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이 멸망한 후, 3국 중 하나로 3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중국" 대륙이 3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 (위 (魏)ㆍ조위 (曹魏)ㆍ220~ 265ㆍ45년))"가 국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 (曹操ㆍ155~220ㆍ65세ㆍ자 : 맹덕(孟德))"는 3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1. 진행 과정
① 184~ 192년 : 황건의 난 + 도원결의
황건의 난 (후한 말ㆍ태평도(사이비종교- 도교 일파)ㆍ장각)ㆍ태평도를 중심으로 황건(노란 두건)쓰고 반란→ 반란 진압군 등장ㆍ황건적 토벌을 위해 손잡기→ 도원결의 (유비ㆍ관우ㆍ장비)
< 조조의 등장 >
십상시의 난(189, 10명 내시 중심)→ 영제(한나라 말 황제)가 죽고, 십상시에게 대장군 하진(영제의 외척세력)이 사망→ 부하(조조ㆍ원소)가 환관을 제거→ 부하(조조ㆍ원소)는 낙양(수도)에서 도망→ 권력 공백 발생ㆍ공백기에 동탁 등장→ 국경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던 동탁이 낙양으로 입성해서, 승상(국무총리)에 등장→ 자신이 모시던 소제(황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새 황제로 앉히고, 꼭두각시로 이용→ 동탁이 나쁘다→ 반동탁 연합군 결성(조조ㆍ유비ㆍ공손찬ㆍ원소ㆍ원술ㆍ손견)→그런데 흐지부지→ 전국 각지로 해산→ 동탁이 암살되면서,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
② 192~ 207년 (15년): 군웅할거의 시대 : "군"사를 이끄는 영"웅"들이 "나눠져" "거"병을 했다.
192 : 동탁 사망ㆍ북쪽에서 아래로, 공손찬→ 원소(원술의 형ㆍ얼자)→ 조조 / 원소 옆으로, 이각ㆍ곽사, 도겸ㆍ유비ㆍ손견ㆍ유표가 등장
조조 : 중원지역을 통일하는 멋진 역할ㆍ15년 동안 : 조조 : 이각ㆍ곽사ㆍ원소ㆍ원술ㆍ도겸ㆍ원술 제거ㆍ유비도 이기고, 중원 장악 / 유비 :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제대로 이기지 못하고, 방랑하는 불쌍함. 북쪽에서 시작→ 중원지역 방랑→ 남쪽(형주)로 도망
③ 207~ 215년 (8년): 통일이냐? 분열이냐?
조조 : 영웅들 제거→ 중국 통일을 목전에 둠→ 통일을 못하고, 삼국시대로 감
208년 : 적벽대전→ 책사 제갈량 등장(삼고초려ㆍ천하삼분지계)→ 조조가 패배, 줄행랑 / 조조(중원지역 통일)ㆍ유비(전국 유랑)ㆍ손권(손견 차남)→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해서, 조조와 싸워 이겨서, 그 지역을 유비가 점령→ 서남지방으로 입촉, 동남쪽은 손권
④ 215~ 223년 (8년): 삼국이 정립되는 시기, 세대 교체기
216 : 조조가 위나라 왕을 칭함ㆍ유비가 열이 받아, 한중(조조 영토)을 공격→ 한중공방전(2년 공방)→ 유비가 승리ㆍ고사 성어 : 계륵 (먹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그렇다.)ㆍ한중이 중요하긴 한데, 방어하기도 어렵다. 양수(조조 장수)가 묻자, 조조가 "계륵이다"고 대답.
219 : 유비가 한중왕(한중에 있는 왕)이라고 선언→ 219~220 : (형주공방전) 손권이 오ㆍ촉의 경계지역인 형주를 먹기 위해, 촉나라 공격→ 220 : 관우 사망ㆍ조조 사망ㆍ화가 난 유비가 손권을 치기로 함→ 221년, 손권을 치기 전에, 장비가 부하에게 암살당함→ 유비가 손권의 육손(오나라 어린 유생)에게 대패(이릉대전)ㆍ형주가 넘어가고, 촉나라는 찌끄러 짐→ 223년, 유비 사망 (백제성에서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김)ㆍ234년, 제갈량 사망
⑤ 223~ 234년 (11년): 제갈량
유비 사후에, 제갈량이 촉나라를 이끌고 감→ 조비(조조 아들)ㆍ제갈량 유선(유비 아들) 등장
225 : 오나라와 동맹 후, 남쪽지역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 토벌ㆍ제갈량의 남정(남쪽 정벌): 맹획(남만왕) 등장, 맹획을 7번 잡고, 7번 풀어준다(칠종칠금)ㆍ제갈량은 맹획을 풀어주려고 했다. 맹획은 떠나지 않으며 "공은 천위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들은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며 충성을 맹세하고, 귀순하였다.
