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폭 3대 패밀리는 "양은이파 (조양은ㆍ1950~ ㆍ전남 광주)ㆍ범서방파 (김태촌ㆍ1948~2013ㆍ65세ㆍ최양석ㆍ전남 담양)ㆍOB파 (이동재ㆍ1951~ ㆍ전남 광주)"이다.
1. 조폭 3대 패밀리
• 조양은 (1950~ ㆍ전남 광주) : 양은이파 두목ㆍ개신교 (장로회)
• 김태촌 (1948~2013ㆍ65세ㆍ최양석ㆍ전남 담양) : 범서방파 두목 (전남 광주)ㆍ개신교 (장로회)
• 이동재 (1951~ ㆍ전남 광주) : OB파 두목 (전남 광주 조직)
2. 조양은 (1950~ ㆍ전남 광주) : 양은이파 두목ㆍ개신교(장로회)
"광주"에서 태어나, 10대 후반부터 폭력 조직에서 활동해 왔고, 18세 때 "화신 8인조"라는 폭력 조직을 결성해 "서울"로 상경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폭력조직 "양은이파"를 이끌며, "김태촌(범서방파)ㆍ 이동재(OB파)"와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평생에 걸쳐 수차례 교도소 수감 ㆍ출소를 반복하였다.
2004년, 한세대학교 총회신학대학원(경기도 군포시 당정동)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수감 중이던 1994년(44세), 김소연(27세ㆍ영어강사)와 옥중 연애를 하고, 출소 직후(1995년) 결혼한다. 결혼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했고, 주례는 "조용기 목사"가 진행했고, "이명박ㆍ김용건ㆍ김수미ㆍ현석ㆍ김정수"가 화환을 보냈고, 2,000여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옥중중매를 서준 이는 "조일환(조폭)"인데, 자신의 지인인 조양은의 장모에게 "조양은"의 정체를 "전두환에게 찍혀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민주화 투사"라고 속였고, 장모가 거기에 낚였다고 한다.
"김소연"은 조양은이 출소할 때까지 조폭인 줄 몰랐고,얼마 뒤에 조폭부하들이 인사하러 찾아왔을 때 알았다고 한다. 출소 이후, 조폭활동을 미화하기 시작하는데, 1995.06월 자서전 "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빛"을 시작으로 1996에는 20대에 서울로 와서 개판치던 사실을 미화한 "영화 보스"를 만들고, 직접 출연한다. 주연들로는 친한 사이인 독고영재ㆍ박근형도 출연하고, 마지막에 조용기 목사가 실명 출연, 당연히 조양은을 주님의 길로 인도하는 목회자로 나온다.
출소 후, "신앙인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하며, "개신교(장로회) 목사"로 활동하였으나, 1996년ㆍ2001년에 다시 구속되었다. 2004~2007년까지 음식점을 운영하다 폐업하였다.
• 1975.01.01일 : 사보이호텔(서울 명동) 기습사건
• 1976.04 : 아시아호텔(서울 태평로)에서 "범서방파(김태촌)ㆍ양은이파(조양은)"이 집단 난투극을 벌임 → 1977.10 : 광주를 찾은 그를 상대파인 "K 씨(OB파 조직 일원)"가 "광주관광호텔"로 끌고 갔다. 결국, 반대 조직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검거ㆍ압송되었다.
• 1978.11 : 출소 후, "서울ㆍ광주ㆍ대전ㆍ순천" 등 각 지방지역의 조직을 규합. 전국적 규모의 조직인 "양은이파"를 발족 → 1980.02 : 조양은(양은이파 두목) 검거. "수도경비사령부"를 거쳐, "육군본부"로 압송
• 1988.09.14일 : 서울의 한 식당에서 "양은이파ㆍ서방파가" 함께, "이동재(OB파 두목)"을 급습하여, "이동재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동재"는 미국으로 출국. 조직폭력배 생활을 은퇴 → 1989.08~ 1995.03 : 수감
• 1995.04월 : 중국 히로뽕 밀매조직인 "위해파" 의 부탁을 받고, 10kg대의 히로뽕(100억 원대)을 국내에 반입을 시도하려다 실패 → 1996.08~ 1998.08 : 수감
3. 김태촌 (1948~2013ㆍ65세ㆍ최양석ㆍ전남 담양) : 범서방파 두목 (전남 광주 조직)ㆍ개신교 (장로회)
"전남 담양군" 출신으로, 9남매 중 5째로 출생했다. 전과 관련으로 인하여 병역 면제되었다. "광산군 서방면" 일대에서 자라, 20살도 되기 전에 3차례나 소년원을 들락날락거렸다. 1975년, "전남 광주" 폭력조직인 "범서방파 행동대장"을 시작으로 폭력세계에 발을 들인 그는 "정치깡패"로도 활약했다. 1976년, "이철승(국회의원)"의 명령으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사건"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영삼(신민당 신임 대표)"를 습격했으나, "김영삼"은 창문으로 뛰어내려 겨우 도주했다.
