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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삼국지 (三國志) ④ 제갈량 (와룡ㆍ諸葛亮)ㆍ방통 (봉추ㆍ龐統)

by 당대 제일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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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봉추 (臥龍鳳雛)"는 누워 있는 용과 봉황의 병아리이고, "복룡봉추 (伏龍鳳雛)"는 엎드려 있는 용과 봉황의 병아리를 말하며, "용구봉추 (龍駒鳳雛)"는 뛰어난 말과 봉황의 병아리이고, "기린아 (麒麟兒)"는 재주와 슬기가 탁월한 사람을 말한다.

 

1. 와룡봉추 (제갈량ㆍ방통)

"와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龐統)"이다.

① 초야에 묻혀 알려지지 않은 인재ㆍ장래 큰 인물이 될 소질을 가진 영재

비록 "제갈량(諸葛亮)ㆍ방통(龐統)"은 초야에 묻혀 살고 있지만, 그들의 재주는 비상하였다고 전한다.

② 제갈 량 (와룡선생)ㆍ방통 (봉추)ㆍ사마 휘 (수경선생ㆍ호호선생)

• 제갈 량 (諸葛 亮ㆍ181~ 234ㆍ향년 53세ㆍ자 : 공명(孔明)별칭 : 와룡(臥龍)복룡(伏龍))ㆍ병법서로는 자신이 실제 체험하고 운용하였던 "병법"을 간추려, 임종 직전 "강유"에게 전수시킨 "제갈공명 병법"이 유명하다.

• 방통 (龐統ㆍ179~ 214ㆍ향년 35세): 별칭- 봉추(鳳雛ㆍ봉황의 새끼라는 의미) : 용모 : "짙은 눈썹ㆍ들창코ㆍ검은 얼굴ㆍ짧은 구레나룻" 등 괴상한 용모. "인물평의 대가"이면서도, "제왕"을 곁에서 모실 인물, 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방덕공(삼촌)"은 "방통"의 싹을 알아보고 "봉추"라 칭하였다. "사마휘"는 "방통"과 면담해보고는 "방덕공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방통은 실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고 감탄했다.

 

2. 사마 휘 (司馬徽, ? ~ 208년ㆍ중국 후한 말ㆍ동한 말의 은사(隱士)): 수경선생ㆍ호호선생

"감정능력ㆍ인재 발굴 능력"에 특출했다고 전해진다.  한 말(漢末)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형주"로 피하여 지내며, "방덕공(龐德公)ㆍ방통(조카) 등과 친구로 지냈다. "형주 자사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점령했을 때, 병으로 죽었다.

• 수경 선생 (水鏡先生) :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감정능력ㆍ인재 발굴 능력에 특출했다고 전해진다.      • 호호 선생 (好好先生): 누구의 말에도 항상 "좋다, 좋아"라고 대답을 했다.

• 제자 : 제갈량ㆍ방통ㆍ서서 (유비에게 제갈량 천거 : 저는 그를 만날 수는 있지만, 데려오지는 못합니다)  일찍이 "유비"에게 "제갈량ㆍ방통" 등을 추천하면서, "복룡ㆍ봉추,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비"가 그에게 산을 나와 도와주기를 청했으나, "산과 들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이 세속의 등용을 감당할 수 없다."며, 완곡히 거절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를 따라, 형주(荊州)의 양양(襄陽)으로 피난 왔다가, 숙부가 죽자, "양양"의 서쪽에 있는 "융중(隆中)"에 정착하여 은거하면서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당시 "유비(劉備)"는 "황건적(黃巾賊)의 난" 속에서 별로 큰 전공을 세우지 못한 채,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근거지를 얻지 못하고, "형주"에 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으면서 인재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유비"가 "사마휘(司馬徽)"에게 시국에 대해 묻자, "사마휘"가 대답했다.  "속세의 유생이 어찌 시무를 알겠소. 시무를 아는 것은 준걸들인데, 이곳에 복룡과 봉추가 있습니다."  (글만 읽는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이곳에 계신 복룡과 봉추가 잘 알지요)  "복룡과 봉추가 누구냐"고 "유비"가 묻자, "사마휘"는 "제갈공명과 방사원(龐士元)"이라고 대답했다.