227 : 출사표 (6번의 북벌을 시행→ 실패) 유선에게 "촉나라에 짱 박히지 않고, 위나라 치러갈게요"→ 234 : 오장원에서 싸우다가, 제갈량 사망
⑥ 280년 (46년 후): 진나라 통일기 (사마의)
제갈량의 북벌을 방어한 사람 : 사마의(179~251)→ 249 : 위나라에서 많은 견제를 받다가, 70세에 반란(고평릉 사변)→ 정권장악ㆍ이때부터 사마 씨가 전국을 주도→ 사마의 아들 2명(사마사ㆍ사마소)ㆍ1째 아들 : 사마사가, 정권을 물려받고, 얼마 있다가 사망ㆍ2째 아들 : 사마소가 정권 장악
263 : 사마염(사마소 아들)이 촉나라 멸망시킴→ 265 : 사마염이 위나라 멸망시킴→ 진나라(서진) 건국→ 280 : 오나라 멸망 (삼국통일)→ 317 : 서진 (西晉, 265~ 317) 멸망
291~ 306 : 팔왕의 난(八王-亂) 중국 서진의 내란으로, 서진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ㆍ서진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 내란을 주동한 주요 황족 제후 왕이 8명ㆍ오랜 혼란의 결과, 서진의 통치기반은 급격히 악화하여, 흉노족 침입(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멸망하였다.
2. 주요 사건
① 도원결의 (桃園結義)
"한나라" 말기, "한실"의 후손인 "유비"는 "누상촌"에서 "돗자리"를 만들며, 생활하고 있다가, "황건적의 습격"을 받는다. "유비"는 "관우ㆍ장비" 등과 함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여, "의형제"를 맺는다. "유비 삼형제"는 "유주 지방"을 습격한 "황건적"을 무찌르고, 싸움에서 패하여 도주하던 "동탁"을 구해 주지만, 관리가 아니라 "의병"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한다.
한편 "한나라" 왕실에서는 황제가 사망하고, "동태후ㆍ하태후"는 권력싸움을 한다. 결국 "하태후"의 동생인 "대장군 하진"이 "동태후"를 암살하여 권력을 손에 넣지만, 그 역시 "십상시"의 계략에 빠져서 목숨을 잃는다. 이틈을 노린 "동탁"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에 진주하여 "황제"를 인질로 잡고, 자신은 "승상"이 된다. 여기에 반기를 든, "조조ㆍ공손찬ㆍ손견" 등은 연합하여, "동탁"을 토벌하러 출정한다. 이러한 혼란한 정국에서 "유비 삼형제"는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
② 관우의 죽음
219년 가을, 오의 여몽이 형주를 습격하여 점령했다. 당시 촉ㆍ오는 서로 연합하여 위에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17년 오가 위에게 항복하고, 오의 친유비파인 노숙이 죽으면서, 촉ㆍ오의 동맹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병권을 장악한 반유비파 여몽이 형주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자, 위에 충성을 보여야 했던 손권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하여 형주 탈환을 시도했지만, 오의 기습으로 형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맥성(麥城)으로 퇴각했다. 손권은 강릉에 이르러 관우에게 투항을 권고했으나 관우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수하 장병들이 모두 도망치자 관우는 어쩔 수 없이 맥성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오 군대는 관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맥성 북쪽의 임저(臨沮)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생포하여 여몽에게 호송했다. 관우 부자는 참수되었고 관우의 머리는 함에 담겨 손권에게 보내졌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는다. 손권은 관우를 벤 것에 대한 유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③ 장비의 죽음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유비가 늘 이것을 경계하였으나, 장비는 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유비가 늘 장비에게 형벌이 가혹하니 이를 고치라고 충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강ㆍ 장달의 살인은 가혹행위로 인한 상관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설정을 창작해서, 관우의 죽음에 슬픔에 빠진 장비가 오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조의의 표시로 쓸, 흰색 갑옷ㆍ흰색 기를 사흘 안에 준비하라 했는데 부장인 범강ㆍ장달이 이는 불가하니 말미를 더 달라 하자 둘을 흠씬 패고는 말미를 내일까지로 줄이니, 장비가 자기 형만 생각하고 일을 그르칠 사람이고, 어차피 못하면 둘 다 장비에게 사형당한다고 생각하고, 이 둘이 잠자고 있던 장비를 살해했다고 각색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손권이 심어놓은 자객이자 스파이로서 이릉대전이 벌어질 조짐을 느낀 손권이 지시하여 가혹행위를 구실삼아 암살을 하고 도주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한다. 장비의 죽음은 유비에게 있어서 이릉대전의 대패에 또 다른 커다란 이유라는 의견이 있다.