1977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군소 조직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1987년, "인천 뉴 송도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황 씨" 살인교사 혐의로 "징역 5년ㆍ보호 감호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1989년 "폐암 진단"을 받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또한 1990년 범죄단체 "신우회" 구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데 이어, 1997년 이전의 공문서 위조교사 등의 혐의가 발각돼, 징역 1년 6월의 형이 추가돼 형량이 모두 "징역 16년 6월ㆍ보호 감호 7년"으로 늘어났다.
2005년, "폐암 말기" 상태였으나, 전이가 안 돼 한쪽 폐를 절개하여 남은 생애를 1개의 폐만으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절개 수술은 성공해서 살아났다.
2006.04월, "일본 팬 사인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권상우(탤런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인회를 강요한 혐의"로도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권상우"는 "김태촌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김태촌으로부터 강요를 받았다"는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태촌"은 2006년 구속 이후, "당뇨ㆍ저혈압ㆍ협심증" 등으로 수차례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하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2년 여 만에 형기를 모두 마쳤다.
2011년, 한 기업가의 빚을 대신 받는 과정에서 협박 혐의로 경찰의 수사대상이 되자 "최양석"이라는 가명으로 "서울대병원"에 위장 입원했다. 그는 입원한 이후, 2012.03월에 생명이 위독해지자, 병원 측은 신속한 치료를 위해 그의 부하들을 병실 밖으로 내보내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부하들이 간호사를 폭행했다. 해당 간호사는 공포에 질려 한동안 출근을 하지 못했다. 2013.01.05일 오전 0:42분, "서울대병원"에서 "급성 패혈증"으로 64세로 사망하자, 그 장례식에는 조직폭력배 500여 명이 조문을 오는 바람에 경찰에서는 비상대기 상황이 되었지만, 장례식은 아무 일 없이 치러졌다.
4. 이동재 (1951~ ㆍ전남 광주) : OB파 두목(전남 광주 조직)
"이동재"는 "광주 OB파"로 지역을 장악한 뒤, 조직을 이끌고 상경, 일약 전국구 주먹으로 올라선 인물로, 당시 같은 또래의 "조양은(양은이파)ㆍ김태촌(서방파)"와 더불어 치열한 3파전을 벌였다. 이들 "3대 패밀리"가 벌인 1980년대 중후반의 이른바 "3년 전쟁"은 당시 "조폭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양은이파ㆍ서방파"가 "용호상박"으로 옥신각신하며, 서울 주먹세계를 분할 점령할 즈음, 신흥 세력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바로 "이동재"가 보스로 있는 "OB파"다. "양은이파ㆍ서방파"와 함께, 1970년대부터 암흑세계를 주름잡은 "조폭 3대 패밀리"로 떠올랐다.
그때 막 출소한 "김태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와 보니 이동재가 이끄는 OB파 천하였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이동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지요. 호남 선배들도 이동재를 보스로 인정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이동재를 잡으러 다니다가 경찰에 쫓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동재"는 "조양은"과 "지하세계 입문" 동기가 각별하다. "자유당"시절, "광주"시내를 무대로 각각 "동아파(조양은 측)ㆍ대호파(이동재 측)"가 결성됐는데, 양 계파 간 주도권 싸움에서 "동아파"가 밀렸다. 이에 "동아파" 부두목은 부하인 "조양은"을 데리고 상경한다. "광주"에 남은 "대호파"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 "OB파"다.
