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淵蓋蘇文ㆍ개금(蓋金)ㆍ594~ 665ㆍ71세)"은 642년,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대막리지(大莫離支)"를 신설하고, "연개소문ㆍ남생ㆍ남건"으로 세습되는 "연씨 무인정권(642~ 668ㆍ26년간)"을 세워,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1. 연개소문 (淵蓋蘇文ㆍ개금(蓋金)ㆍ594~ 665ㆍ71세): 고구려 말 장군ㆍ정치가
동생 : 정토 (淨土)ㆍ아들 : 남생 (男生)/ 남건 (男建)/ 남산 (男産)
642년,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대막리지(大莫離支)"를 신설하고, "연개소문ㆍ남생ㆍ남건"으로 세습되는 "연씨 무인정권(642~ 668ㆍ26년간)"을 세워,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했다고 한다. "동부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였다.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했으나 귀족들에게 호소해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그는 "천리장성"을 쌓을 때, 최고 감독자가 되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 챈 그는 642년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부른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해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스스로는 "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연개소문"이 죽고 난 후, "연정토(동생)ㆍ남생(1째)ㆍ남산(3째)" 등의 내분이 일어났다.
① 영류왕 (榮留王ㆍ? ~642ㆍ27대 왕 (618~642))
평원왕 차남ㆍ영양왕 이복동생ㆍ보장왕의 생부ㆍ당과 우호 관계를 조성하던 중에 "막리지의 난"을 일으킨 "연개소문"에게 폐위, 사형 당함.
② 보장왕 (寶臧王ㆍ? ~682ㆍ28대 왕 (642~ 668))
642년, "막리지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비록 왕위에 있었지만, 실권은 "연개소문"에게 있었다. 668년 "나ㆍ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이후 "당 군"에 체포되어 "당나라"로 잡혀,가 한때 고구려 부흥운동을 꾀하였으나 실패한 뒤 681년 공주(邛州)로 유배되어, 682년 사망
③ "양만춘 (안시성(安市城) 성주)"도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 간의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했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다. "안시성주"와의 타협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3년에 1번씩 선임했고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 귀족 간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여의치 않으면 각기 무력을 동원했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해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 중국세력과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졌다.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해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 관계가 있는데, 그는 대외적인 위기상황은 정권의 안정화와 집권력의 강화를 도모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했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당"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신을 가두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645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ㆍ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나라"와의 관계에서처럼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 지방"을 선제공격해, "수나라"와 싸움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그는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해,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했듯이, "당태종"이 침공해 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 대신 흥성했던 "설연타(薛延陀)" 세력과 연결해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ㆍ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해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했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했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젊은 장수를 기용해, 한꺼번에 "당 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 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 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665년 그가 죽자, 맏아들 "남생(男生)"이 직을 계승했고, "남건(男建)ㆍ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가졌다. 곧이어 터진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신라ㆍ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
2. 양만춘 (梁萬春ㆍ楊萬春ㆍ ? ~ ?): 장군ㆍ안시성의 성주ㆍ연개소문 반대파
"양만춘"이란 이름은 16C 중국 소설에 최초로 등장한 가공의 이름으로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전하지 않아, 그저 "안시성주(安市城主)"라 불리기도 한다. "안시성"의 성주였으며, 재주와 용기가 있었다. 642년(보장왕1),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는데, 성을 잘 지켜냈다. "당 태종"에 맞서, "안시성"을 지켜냄으로써 "제1차 여당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① 안시성(安市城)
"요동 지방"에 위치한 토성(土城)으로 "요동성(遼東城)ㆍ백암성(白巖城)ㆍ건안성(建安城)"등과 더불어 "당"의 "평양성" 진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금의 "중국 요녕성 해성현"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 지역"이 옛 "안시성 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644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645년 "안시성"까지 진군해온 "당 군"에 맞서 오래도록 버텨냈다. 이에 "강하왕(江夏王) 이도종(당고조 사촌인 이소(李韶)의 아들)"이 성의 동남방에 토산을 쌓기 시작했고, "안시성주" 역시 성벽을 더욱 높이며 대응하였다. 교전은 하루에 6~7회에 달했으며, 충차나 포석의 타격을 받아 파괴된 곳은 목책을 세워 수리하였다. "당 군"은 60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토산을 올린 끝에 불과 수 장(丈) 거리에서 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가 토산 수비를 맡았다.
얼마 후 토산이 무너져 성과 이어졌는데, "부복애"가 마침 자리에 없었다. "안시성주"가 재빨리 수백 명을 출전시켜, "토산"을 빼앗고 "해자"까지 둘렀다. "당 태종"의 3일에 걸친 탈환 시도도 모두 저지하였다. 겨울이 오면서 보급이 곤란해진 "당 태종"은 결국 총퇴각을 명하고, 마지막으로 "안시성" 주위를 돌며 시위하였다. "안시성주"가 병력을 물리고, 홀로 성에 올라 작별의 예를 갖추었다.
"당 태종"은 "안시성주"가 성을 고수한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내리며 격려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당 태종"이 "안시성주"가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14C "고려 시"에 등장하지만 어느 사서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다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중국" 측에서 자신들의 수치로 여겨 감출 가능성은 매우 높다.
3. 당 태종 이세민 (李世民ㆍ599~649ㆍ50세): 중국 당나라 2대 황제ㆍ당 고조 이연의 2남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뛰어난 장군ㆍ정치가ㆍ전략가ㆍ예술가이기도 했으며, 역대 황제 가운데 "최고 성군"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종종 "청나라 강희제"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가 다스린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다.
649년,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 실패 후 이질을 앓았다.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폐하고,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역시 폐하였다. 그리하여, "9남 위진왕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이후 "황태자 이치"는 당의 "제3대 황제 당 고종"이 되며, 대리 청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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