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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삼국시대~고려

신라 : 보물들 ① 석굴암ㆍ불국사ㆍ다보탑ㆍ신라 (新羅) 왕조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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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新羅ㆍBC. 57~ 935)"는 고대 삼국의 하나로서, 7C 중엽에 "백제ㆍ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 신라 (新羅BC. 57~ 935)의 왕조 >

992년 동안, 총 56대 왕 배출 : 박(朴)씨 10왕석(昔)씨 8왕김(金)씨 38왕

신라1
신라2

1. 석굴암 (국보 24불국사 부속암자3.26m토함산 중턱 (진현동))

"삼국유사 권5ㆍ대성효이세부모조"에 의하면, 751년(경덕왕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하며,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했다.

석굴암

여러 개의 판석과 다듬은 돌로, "궁륭천장 석실"의 비례ㆍ균형을 유지하면서, 역학적으로 축조한 "인공 석굴"이라는 점에서, 인도ㆍ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구조는 "전방 후원식"으로,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 "주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뒷벽에 "연화무늬"로 조각되어 있는데, 예배하는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석굴암" 내의 조각상들은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거느리고 다니는 여러 권속들로,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ㆍ천부상ㆍ제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즉 "석굴암"의 불상은 여러 "불ㆍ보살ㆍ천부상" 등이 모여, 하나의 작은 "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는 "종열(從悅)"이,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경주 석굴암 석굴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서 크게 중수되었으며, 그 뒤 일제강점기에 1913~1915ㆍ 1917ㆍ1920~1923년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본의 잘못된 보수는 1962~1964년에 정부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① 원형 주실의 본존 불상 (326cm)

"석굴암"의 여러 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은 "원형 주실"의 "본존 불상(326cm)"으로 주변 모든 상들의 구심체로, "대좌"까지 합쳐 약 500cm나 되는 큰 상이며,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본존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걸쳤으며, 두 다리는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모아진 두 다리의 중앙에 놓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간략한 옷 주름 표현은 상 전체의 단순한 조형성을 강조해주며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긴장감과 신비한 종교성이 어우러져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종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본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수인"에 의해, 인간 세상에 태어나 득도한 "석가모니불"이라는 설과 "부석사 무량수전 항마촉지인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인 것처럼, 이 "석굴암 본존불"도 "김대성"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정토왕생을 바라는 의미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불국사"가 "화엄종"의 사찰이고, 8C 중엽 "화엄종"이 유행함에 따라 "석굴암의 본존"은 "화엄경"에 나오는 첫 장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석가모니"가 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들에게 그 깨달음의 황홀함을 보여주면서, "문수보살ㆍ보현보살"을 통해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 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항마촉지인의 부처" 모습은 "석가모니불"뿐 아니라, 모든 부처가 깨닫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단계를 상징하는 손 모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석굴암 불상군

"본존불"을 중심으로 "범천구ㆍ제석천(2구)ㆍ보살(3구)ㆍ나한(10구)ㆍ감실보살(8구)ㆍ사천왕(4구)ㆍ인왕 (2구)ㆍ팔부신중 (8구,169~186cm)" 등 40구가 배치되어 있다. 우선 "전실"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갑옷을 입고, 암좌 위에 서 있는 4구의 "팔부신중상(169~186cm)"이 있다. 원래는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상"으로 변한 것으로 부처가 설법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천부상"이다.

그 이름은 "용ㆍ건달바ㆍ아수라ㆍ천ㆍ야차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로 알려져 있으나, 경전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이 가운데 머리에 "용관"을 쓴 "용"ㆍ"사자관"을 쓴 "건달바"ㆍ3개의 얼굴과 6개의 팔을 가진 "아수라"는 쉽게 확인할 수 있으나, 나머지 상들은 구별이 어려워 정확한 명칭을 붙이기가 어렵다. 더욱이 입구 양쪽에 있는 각각 2구의 "팔부신중"은 굴 안의 상들과 비교해, 조각수법이 현저하게 떨어져,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실"에서 "원형주실" 입구 양쪽에 있는 "인왕상"은 문지기의 역할을 하는 "천부상"이다.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고 근육을 자랑하며, 바람에 날리는 천의와 치맛자락이 특징적이다. 또한 번뇌ㆍ망상을 깨뜨린다는 상징적인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있어, "금강역사"라고도 부른다. "주실"로 들어가는 "비도" 양쪽에는 각각 2구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손에는 칼이나 창을 들고, "악귀"를 밟고 서 있다. 이 상들은 "불법ㆍ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호법신장상"이다. 손에 탑을 들고 있는 상은 "북방의 다문천"으로 "석굴암"에서는 오른쪽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그 옆의 상은 "동방의 지국천"이다.