"제갈량ㆍ방통ㆍ서서" 등 제자들에게 동굴을 빠져나오는 시험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제갈량"이 "사마휘"에게, "야~ 이 늙은이야, 이런 쓸 데 없는, 수업받기에는 내 돈이 너무 아까우니, 내 수업료 돌려내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이에 화가 난 "사마휘"가 "제갈량"을 끌어내라고 했으며, "방통ㆍ서서"가 "제갈량"을 끌어냈다고 한다. "제갈량"이 기지를 발휘하여 동굴을 빠져나오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3. 제갈 량 (諸葛 亮ㆍ181~ 234ㆍ향년 53세ㆍ자- 공명(孔明)ㆍ별칭 : 와룡선생)

"제갈량"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방통"은 그러나 36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제갈량"은 "와룡 혹은 복룡", 즉 "누워 있는 용"으로 불렸고, "방통"은 "봉추", 즉 봉황의 새끼로 불렸다.  "용ㆍ봉황"은 현실에는 없는 상서로운 존재들이니, "제갈공명ㆍ방통"이 당대에 쌍벽을 이루는 뛰어난 인물들임을 말해준다. "와룡ㆍ봉추" 가운데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제갈 량

중국 삼국시대 "촉한 (蜀漢ㆍ220∼263)"의 전략가ㆍ"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ㆍ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조조(曹操)"가 간사한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제갈량"은 "선견지명(先見之明)ㆍ주도면밀(周到綿密)함"으로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에서 "숙부 제갈 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 "위의 유비"는 "조조"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여, "형주(荊州)"로 도망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였다. "유비"는 재기하기 위하여, 인재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별히 "형주"의 명사인 "사마휘(司馬徽)"에게 인재를 추천해줄 것을 청하였다.  "사마휘"는 "이곳에 와룡(臥龍)과 봉추(鳳雛)가 있는데, 이들 중 한 사람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龐統)이다.)  당시, "제갈량"은 "양양성" 서쪽 20리 되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가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유비"의 모사들도 "제갈량"이 걸출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유비"는 그를 초빙하여, 자신의 천하 대업을 도와주기를 청하려고 하였다.

207년, "유비"는 "관우ㆍ장비"를 데리고, 직접 "제갈량"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1번째와 2번째는 그들을 피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비"가 3번째로 "제갈량"을 찾아갔을 때가,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  

"제갈량"은 직접 뜰에 내려와, "유비"를 맞았다.  "유비"는 "관우ㆍ장비"를 밖에 있게 하고, "제갈량"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유비ㆍ제갈량"은 천하의 형세를 이야기하며, "유비"는 그에게 "군사(軍師)"가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제갈량"은 "유비"의 성의에 깊이 감동하여,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서, "유비"를 도와 천하 대사를 도모하였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ㆍ익주"를 "유비"의 영유로 하였다.  그 후도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221년 "한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와 연합, "위"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ㆍ사마중달)"과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4. 제갈 량 (諸葛 亮)의 출사표(出師表)

"촉(蜀)나라의 유비"가 죽자, 남방 이족(이族)의 우두머리인 "맹획(孟獲)"은 이를 틈타 군대를 동원하여 "촉나라"에 반항하였다.  이즈음 "유비"의 아들 "선(禪)"은 "촉나라"의 후주(后主)자리를 물려받고, "제갈량"은 계속 "승상"의 일을 맡아보며, "무향후(武鄕侯)"에 봉해져, "촉나라"의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안정적인 국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힘을 모았다.  몇 년이 지나자, "촉나라"는 이전처럼 국력을 회복하고, 충분한 식량도 비축하게 되었다.

225년, "제갈량"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쪽 원정에 나서, "맹획"을 7차례 붙잡았다가, 7차례 놓아주었는데, "맹획"은 진심으로 감복하여, "촉나라"에 귀순하였다.  "제갈량"은 "오(吳)나라"와 연합하여, "위(魏)나라"를 정벌할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남방"이 평정되어 근심이 하나 사라지고, 밖으로는 "오나라"와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자, "제갈량"은 "위나라 정벌"을 위한 출병을 결심하였다.

출병에 앞서, 그는 "유선"에게 글을 올려, "동한(東漢)" 말기 왕권이 무너지게 된 배경 등을 언급하며, 충신들의 말을 잘 듣고, 상벌을 엄정하게 집행할 것을 간언하였다.  "삼국지, 촉서(蜀書), 제갈량 전(諸葛亮 傳)"에는 "(227년) 군대를 이끌고, 한수(漢水)가에 주둔하다가 출발에 즈음하여, 소(疏)를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때 올린 글이 바로 이 "출사표"이다.

① 선 출사표 (先 出師表)

선제(先帝, 유비)께서 대업을 시작하시어, 반도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지고, 익주(益州, 현 사천성 성도)는 피폐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폐하를 모시며 호위하는 신하들은 궁내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충성스런 장수들이 조정 밖에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선제의 특별한 대우를 기리며,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 때문입니다.

