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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건

사건- 94.10 : 성수대교 붕괴 사고ㆍ사망(32명)

by 당대 제일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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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1994.10.21일, 서울 한강에 위치한 다리인 "성수대교 (강남구 압구정동~ 성동구 성수동 사이)"에서 "상부 트러스"가 무너졌던 사고이다. (1979.10월 준공 후, 15년 경과)  "상판"이 붕괴되어, "버스- 1대ㆍ승용차- 4대ㆍ승합차- 1대"가 추락해, 32명 사망하였다.

 

1. 성수대교 (聖水大橋)  붕괴 사고

오전 07:38분경, "제5ㆍ6번 교각사이 상부 트러스 약 50m"가 붕괴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부분을 달리던 "승용차 2대ㆍ승합차 1대"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지나가던 "16번 시내버스(한성운수 소속)"은 통과 도중 뒷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 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한 후, 떨어진 상판에 박혀 찌그러지는 바람에 등교 길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사고를 당하였다.

 일 시 : 1994.10.21 07:48분        위 치 : 서울 성동구        참 여 : 동아건설서울시        원 인 : 부실공사

 피 해 : 사망- 32부상- 17 ( : 49명  한국인 31필리핀인 1 16 16)

• (구) 성수대교 : - 19.4m (4차선)연장 : 1,161m        설계하중 : 총 중량- 32.4 톤        준 공 : 1977.04~ 1979.10(26)        시 공 : 동아건설

• (신) 성수대교 : - 35.0m (8차선)연장 : 1,161m        설계하중 : 총 중량- 43.2 톤        준 공 : 1995.04~ 1997.06(22)        시 공 : 현대건설

성수대교

사망자 중, "무학여고 8무학여중 1서울교대 여대생 1아델 아이다(필리핀 인)" 등이 포함 되어 있었으며, 이 중 "서울교대 여대생"의 경우, 사망 후 장기를 "의대생 실습용"으로 기증하였다사고 당일 오후 7, 사고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고, "우명규 시장"을 거쳐, 11.03 "최병렬"이 시장으로 부임했다또한 개원 중이던 "국회"가 일체 중지되었고, 24 "김영삼 대통령"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전국 TV를 통해 발표하고, 국민에게 사과하였다.

붕괴 이후, "토목학계"는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1995.04.26, "현대건설"이 재건설을 시작하여, 1997.07.03일에 재개통되었다.

2. 제 원ㆍ하자담보 책임기간 (2007.12.28. 개정)

10 : 기둥사이의 거리가 50m 이상이거나, 길이가 500m 이상인 교량의 철근콘크리트 또는 철골구조부

한강다리 최초로 "120m 장경 간"으로 건설되었으며, "게르버 트러스 교"로 교하공간이 넓다는 특징이 있다. "성수대교"는 구조물의 외관에 대한 고려와 심의가 이루어진 최초의 교량이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하늘색 색상을 채택했고, "트러스 교"라는 공법을 채택하여, 미관에 있어는 매우 뛰어났으나, 후에 "당산철교" 역시 "성수대교"와 같은 구조였으나, 이 역시 철거되고 재시공되는 과정을 거쳤다.

3. 붕괴 원인

① 점검 부실

건설될 당시, "트러스 식" 다리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트러스 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 시공인 "이음새 핀" 등의 세부 요소들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이러한 "안전점검"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

② 내부 결함

건설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 공사 도중, "볼트 삽입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볼트"를 무리하게 집어넣다가, "구멍 모양"이 변형되어, "볼트"의 강도가 약해졌다.

③ 과적차량의 통과

붕괴 전, 설계 하중은 "DB-18(총중량 32.4t)"이었지만, 이를 초과하는 과적 차량들이 자주 통과하였다. 이로써 "40t"이 넘는 차량들의 압력을 받았기에 붕괴는 예견되어 있었다. 특히, 붕괴되기 전 해였던 1993년 "서울 동부간선도로(성수대교~ 의정부 구간)"이 개통되면서, 교통량은 더욱 폭증했으나, 서울시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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