왼쪽 입구 쪽의 상은 "남방의 증장천", 그 안쪽의 상은 "서방의 광목천"으로 확인된다. "본존상"이 모셔져 있는 원형의 "주실" 벽에는 15구의 "부조상"이 있고, 벽 위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이 가운데 2곳은 비어 있고, 나머지에는 8구의 "보살좌상(86~95cm)"이 있다. 우선 입구 쪽에서 가까운 벽부터 보면, 양쪽의 처음 2상은 "범천ㆍ제석천(213cm)"으로 원래는 "인도 아리안계의 브라마(Brahma)와 인드라(Indra)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수호와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천부상"이다.

"범천"은 오른손에 번뇌를 털어내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불자"를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번뇌를 씻어준다는 물병인 "정병"을 들고 있다. "제석천"은 무복을 입고,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높은 관이나 늘어진 옷 주름선과 천의 표현은 정교하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회화적인 표현을 보는 듯 섬세하다. 이 두 "천부상" 옆에는 조그만 잔을 들고 서 있는 상과 길고 네모난 지물을 들고 서 있는 "보살상"이 있는데 그 명칭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길고 네모난 물건을 들고 있는 상은 "지혜제일의 문수보살(198cm)"로 "경권"을 들고 있으며, 그 반대편 상은 "문수보살"과 짝을 이루고 부처를 보좌하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현보살(198cm)"로 추정된다. 부드러운 천의 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듯 가벼운 느낌을 주며, 영락장식과 군의의 늘어진 주름이 서로 겹치면서도 입체감과 부드러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보살상" 다음에는 양쪽으로 5인의 "나한상(213~218cm)"이 각기 다양한 자세로 "지물"을 들고 서 있는데 10대 제자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자들의 명칭은 경전을 통해서 알 수 있으나, "석굴"에 표현된 상들과 관련하여 각각의 상에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

각 "나한상"들은 사색하는 듯한 얼굴표정에서 수행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몸체와 가사의 주름처리는 다른 조각상들과 마찬가지이다. 이 "10대 제자" 사이로 뒷벽 정면에는 정교한 조각수법으로 마치 회화작품과 같이 섬세하게 표현된 "십일면관음보살상(218cm)"이 있다. 

"관음보살상"은 보살들 중에서 "자비"를 상징하는데, 그 자비를 베푸는 대상에 따라 구제와 교화하는 방법이 다양하며, 보살이 지닌 여러 감응력을 상징하기 위해 여러 개의 얼굴과 팔로 표현된다. 이 "십일면관음보살상"은 그 표현이 정교하고, 조각기술이 완벽해 "석굴암 불상"뿐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정수를 대표한다. "주실"의 "윗벽 감실"에 있는 8구의 상들은 모두 좌상이며,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중 "나한"과 같이 승려 머리를 한 상은 저 세상에 태어난 중생의 정토왕생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로, 현존하는 최초의 "지장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쓴 "보관"에 "아미타화불"이 있는 상은 "관음보살상", 뒷벽 중앙의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대담하는 상은 왼쪽이 "유마힐거사", 오른쪽이 "문수보살"로 확인되나, 나머지 상들은 그 명칭을 알 수 없다.

2. 불국사 (토함산에 있는 절조계종 제11교구 본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칠보교- 연화교 (국보 22)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높이 177cm)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높이 166cm)ㆍ사리탑(보물 61높이 206cm)3층 석탑 사리장엄구(국보 126)

불국사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대웅전"으로,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비로전"으로 대표된다"불국사 경내"는 석단에 의하여, "단상의 불국토""단하의 속계"로 양분된다.

크고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석단 위에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아, "청운교백운교""자하문"을 거쳐, "석가모니의 사바세계""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석가탑)다보탑"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쌍탑 구조"이며, 뒤편으로는 경론을 강술하는 "무설전"을 두고, "대웅전" 일곽을 "서 행랑"으로 에워싸고 있다"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칠보교연화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되며 그 안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다"칠보교" 아래에는 2쌍의 "당간지주와 석조"가 있고, 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경덕왕10) "김대성(金大城)"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가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원찰"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한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528(법흥왕15)"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화엄불국사"를 창건하고, 574(진흥왕35)에 중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 역사와 모순된 것이며,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듯한 대목도 있어서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적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주요건물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놓아, "불국사"의 원형복원에 좋은 자료가 된다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된 것이며, 석탑을 포함한 석조물은 병화를 입지 않아 신라시대의 원형을 유지한 것들이 꽤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0년의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3. 석가탑 (불국사 3층석탑무영탑국보 21높이 10.4m)

석가탑 (多寶佛): 현세의 부처인 "석가여래(석존)"를 표현한 서쪽에 있는 탑     무영탑 (無影塔): "아사달아사녀(阿斯女)" 이야기에서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하여 지어진 것으로, "영지(影池)"의 전설과 관련된 것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1966년 해체복원공사를 하던 중, 2 "탑신 중앙부 사리공"에서 "금강사리함(金剛舍利函)"과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구정광 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8C 초엽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다라니 경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임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기단이나 탑신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해 보이며, 각 부의 비례가 균형이 잡혀, 안정되고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신라 석탑의 표본이 되는 탑이다이 탑은 탑주(塔周)"연화(蓮花)무늬"를 새긴 8개의 둥근 돌을 돌려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 팔방금강좌 (八方金剛座)이다.