이후 "OB파"는 "구 OB파ㆍ신 OB파"로 분파, "이동재"는 "신 OB파" 부두목을 맡는다. 1978년, "이동재"는 "행동대장"에게 두목을 살해하도록 지시했으나, 실패했다. 2인자의 반란이었다. 두목은 여러 차례 칼을 맞고도 살아난 것으로 알려진다. 쿠데타 실패 후, "이동재"는 자신을 따르는 패거리들을 이끌고 상경해 "서울"에서 "OB파"를 재결성했다.
이때 "김태촌"은 구속 상태라 "이동재"의 상대는 먼저 상경한 "조양은"이었다. 이들은 물고 물리는 피 튀기는 "전쟁"을 벌였다. 1987.11월, "OB파- 양은이파" 관계에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난다. "양은이파 행동대원"이 "OB파 조직원"을 경찰에 밀고한 것. 이에 격분한 "OB파"는 보복을 선언한다. 1987.11월, "온천안마시술소(서울 반포동)" 주변에서 "양은이파" 간부 2명을 칼로 난자해 중상을 입힌다.
"양은이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표적은 "이동재"였다.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았다. 두 조직을 예의주시하던 "검ㆍ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양은이파"는 방계조직인 "순천시민 파"를 내세웠다.
1988.09월, 서울올림픽 무드가 한창이던 시기에 "순천시민 파" 조직원들은 "전주식당(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이동재"를 기습, 다리를 집중적으로 "칼ㆍ도끼" 등으로 온몸을 난자해, "이동재"의 다리를 불구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조폭 보스"의 비참한 말로였다. 이는 "이동재"가 주먹세계를 떠나는 계기가 됐다. "이동재"는 치료 후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 주거조차 불분명하다. 가장 유력한 얘기는 "미국 망명설"이다.
항간에선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몇 년 전부터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동재"가 이끌던 "OB파 부두목ㆍ행동대장ㆍ조직원들"은 "광주"로 낙향해, 다시 "무등산 파"를 결성, 가끔씩 언론지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동재"의 조직 재건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씨는 미국의 남서부에서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양은(양은이파)ㆍ김태촌(서방파)"가 잦은 수감생활ㆍ출소 등으로 끊임없이 화제를 일으킨데 비해 "이동재"는 해외로 도피한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얼굴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언론과의 접촉도 일절 없었고, 심지어는 경찰 내에서도 이제 그의 이름과 얼굴이 서서히 잊혀질 정도이다. 미국에서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국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지인은 "(동재가) 미국에 건너간 이후 슈퍼마켓 등의 사업을 했는데 별로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의 부모님이 집 팔아서 미국에 보태주기도 한 것으로 들었는데 사업이 어려워서 국내로 다시 돌아올 것을 검토한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밝혔다.
"이동재는 광주에서 상경할 때에도 조직의 선배에게 린치를 가하는 등 하극상을 저질렀다. 김태촌은 선배를 어느 정도 적당히 대접하는 스타일이고, 조양은은 선배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면, 이동재는 걸리적거리면 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김태촌 주변에는 여전히 선배가 많은데 비해, 조양은과 이동재는 없다"고 평했다.
"이제 이동재ㆍ조양은ㆍ김태촌 등은 모두 나이 쉰 살을 훌쩍 넘겼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조직도 없고 돈도 별로 없다. 또 예전의 그런 완력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다. 그들을 목숨처럼 따르던 조직원들도 다들 40대 이상으로 자기 살 길 찾기에 바쁘다. 3대 패밀리의 부활이니 하는 것은 공연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일각에서는 과거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조양은"과의 만남설도 나돌았다. 기자가 직접 "조양은"에게 이를 확인했으나, "난 이동재라는 사람을 못 본 지가 25년이 됐다"며, 부인했다. 그는 "그가 얼마 전 한국에 다녀갔다는 얘기는 들었다. 또 자주 한국을 오간다고는 하더라. 하지만 그 사람이 날 만날 이유가 없다. 나 또한 그를 만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외부에 그나마 목소리를 낸 것은 "조폭 관련 소설"을 준비하던 한 작가와의 전화통화가 유일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경, "이기호(조폭전문 소설작가)"가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미국에 있는 "이동재"와 1차례 전화통화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약 3분간의 걸친 짧은 통화에서 그는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한국은 때가 되면 돌아가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과거에 대해, "이제는 모두 잊은 얘기들이다. 동생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한때 추억이지만, 지금은 서로가 살아가기도 바쁘다. 한국에서나 여기나 사는 것은 똑같다. 한국에서도 나는 결코 편하지 않았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고 전했다.