진실로 폐하께서는 천자로서의 견문을 넓히시어, 선제의 남기신 덕을 빛내시며, 뜻있는 인사(人士)들의 기개(氣槪)를 넓히셔야 하며, 아무런 까닭 없이 폐하 자신을 박덕하다 여기시고, 이치에 맞지 않는 비유를 끌어댐으로써, 충간의 길을 막아서는 아니 됩니다  (중략)

신은 본시 평민으로서, 남양에서 밭을 갈며, 어지러운 세상에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면서, 제후들에게 명성이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선제께서는 신(臣)을 비천하다고 여기시지 않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찾아주시어, 누추한 움막으로 신(臣)을 세 번이나 찾아오시어, 당시의 일을 신에게 물으셨습니다.  (중략) 신은 선제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당하지 못해 감격하면서, 이제 멀리 떠나려 함에, 이 글을 대하고 보니, 눈물이 흘러 말씀을 드려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② 후 출사표 (後 出師表)

233년, "유비"는 "임종 전"에 특별히 "제갈량"을 불러, 후사(後事)를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나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할 수 있다면, 그를 보좌해 주도록 하시오.  만약 그가 인물이 되지 못할 것 같다면, 그를 대신하여 제위(帝位)를 맡아주시오."

"제갈량"은 이 말에 몹시 감동하여, "유비"에게 말했다. "모든 힘을 다해 태자를 보좌하며, 죽도록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17세 된 "후주 유선"을 힘을 다해 보좌하였다. 288년 겨울, "제갈량"은 출병에 앞서, "후주 유선"에게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며, "선제 유비"에게 보답하려는 자신의 결심을 적은 글, 즉 "후 출사표"를 올렸다. "제갈량"은 "후 출사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략) 저는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5. 방통 (龐統ㆍ179~214ㆍ향년 35세ㆍ별칭 : 봉추 (鳳雛봉황의 새끼) )

"후한" , "유비" 휘하의 정치가, "낙성"을 포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물평의 대가"이면서도, 제왕을 곁에서 모실 인물로 여겨졌다 "익주"를 탈취할 것을 제안하여, "유비""입 촉"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제갈량""유비"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아니 만나기 전부터 "유비"의 존경과 신임을 받은 것에 비해, "방통""유비"를 돕기 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추남", "낙봉파"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무엇보다도 "방통" 용모, "짙은 눈썹들창코검은 얼굴짧은 구레나룻" 등 괴상한 용모로 인해 중용 받지 못한다.

"적벽대전" 무렵, "강동"으로 피신해 있다가, "장간"과 함께 "위나라"로 넘어가 "조조"를 돕는 척한다 "조조"의 수군은 익숙하지 않은 수상생활로 인해 병사하는 병사가 많았으므로, "방통"은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자고 진언한다 "조조"는 기뻐하는데, 실은 "주유의 화공 전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환계(連環計)"이다.

이후 "노숙""방통""손권"에게 천거하지만, "손권""방통"의 용모를 보고, 탐탁치 않게 여겨, 용하지 않는다. "유비" 역시 용모가 마음에 들지 않자, 작은 고을 "뇌양 현령"으로 임명하고 만다 이후 뛰어난 능력으로 "유비"의 신임을 얻은 "방통""유비""익주"를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비""익주" 공격을 주저하고 있을 때, "유비"의 결단을 이끌어냈음은 물론, 치밀한 전략으로 연전연승했다. "유비""익주"를 공격하러 나서면서, "방통황충위연" 등 새로 얻은 인물들과 함께 간다 "제갈량관우장비조자룡" 등에게는 "형주"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한다

"낙성"으로 향하던 차에, "마량 편"으로 "천문의 징조가 좋지 않다""제갈량"의 서신이 도착한다 "방통"은 자신이 혼자 큰 공을 세울까 시기한 "제갈량"이 말을 지어낸 것이라며, "간과 뇌가 널브러져 죽더라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간뇌도지肝腦塗地 "방통위연"은 좁은 길로, "유비황충"은 넓은 길로 나누어 진격하기로 한다 각자 떨어져 출발하는데 타고 있던 말이 나아가지 않아 낙마한다. "유비"가 자신의 백마와 바꿔준다 마침 "낙봉파(落鳳坡)"에 매복하고 있던 "장임 부대"의 집중 사격을 맞고 전사한다.

"유비"로서는 "형주"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만, "익주"를 차지하기 위한 중요한 전쟁에 새로 얻은 부하들만 데리고 임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중요한 원정을 떠날 때, 대부분의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떠나고, 소수의 부하들로 본거지를 지키게 하는 "조조"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유비"의 이러한 조치가 "방통"으로 하여금, "제갈량"과의 경쟁심, 그리고 반드시 공을 세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의욕을 가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방통"이 죽지 않았다면, 후방의 내치를 "제갈량"이 맡고, 군사작전을 "방통"이 맡아 "유비"의 세력이 더욱 커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방통"의 비운은 분명히 "유비"의 비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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