3. 3대 전투
① 200.02~ 10월 : 관도 대전 (官渡大戰)
화북의 관도(현, 하남성 중모)에서 조조와 원소가 벌인 전투→ 조조군의 승리→ 조조가 중원 전체를 장악, 한나라 말기와 삼국시대의 패자가 되는 전쟁
② 208.11월 : 적벽 대전 (赤壁大戰)
장강(양쯔강) 적벽에서 통일을 위해 세력을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과 유비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 손권ㆍ유비 연합군의 승리로 조조의 남정 저지→ 조조가 통일을 목전에 뒀지만, 결국 삼국으로 가게 되는 원인을 제공ㆍ거지생활을 하던 유비가 이제 제대로 된 군주로, 영토를 가지고 활약한 시기
③ 221.07~ 222.08월 : 이릉 대전 (夷陵大戰)
유비(촉한 황제)가 의형제인 관우ㆍ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오나라(손권)을 침공→ 촉한군의 대패ㆍ유비는 육손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4. 위 (魏)ㆍ촉 (蜀)ㆍ오 (吳)
① 위 (魏) : 조조 (조위(曹魏)ㆍ220~ 265ㆍ45년)
"후한"이 멸망한 후, 3국 중 하나로 3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중국" 대륙이 3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가 국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3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당대의 숙적 "원소"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손자인 "사마염(司馬炎ㆍ서진(西晉))"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② 촉한 (蜀漢) : 유비 (계한 (季漢)ㆍ221~ 263ㆍ42년)
"유비"가 지금의 "사천성" 지역에 세운 나라로 정식 국호는 "한(大漢)"이나 역사상 구분을 위하여 "촉한"이라고 부른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으로도 부른다. 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가 "헌제"를 내쫓고 "조위"를 건국하자, 당시 "익주"를 점거하고 있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221년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고, 수도는 "성도(成都)"이다. "유비"는 자신의 의동생인 "관우"를 죽인 "오"를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릉"에서 "육손"의 계책에 크게 패하면서 "백제성"에 눌러앉게 되고, 결국 사망하였다.
"유비" 사후, 아들 "유선"이 즉위하였다. 승상 "제갈량"은 "남만"을 토벌해, "맹획"을 7번 사로잡고 놓아주었는데, 이에 "맹획"이 항복하고 "남만"은 평정되었다. 또 "제갈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이 때 올려 진 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하지만 "진지ㆍ황호"와 같은 간신의 전횡과 연이은 북벌 실패로 인해, "촉한 궁중"의 정치를 제대로 처리할 사람이 없고, 많은 힘이 소모되어, 점점 쇠망의 길을 걸었으며, 특히 "황호"가 정권을 장악한 "경요ㆍ염흥 연간"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③ 오 (吳) : 손권 (동오(東吳)ㆍ손오(孫吳)ㆍ229~ 280ㆍ51년)
"후한"이 멸망한 후,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3국(위ㆍ촉ㆍ오)"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다. "손견(孫堅)ㆍ손책(孫策ㆍ1남)"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孫權ㆍ2남ㆍ오나라의 초대 황제)"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손권 : 강동의 맹주인 형 "손책"이 급사하자, 어린 나이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을 다스렸다. "조조ㆍ유비"의 침공을 방어하여 3국정립에 기여하였으며, "수성(守成)의 명수"로 널리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말년의 거듭된 실책으로 "오나라 패망"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오"는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재를 갖추었으며, 잦은 군사적 진출 시도에서는 미흡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외부의 침공에 대해서는 "장강" 등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성공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또한 상황에 따라, "위(魏)ㆍ촉한(蜀漢)"과 화평을 맺는 유연한 "외교술"을 펼쳤다. 그러나 "손권" 사후 계속되는 권력 다툼과 내분으로 힘이 약화되었고, 결국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가 "서진(西晉)의 사마염(司馬炎)"에게 항복함으로써, 3국 시대는 끝을 맺는다. 한편, "오나라" 건국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어, 이른바 "6조 시대"가 열려, 중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화북"에서 "강남"으로 점차 옮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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