌포에서 막으라"는 말을 왕에게 올렸지만 "의자왕"은 거부했다오히려 657(의자왕17)에는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내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오늘날 이것은 귀족들이 전국 각지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왕토 사상"의 명분을 들어 몰수해 왕자의 식읍으로 재편함으로써, "귀족 소유"의 재산을 "왕실 소유"로 전환시키고, "왕자 중심"의 독재 체제를 추구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신라""김춘추"의 집권 이후, "당의 의관제(衣冠制) 도입연호의 사용"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친 신라정책"으로 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655, 백제가 "당의 통첩"을 무시하자 "백제"를 먼저 정벌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659, "당의 백제 정벌"은 이미 준비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660"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13만 대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기벌포"에 상륙하였다"계백의 5천 결사대""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그 결과, 두 나라의 군대가 합류하여, "사비성" 포위하였다"의자왕"은 견고한 "웅진성"으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부여태(2째 아들)부여문사(손자)" 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 "사비성"이 맥없이 무너졌다이에 "의자왕""태자 및 웅진방령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와 같이 급작스러운 "의자왕" 정권의 붕괴는 전쟁이 "사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관계로 지방 세력이 온존하여, "백제부흥운동" 거세게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이후 "부여륭(아들)""웅진 도독"이 되어,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백제의 고토(故土)""신라"에게 상실하여, ""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최근에 "부여태비(증손녀)" 묘지명이 발견되어, 의자왕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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