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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건

사건- 87.06 : 6월 민주항쟁ㆍ6ㆍ10 민주항쟁

by 당대 제일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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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6ㆍ10 민주항쟁ㆍ6월 민주화운동ㆍ6월 민중항쟁)"은 1987.06.10~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ㆍ민주화" 운동이다. "4ㆍ13 호헌조치ㆍ박종철 고문치사사건ㆍ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06.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06.29일 "노태우의 수습 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1987.12.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 6월 항쟁 (六月抗爭610 민주항쟁6월 민주화운동6월 민중항쟁)

일 시 : 1987.06.10~ 06.29 (20일간)       장 소 : 한국 전역      목 적 : 전두환 호헌조치 철폐직선제 개헌 요구

결 과 : 629선언대통령 직선제5년 단임제로 개헌6공화국 수립 기반 마련     참여 인원 : 시위대 300~500만 명 추정

시위자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ㆍ통일민주당신한민주당

2. 원 인

1987.04.13 -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 (일종의 "특별 선언")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  1985, "212총선"이후, "야당재야세력""간선제"로 선출된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도덕성정통성 결여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주장.

1986.02, "각계각층"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중점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투쟁"이 확산.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의원내각제", "야당""대통령 직선제"를 주장.  1987.01.1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거세지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논의"가 활발해지자,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413 호헌 조치"단행

1986.06.06 : 권인숙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권인숙 (22서울대 의류학과 4)

"부천경찰서(, 부천소사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文貴童)"이 조사과정에서 대학생 "권인숙"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ㆍ1986.06.04, 친지의 이름을 빌려서, 1985.04월경, "경기도 부천시""가스배출기 업체(주식회사 성신)""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써서 "위장 취업"했으며, "위장 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부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1987.01.14 - 박종철 물고문 치사사건- 박종철(22서울대 언어학과 3학생회장)

"용산구 남영동(갈월동)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폭행으로 사망한 사건ㆍ"박종운(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관련 수배자)""소재 파악"을 위해,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 체포고문폭행하여 사망케 했으며,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폭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임사제 : 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1987.06.09 -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이한열(20세대 경영학과 2만화사랑(동아리)회원)

1987.06.10,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1일 앞두고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 그의 죽음은 "6월 항쟁629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부 "전경""시위 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1987.06.09,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 맞아 1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07.05 20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3. "6월 항쟁"의 의의

"6월 항쟁"이 일어난 06.10일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순종(純宗ㆍ조선 마지막 임금)의 장례" 때, "독립운동세력ㆍ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6월 항쟁"이 진행되던 06.19일 오전 10:30분 "전두환"은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같은 날 오후 4:30분 "비상조치 계획ㆍ군 출동" 지시는 유보됐다.

"6월 항쟁"은 "군사 독재정치"가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노태우 정권"의 출범으로 귀결돼, "군사주의"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ㆍ사회ㆍ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ㆍ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노동자ㆍ학생ㆍ시민ㆍ빈민ㆍ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 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노조"를 통해 조직화되어 나타난 "7월ㆍ8월ㆍ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되었다.

4. 시위 진행 : 1987.06.10~ 06.29 (20일간)

① 06.10일

1987.06.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ㆍ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오후 6시를 기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 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내리어, "택시운전수"들의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여고생"들은 "민중항쟁 참여자"에게 마실 물ㆍ도시락을 가져다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ㆍ지원을 하여 서울도심에서 "민중항쟁"이 진행될 수 있었고, 특히 "명동성당 농성" 당시, 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 물ㆍ도시락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성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② 06.11일

"재야ㆍ시민단체"의 시위가 터지자, "치안당국"은 전날 있었던 야권의 집회는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하였고, "앞으로도 법질서 파괴 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 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권복경(치안본부장)"은 야권의 집회와 관련한 발표를 통해서, 주최 측이 비폭력집회를 열겠다고 공언하고도 전국에 걸쳐, 폭력적 난동사태를 유발한 것은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했다. 이 날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1주일 째 시위를 계속했고, "남대문시장" 등 "명동" 외곽지대에서조차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③ 06.12일

06.10일, 대회 끝에 "명동성당"에 들어간 "시위 농성자"들은 3일 째 시위농성을 벌였고, 서울 도심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터졌다. 그러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명동성당"을 점거한 뒤, 시위를 벌여온 농성자들은 당초 600여 명에서 350여 명으로 숫자가 줄어들었으나, 경찰의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 시위 농성자들은 11일과는 달리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극렬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풀지 않고 계속 경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시위의 규모는 커졌다. 오후 1시쯤, "코스모스 백화점" 앞에서, 오후 5시 무렵부터는 각 대학에서 시내로 나간 학생들이 "명동"을 중심으로, "롯데쇼핑 앞ㆍ중앙극장 앞ㆍ삼일고가도로ㆍ을지로ㆍ광교사거리ㆍ시청 주변" 등에서 기습 시위ㆍ해산을 거듭했다.