"기단"2층을 이루고, 상하에서 "탱주(撑柱) 2()"로 알맞게, 면석(面石)을 구분하였다"1탑신" 이상은 "탑신과 옥개(屋蓋)"를 각각 1()으로 쌓아올렸는데, 기단의 높이와 탑신이 서로 상하에서 알맞게 조화되어, 안정된 느낌과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준다.

석가탑

4. 다보탑 (국보 20높이 10.4m진현)

다보탑 : 현세의 부처인 "석가여래(석존)" "영취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할 때, "과거의 부처" "다보불(多寶佛)"땅 밑에서 솟구치며 소리 내어, 석존의 설법을 찬탄하고 증명했다고 하는 탑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높이 10.4m, 기단 폭 4.4m화강석 석탑(서쪽 석가탑과 같이 건립신라 경덕왕(景德王) , 김대성(金大城)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하층기단의 4면에는 계단이 있고, 양쪽에 난간의 석주로 보이는 "유구"가 서 있다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상층기단에는 4개의 "우주""중앙"에 탱주가 서 있으며, "우주" 위에는 2단의 "두공"이 십자모양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갑석" 위에는 8각형의 "신부(身部)"3단 있는데, 하단은 4각형의 난간 속에 "별석"을 돌렸고, 중단은 8각 난간 속에 "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다.

5. 안압지 (연못동궁과 월지인왕동)

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원지(苑池)"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신라 왕궁의 "후원"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674(문무왕 14)에 완성되었다1975~ 1986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유구"가 밝혀졌는데,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호안""서쪽 호안" 변에서 5개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안압지

부정형의 "석축 호안"은 서쪽 호안선만 직선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호안"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다"입수구"는 동쪽과 서쪽의 호안이 만나는 곳에 설치되어 있고, "출수구"는 북쪽 호안에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연못의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이 썼던 일상생활 유물인 "목선목상장신구주사위" 등과 불교미술품인 "불상광배조로 2(調露二年, 680)이라는 명문이 씌어 있는 보상화문전" 등 다수가 발굴되었다주로 "연못"에 임한 건물지 부근에서 출토되었으며, "금동제삼존판불 2금동보살판불 8금동여래입상 6 금동여래좌상 1다수의 금동광배편광배에 입체적으로 장식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화불보주비천상천개 등이다.

6. 황룡사 터 (9층탑사적 61)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절로 신라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C 후반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었으며, 9층탑은 불력(佛力)으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2층은 중화(中華)3층은 오월(吳越)4층은 탁라(托羅)5층은 응유(鷹遊)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9층은 예맥(濊貊)"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

황룡사 터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도에서 전래된 상을 모본으로 만든 "장륙존상9층탑에 대한 전설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宴坐石)의 기록" 등에 의해서 신라가 석가탄생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였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553(진흥왕 14)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선덕여왕 14)에는 "목탑"을 세웠고, 그 뒤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 사찰로서 숭앙되었으나, 1238(고종 25) 몽골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현재 절터는 민가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지만, 특히 신라3(新羅三寶)"장륙존상9층 목탑"이 있었던 "석조대좌심초석"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절터는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1976.06~ 1983.12월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총면적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 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 앞쪽에도 역시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건물이 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가람구조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이 건물들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남 회랑""서 회랑"보다 더 길게 연장되어 있고, "남 회랑"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긴 건물지가 연결되어 있는 점 등에서 회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렇게 특이한 가람배치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황룡사"12차에 걸쳐 가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과도 일치된다.

"장륙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즉 인도의 아소카 왕이 석가 삼존불을 조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 3만 분과 황철 57,000, 석가삼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조성되기를 축원했는데 경주에 이르러 574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하며, 이때 장륙존상의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이 1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2,000근과 황금 1136분이 들었다고 하며, 이 황룡사 장륙상은 이듬해 왕이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는 눈물을 발꿈치까지 흘려 땅을 1척이나 적셨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이 불상은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두 다리와 신광(身光)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삼존불입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장륙상은 1() 6()이므로, 보통 사람 키의 2배가 넘는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기록에서 인도의 아소카 왕이 상의 모본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황룡사금동상이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이국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층 목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3 황룡사구층탑조""찰주본기(刹柱本記)"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에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이간(伊干)용춘(龍春)"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645(선덕여왕 14)에 완성했다고 한다기록에 의하면, 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목탑은 718(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868872101210221064년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삼국유사- 4 황룡사종(皇龍寺鐘)"에 보면, 754(경덕왕 13) 구리 497,581근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 종도 역시 몽골 침입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이외에도 금동불입상(높이 10)을 비롯하여 풍탁(風鐸금동귀걸이·동경(銅鏡와전(瓦塼치미(높이 182) 4만 점이 넘는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황룡사목탑지 사리장엄구황룡사지금동보살두황룡사지금동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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