5. 이강환 (1943~ ㆍ부산) : 칠성파 두목(부산 최대 폭력조직) 16년 옥고(3차례)
"요정"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그는 소아마비를 겪어, 한쪽 팔에 이상이 있는 등 몸이 불편했다. 체구도 작고 마른 편이라, 친구들에게 자주 구타를 당했던 그에게 어머니는 "왜 맞고 다니냐?"며 야단을 쳤고, 아들이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다 해주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차츰 배포를 키우고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하여 성장 후 "조직폭력배"가 되었다.
6. 칠성파 : 2001년도 영화 "친구 (곽경택 감독)"의 모티브
부산시를 기반으로 하는 대형 폭력 조직. 핵심조직원이 150명, 전체조직원은 약 500명이라고 한다. 1950년대, "세븐스타"라는 피난민 건달들에서 시작된 "칠성파"는 "부산 칠성다방" 주변에서 거점을 삼아 "칠성파"란 이름이 붙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1년도 영화 "친구 (곽경택 감독)"가 "부산 칠성파ㆍ20세기 파"의 실제 구도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서 더 유명해졌다.
부산 군소 조직을 흡수해, 조직을 "프랜차이즈화"해서 구역별로 "완월동 칠성ㆍ온천장 칠성ㆍ서동 칠성ㆍ기장 칠성" 등으로 부르며, 지부 조직을 만든다고 한다. 조직의 규모를 키우면서도 한꺼번에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완월동 칠성파"가 일명 "본가 칠성"으로 불리는 핵심 조직이다.
초대 두목이었던 "황홍(이강환 손윗동서?)"이 2대 두목 "이경섭"에게 물려주고, "이경섭(이경협?)"이 "세븐스타"를 확대개편해서 "칠성파"를 창건하게 된다. 초대 두목 "이경섭"이 1970년대 초, "이강환 (2대)"에게 조직을 물려주었다.
1970년대 말, 그의 지도력 하에 "칠성파"는 "20세기파ㆍ역전파ㆍ서면파"의 일부 세력을 흡수해 1980년대 중반에는 "부산 암흑가"를 거의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칠성파"는 "완월동"을 비롯한 부산 유흥업소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일부 조직원들은 "서울"에 진출했다.
1970년대, "이황순(2017년도 영화 "마약왕 (우민호 감독)" 속 이두삼)"과 손잡고 마약 사업에 뛰어든 걸로 알려져 있으며 , 결국 1980년에 "필로폰 제조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2011년경 "한홍신(3대)"가 두목이 됐는데, "칠성파 정통"이 아니라 조직 내에 갈등이 있다고 한다. 이후 "한홍신"이 구속되자 "권 모"씨가 실질적인 두목으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 "이강환ㆍ오사카의 재일교포 야쿠자 사카우메구미의 가네야마 고사부로"가 "교다이 사카즈키(형제 배)"를 맺었다. 그러나 "가네야마"가 축하금 명목으로 준 1억 엔을 조직을 위해 쓰지 않고, 유용하는 바람에 불만이 쌓인 "김영찬 (부두목급)"이 "신 칠성파"를, "천달남 (부두목)"이 "영도파"를 만들어 "칠성파"에서 갈라져 나오게 된다.
이후 "영도파"는 독자 생존하는데 성공했지만, "신 칠성파"는 조직원들이 다시 "칠성파"의 회유로 원대복귀하거나 뿔뿔이 흩어지자, 결국 "칠성파"로 다시 합치기로 결의, 1999년경 "칠성파"로 다시 흡수되었다. "김영찬(신 칠성파)"는 거리에서 칼까지 맞고, 전치 12주의 중상을 당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결국 "이강환"과 화해하고 은퇴했다.
이후 부산에서 "칠성파" 및 계열 조직들과 "반 칠성파"의 갈등이 심각해 종종 전쟁이 터졌다. 2006년 벌어진 "부산 영락공원" 난동 사태도 그 일환이다. 2007년경, "이강환" 후계자로 거론되던 "공 모 씨"가 내시경 검사를 하다가 의료사고로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칠성파" 후계구도가 복잡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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