④ 06.13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ㆍ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ㆍ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 사태에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결혼식ㆍ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되었다. "성당"을 점거하고 있는 350여 명의 시위 농성자들은 오전 9시ㆍ11:50분 2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 50m 앞까지 진출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농성자들이 돌ㆍ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아, 서로가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ㆍ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오후 2시부터는 서울지역 200여 명의 "사제 신부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

⑤ 06.14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 한때 "성당 입구" 밖으로 나와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10:20분 이후부터는 "문화관 대강당"에서 "시국 토론회"를 가졌으며, 신도들은 오전7시 "미사"를 비롯해서 예정된 "휴일 미사"에 참가했다. "오전ㆍ오후 미사"가 끝난 뒤, "성당 광장"에서 한때 "연좌시위"가 있었으나, 충돌 없이 곧 해산했다. 그 날 오후,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은 "상업은행 본점ㆍ롯데쇼핑ㆍ사보이 호텔ㆍ중앙극장ㆍ퍼시픽 호텔 앞" 등 "명동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 발사"를 자제했으며, "시위대" 역시 돌ㆍ화염병을 던지지 않아, 이전과 같은 격렬한 시위 양상은 없었다.

"김병도(명동성당 주임 신부)"는 성명을 낸 뒤,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노력에 성원을 보내지만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학생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ㆍ학교ㆍ가정으로 돌아가 달라"고 권고했다.

⑥ 06.15일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은 "사제단의 뜻"을 받아들여, 해산했다. 그들은 오후 1:30분 "농성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오후 2시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을 가졌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고, 특히 "서울"의 경우, "명동"을 비롯한 시내 일부 대학에서 "명동 사태"를 지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고, "부산ㆍ대전ㆍ대구" 등 일부 지역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⑥ 06.16일

"명동성당" 점거농성에 이어 시위가 계속되어, "경남 진주"에서는 "파출소 4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치안본부"에 따르면, 당일 전국 57개 대학에서 40,0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는데, 주로 "부산ㆍ진주ㆍ대구" 지역에서 과격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06.10일 당시, 구속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자, "서울 교육대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⑦ 06.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60,000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지만, "6ㆍ10 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시민들이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저지하기로는 역부족이었다. 전국의 "파출소 29곳ㆍ경찰서 2곳ㆍ민정당사 4곳"이 불탔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이날의 "평화대행진"에 "6ㆍ10 대회" 때의 3배가 넘는 100만 명이 참여했다고 추산했다.

특히, "회사원ㆍ넥타이 부대"들의 시위 참여로, "6월 항쟁"은 "학생항쟁에서 시민항쟁으로 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찰력"은 명백히 한계를 드러냈고, 국민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물리력은 "계엄군"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은 고립된 한 도시에서가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 일선을 비워둔 채, "전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하지 않는 한, "6월의 행진"을 제압할 방안은 없었다.

⑧ 06.29일 :  6ㆍ29선언 (노태우의 8개항 시국수습방안)

"노태우(민정당 대선 후보)"는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선거 직선제개헌ㆍ김대중 사면복권ㆍ구속자 석방ㆍ사면ㆍ감형ㆍ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ㆍ29선언)"을 발표한다. 이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ㆍ재야 단체"는 "즉각적인 개헌작업착수ㆍ전원 석방ㆍ수배 해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0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ㆍ29선언"을 전격 수용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여ㆍ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1988.02월,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실행하도록 한다.          •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한다.        •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 사회 각 부분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5. 항쟁 이전

① "신군부 쿠데타" 전ㆍ후 : 12ㆍ12사태ㆍ신군부ㆍ광주 민주화 운동

1979년 "10ㆍ26 사건"으로, 17년간 독재정치를 펼치던 "제4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새로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다.(서울의 봄)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1979.12.12일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하나회)"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를 로봇처럼 조종했고,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집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시위 규모는 커졌고, 시위 참가자들도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유혈 진압"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②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01.13일 자정 경,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재학 중)"은 하숙집에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 분실 수사관(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ㆍ전기고문ㆍ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01.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다.

02.0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03.03일에는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04.0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③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

1987.04.13일, "전두환"은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ㆍ대통령 선거"는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호헌 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04.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④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ㆍ이철승" 등은 당시 "정부의 내각제 개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ㆍ김대중" 등은 7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이에 "전두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87.04.20~ 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지구당(20여개)"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해서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 측은 처음부터 이것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⑤ 경찰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1987.05.17일, "황보영국(노동자)"은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 타도"등을 외치며, 분신했으며, 1주일 뒤 사망하였다. 이튿날인 05.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ㆍ은폐되었음"을 폭로하였다 이에 "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자주 일어났다. 이후 05.23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06.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이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노신영 국무총리"를 지명했으나, 05.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고,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였다. 05.27일,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06.09일, "이한열(연세대 학생)"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07.05일 사망)을 입었다.

6. 항쟁 이후

07.09, "고 이한열 군"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 본관신촌 로터리서울시청 앞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07.09, "서울시청 앞"까지 추모행진을 벌인 수십만 명의 학생시민들이 낮 1시경부터, "시청 앞 광장"에서 대중 집회를 가졌다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광주 50"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노태우(민주정의당 대표)""629 수습선언"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10,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 선거""직접선거"로 치러졌지만, 정통 민주세력이자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통일민주당 고문)김영삼(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었다12.16,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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